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4. 지배세력의 분열과 왕권의 약화
  • 1) 집권체제의 모순

1) 집권체제의 모순

 지금까지 사비로 천도한 이후 성왕대의 권력강화를 위한 제도개편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러나 관산성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고 3만여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당하자 성왕이 성공적으로 개편한 제도도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성왕이 전사한 이후 백제의 정치가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제도적 변화와 관련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관산성에서 패전한 이후 원로들의 패전에 대한 책임 추궁으로 인하여 위덕왕(554∼598)은 즉위할 때부터 심각한 곤경상태에 빠져들었다. 원로들의 정치적 발언권은 강해졌던 반면에 국왕의 정치적 입지는 상당히 좁아지고 있었다.「남부여」에서「백제」로의 국호 복고, 시호제의 일시 중단, 혜왕과 법왕의 짧은 재위기간 등은 왕권이 약화된 중요한 반증이라고 하겠다.316)이에 대하여 위덕왕 초기에는 원로들의 입김에 의하여 왕권이 위축되었지만, 위덕왕 14년(567) 이후에는 22부사의 강화, 불교이념을 통한 배타적 왕족의식의 고양,≪백제본기≫와 같은 역사편찬으로 왕실의 권위를 정당화하려는 이념의 수립, 특히 중국과의 활발한 대외관계를 통한 왕권의 권위 확보 등의 시책을 통하여 왕권기반의 구축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갔으며, 이러한 사실을 무왕대 이후 왕권기반의 구축을 이루게 한 고리로서 파악하고자 한 견해도 있다(梁起錫,<百濟威德王代 王權의 存在形態와 性格>,≪百濟硏究≫21, 1990). 이로 인하여 성왕 이래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취하였던 일련의 조치들이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극도로 무력해진 국왕이 행정권을 가진 22部司를 장악할 수 없었을 것이며, 22부사가 행정조직 체계내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위치도 변화를 겪었으리라고 본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22부사 중 일부 부사의 명칭은 주목할 만하다. 외관의 司軍部317)≪周禮≫에는 사군부의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사군부와 비슷한 司馬가 보인다. 사마를 사군부라고 표현한 의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군부의 명칭 역시≪周禮≫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司徒部·司空部·司寇部 등의 명칭은≪周禮≫에 나타난 관부의 명칭을 모방한 것이다. 이것을 백제에서 周禮的 관제개혁이 실시되었던 편린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318)鬼頭淸明,<日本の律令官制の成立と百濟の官制>(≪日本古代の社會と經濟≫上, 1978), 142쪽. 그런데 이 판단에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기상으로 약간 어긋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西魏에서 주례적 관제개혁을 실시하여「六官의 制」가 공포된 것은 위덕왕 3년(556)이었다. 백제에서 22부사가 완전히 정비된 것은 그 이전인 성왕대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면 백제에서 서위보다 먼저 주례적 관제개혁을 실시한 셈이 된다. 그러나 시기상으로 모순되는 이 점에 대해서는 달리 해석해야 할 것이다.319)李基東,<百濟國의 政治理念에 대한 一考察>(≪震檀學報≫69, 1990), 8∼14쪽에서는, 백제에서≪주례≫에 입각한 정치사상을 도입한 시기를 위덕왕대보다 앞당겨 성왕의 사비천도기로 제시하였다. 이 견해에 의하면 540년대에서 550년대 전반기에 걸치는 어느 시기에 백제는 三禮에 정통한 陸珝를 초빙하였으며, 그 때까지 존속한 백제사회의 이중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주례적인 정치사상을 도입하였으며 그것은 성왕의 관제정비와 중앙집권화 시책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성왕대에 정비된 22부사의 명칭 중≪주례≫에서 명칭을 따온 외관 4부의 경우 원래 명칭은 이와 달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원래의 명칭은 알 수 없지만, 사군부·사도부·사공부·사구부 등의 명칭은 위덕왕대 주례적 관제개혁이 실시된 이후의 것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그 근거로는 다음 세 가지 점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로 22부사의 명칭을 전해 주고 있는 사료가 위덕왕 이후의 상황을 보여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周書≫는 위덕왕 25년(578)의 백제와 북주와의 통교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로 보아 22부사의 명칭은 위덕왕 이후의 것일 수도 있다. 