•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2. 웅진천도와 중흥
  • 1) 동성왕의 활동
  • (1) 웅진천도와 정정의 불안

(1) 웅진천도와 정정의 불안

 개로왕 21년(475) 장수왕이 이끄는 3만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백제는 불의에 왕도 한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전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무렵 개로왕의 동생인 文周는 신라로부터 원병 1만 명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는 중이었으나 이미 고구려군은 퇴각하였고 개로왕은 참살당한 상태였다. 이에 문주는 왕위에 오른 후 10월에 祖彌桀取·木協滿致와 같은 중신들의 보필을 받아 부득이 남쪽의 熊津(公州)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공주지역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아서 고구려와 신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해 주는 천험의 요새지였다. 이곳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아갈 수 있고, 또 남쪽에는 곡창인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關防뿐만 아니라 교통과 경제의 요충지로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문주왕의 웅진천도는 고구려군의 침공에 의해 갑작스럽게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웅진은 우선 고구려의 직접적인 예봉을 피할 수 있고, 또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곳이기 때문에 새로운 왕도로 선정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웅진시대(475∼538)의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

 웅진천도는 개로왕이 패사한 지 불과 한 달만에 임기응변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웅진이 새 왕도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데에는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먼저 옛 왕도인 한성에서 옮겨 온 민호들을 귀족세력의 통제하에 일정지역에 분산시켜 수용·정착케 하는 일부터 착수하였다. 문주왕 2년(476) 2월에는 남으로 옮겨온 한성민호를 아산에 있는 大豆山城과203)李基白,<熊津時代 百濟의 貴族勢力>(≪百濟硏究≫9, 忠南大 百濟硏究所, 1978), 12∼13쪽. 직산의 慰禮城204)李基白, 위의 글, 14∼15쪽. 등에 거주케 하였다. 이와 같이 유민들을 새 왕도와 그 부근에 안치시킴으로써 뜻밖에 천도로 빚어진 혼란을 수습하려 했던 것이다.

 이어 새 왕도인 웅진성 안의 궁전 및 여러 정청 등 지배층을 위한 시설물들을 갖추어 나가는 일에 착수하였다. 웅진천도가 상당히 위급한 정황 속에서 불과 한 달만에 이루어졌고, 또 성왕 4년(526)에 웅진성을 처음「修葺」했다는≪삼국사기≫의 기사를 감안해 보면 왕도의 중심성인 웅진성을 새로 신축할 겨를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천도 직후에는 기존의 성곽시설을 그대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현재 2,660m에 이르는 包谷式의 공산성 중에서 현존하고 있는 테뫼식의 토성 부분이 당시의 웅진성의 규모로 추정된다.205)兪元載,<百濟 熊津城硏究>(≪國史館論叢≫45, 國史編纂委員會, 1993), 65∼66쪽. 웅진성 안의 궁실은206)공산성내 쌍수성 부근의 백제시대 건물터에서 다수의 기와류, 토기류 및 청동경이 출토되어 이곳을 웅진 도읍기의 왕궁지로 추정하고 있다(安承周,<百濟都城(熊津城)에 대하여>(≪百濟硏究≫19, 1988), 17∼20쪽;兪元載,<熊津都城의 羅城問題>(≪湖西史學≫18·19, 1992), 40∼41쪽). 문주왕 3년(477)과 동성왕 7년(485)에 걸쳐 중수되었는데, 南堂과 臨流閣207)≪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22년 춘.
공산성의 남문인 진남루와 동문지의 중간부분에서 백제시대 건물지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와당류와 자기류가 출토되어 임류각터로 추정하고 있다(安承周, 위의 글, 20쪽).
등 부속 시설물들이 하나씩 조영됨에 따라 제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곧 이어 왕도의 도시계획안을 마련하여 웅진교를 세우고 도로망을 정비하고,208)≪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20년. 또 웅진성의 방위를 위해 그 주변 일대의 요지에 沙井城, 炭峴 등 관방시설을 구축함으로써, 이제 웅진은 행정의 중심지로서, 교통의 요지로서, 관방의 요충지로서 미흡하나마 왕도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토목공사는 뜻밖의 천도로 쇠미해진 왕권을 진작시키려는 의도에서 추진된 것이었지만, 어려운 재정형편과 잦은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무리한 면이 많았다.

 이러한 새 왕도의 건설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웅진천도 직후의 정치상황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천도 초기의 백제는 한성의 함락과 한강유역의 상실, 개로왕 직계왕통의 단절 등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한 가운데 권신의 발호와 세력다툼, 이로 인한 왕권의 실추 등으로 이어져 일련의 정정불안이 야기된 것이다.209)웅진시대의 정치과정을 종합적으로 다룬 연구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盧重國,≪百濟政治史硏究≫(一潮閣, 1988), 146∼161쪽.
李道學,<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位繼承과 王權의 性格>(≪韓國史硏究≫50·51, 1985), 12∼34쪽.
梁起錫,≪百濟 專制王權 成立過程硏究≫(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90), 129∼149쪽.
이러한 와중에서 문주왕(475∼477)은 맏아들 三斤을 태자로 책봉하고, 아우인 昆支를 내신좌평에 임명함으로써210)≪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문주왕 3년 4월. 개로왕 직계왕통의 단절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왕위계승상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주왕은 당시 정치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병관좌평 解仇의 발호를 제어하지 못하다가 그에 의해 재위 3년만에 살해되고 말았다. 해구는 문주왕 2년에 천도 직후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틈타 병관좌평에 오르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그 동안 취약한 왕권을 보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내신좌평 곤지가 이듬해 7월에 사망하게 되자211)昆支의 죽음을 흑룡의 출현기사와 관련시켜 볼 때 解仇가 곤지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李道學, 앞의 글, 13쪽 및 盧重國, 앞의 책, 150쪽). 실권을 장악한 해구는 마침내 정치적 배경을 상실한 문주왕을 시해한 다음 13세에 불과한 삼근왕(477∼479)을 옹립하였다.

 해구는 어린 삼근왕으로부터 일체의 군국정사를 위임받아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여 국정을 오로지 하였다. 이 때의 좌평 眞男과 덕솔 眞老와 같은 진씨세력이 중심이 되어 해구를 견제하고 나서자 형세가 불리해진 해구는 금강유역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의 하나인 燕氏세력과 손을 잡고 대두성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결국 덕솔 진로 등에 의해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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