둘째로 사군부·사도부·사공부·사구부는 군사·교육과 의례·재정·사법 등 국가의 주요 업무를 수행하였던 기구라고 할 수 있어, 성왕의 국가행정통치에 빠질 수 없는 기구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기구들이 없었다면 성왕의 행정통치는 사실상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셋째로 22부사의 22라는 숫자는 22담로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백제에서는 22라는 숫자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周禮≫에서 명칭을 따온 외관 4부는 위덕왕대에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이는 주례적 관제개혁의 소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320)사군부·사도부·사공부·사구부가 국가의 주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관부들만이 주례적 관제개혁의 대상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로 보아 적어도 위덕왕대의 주례적 관제개혁이 실시되기 전까지 외관 4부는 귀족세력의 대표인 좌평에게 장악되었을 것이다. 그 때까지 좌평은 이들 부사의 장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최소한 외관 10부사, 더 나아가서는 22부사를 완전히 장악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21)귀족세력의 대표인 좌평이 왕실사무를 관장하였던 내관 12부까지 장악하였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시호의 일시 중단이나 왕위계승문제까지 깊이 개입하였던 귀족세력이라면 그렇게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하겠다. 사료가 부족한 관계로 22부사를 내관과 외관으로 분리하여 고찰하기가 어려운 점이 많다. 이에 22부사를 하나로 묶어 파악하고자 한다. 이 때 국왕은 거의 형식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귀족세력이 22부사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왕의 세력이 형식화되었기 때문에 신라의 집사부와 같은 기능을 담당했던 전내부의 기능이 거의 마비된 상태였을 것이다. 결국 각 부사간의 권한을 결집시켜줄 수 있는 前內部의 기능까지도 국왕의 권력과 함께 동시에 약화되었다고 하겠다.322)성왕대 22부사를 장악하였던 전내부는 위덕왕 이후 행정구조의 개편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었을까가 궁금하다. 전내부는 국왕의 권력을 기반으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구였다. 국왕의 권력이 미약해짐으로써 전내부 역시 그 기능이 차츰 축소되어 내관의 한 부사로서의 임무만을 수행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

 그 후 다시 국왕권이 강화되었다고 하는 무왕대에 이르면 이러한 권력구조상에 또 한 차례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왕(600∼641)은 阿莫山城전투에서의 패전을 계기로 차츰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재위 말기에 이르러서는 아들 의자를 태자로 임명하여 왕위계승에 대한 귀족들의 간섭을 배제시켰다. 그리고 국왕의 권력강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20여 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물을 끌어 사비성 남쪽에 못을 만들고 그 안에 方丈仙山을 만들었으며 大王浦에서 잦은 연회를 베풀었다.323)金周成,<百濟武王의 寺刹建立과 權力强化>(≪韓國古代史硏究≫6, 1992). 이를 통하여 무왕 말기에 이르러 위덕왕대의 귀족 중심의 정치구조가 국왕 중심의 정치구조로 변화되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왕의 권력강화는 중앙행정조직 체계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內官을 설치한 바 內臣佐平은 宣納事를, 內頭佐平은 庫藏事를, 內法佐平은 禮儀事를, 衛士佐平은 宿衛兵事를, 朝廷佐平은 刑獄事를, 兵官佐平은 在外兵馬事를 각각 담당하였다(≪舊唐書≫권 199 上, 列傳 149 上, 東夷傳, 百濟).

 백제가 공식적으로 당과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무왕 22년(621) 이후였다. 따라서≪舊唐書≫百濟傳에는 무왕대 이후의 백제사회를 반영하는 내용이 많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324)≪舊唐書≫는 945년에 5代시대 後晉의 재상 劉徇 등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10세기에 편찬된 만큼≪舊唐書≫百濟傳에 실린 내용은 사비시대 후기의 백제사회의 제도와 부흥운동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양국간의 이해관계에 긴밀하게 작용했었던 정치제도에 관련된 기사는 더욱 그러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위의 사료는 무왕대 이후의 정치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위의 사료에는 6좌평의 명칭과 그 직능이 서술되어 있을 뿐 22부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 점은 위의 사료와 같은 내용의 사료가 실려 있는≪新唐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의하면 무왕 이후 22부사가 폐지되었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22부사로 분화된 행정체계를 경험하였던 백제가 이를 폐지하고 다시 6좌평제로 환원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더구나 무왕 이후 국왕의 전제권력이 강화되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국왕의 권력강화에 따라 22부사와 6좌평간의 세력관계가 변화되면서 22부사의 중요성은 격감되고 6좌평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순리적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 이 사료에서 주목되는 점은 6좌평의 명칭과 그 직능이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령왕대 이후 6좌평의 구체적인 명칭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왕대 이후의 정치제도를 반영해 준다고 생각되는 이 사료에서 6좌평의 명칭과 그 직능이 서술되었던 점은 확실히 주목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6좌평을 내관이라고 표현했던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위 사료의 내관은 외관인 지방통치제도와 대비해서 쓰인 용어이다.325)위 사료에 뒤이어서 지방제도인 5방제도가 서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그렇다면 내관인 6좌평제도는 중앙행정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6좌평제도가 중앙행정 조직체계내로 편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좌평제에 또 한 차례의 변화가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6좌평의 임무와 22부사의 임무가 서로 대응되는 점이 주목된다. 즉 그 임무상에서 내신좌평은 전내부, 내두좌평은 사구부, 내법좌평은 사도부, 조정좌평은 사구부, 병관·위사좌평은 사군부와 임무상에서 각각 대응될 수 있다. 최소한 이 관부들의 장에는 6좌평이 임명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26)「최소한」이란 표현을 사용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6좌평이 22부사 중 국가의 행정통치기구 중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전내부·사군부·사도부·사공부·사구부 등만을 장악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22부사를 6개의 그룹으로 편제하여 각 좌평이 그 그룹의 장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무왕은 위덕왕대에 22관부를 장악하였던 좌평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좌평을 국왕의 행정관료로 편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에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무왕 이후에도 좌평은 여전히 구체적인 직능이 결여된 채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무령왕대 이후의 좌평제가 무왕대 이후에도 변화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왕·위덕왕대를 거치면서 권력구조의 변동에 따라 중앙행정 조직체계의 변화를 인정한다면 무왕대 이후 국왕의 권력강화에 따른 중앙행정 조직체계의 변화 역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삼국사기≫백제본기의 좌평 표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 문제는 비록 좌평이 국왕의 행정관료로서 성격이 짙은 6좌평으로 전환되었다고는 하지만 좌평으로서 가졌던 중요한 기능인 합의기구로서의 기능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까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그러나 합의기구로서의 좌평의 권한 역시 예전과 같이 않았을 것이다. 의자왕 15년(655) 좌평 成忠이 간언을 하였는데, 그 결과 성충은 옥에 갇혀 죽게 되었다. 이 일이 있었던 2년 후에는 의자왕은 왕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좌평제에서 지속적으로 지켜져 온 정원제가 철폐되었다고 하겠다. 이는 좌평이 가지고 있었던 합의기구로서의 권한을 완전히 빼앗긴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생각해 볼 때 무왕대 이후 합의기구로서 좌평의 권한은 예전과는 달리 크게 축소되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상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무왕은 위덕왕대의 행정조직체계를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왕권을 강화함에 따라 좌평을 6좌평제로 전환시킴과 동시에 그들을 국왕의 행정관료로 편제시켜 22부사를 통치하도록 하였다. 이 행정조직체계는 의자왕대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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