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4. 지배세력의 분열과 왕권의 약화
  • 3) 대외관계의 변화

3) 대외관계의 변화

 중국은 오랫동안의 남북조 분열시대를 지나 마침내 수에 의하여 통일되었다(589). 통일제국인 수의 등장은 삼국간의 세력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여기에서는 백제를 중심으로 하여 7세기 대외관계의 변화를 백제 국내의 정치세력의 동향과 연결시켜 추구해 보고자 한다.

 백제는 우선 수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백제는 수가 요동을 침입할 때 수를 돕는다고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양단책을 쓰고 있었다.358)≪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13년. 또 한편 백제는 수양제가 고구려의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으나 몰래 고구려와 通和하여 간사하게도 중국을 살피고 있었다는 것이다.359)≪隋書≫권 81, 列傳 46, 東夷傳, 百濟. 이러한 사실들은 백제가 수와 동시에 고구려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생각된다. 백제가 수와 고구려에 대하여 등거리외교를 실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백제는 수와 고구려와의 분쟁을 틈 타 신라와의 대적에 모든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백제는 무왕 3년(602) 解讐가 참패한 이후 국내정세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무왕 3년 이후 무왕 12년까지 백제는 신라를 침입하지 않았다. 도리어 신라가 무왕 6년에 백제의 동쪽 국경선을 침범하였다. 10여 년 동안 백제는 국내외 정세를 관망하면서 내정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 때 백제에서는 6좌평의 관료화 추진, 미륵사의 건립 등을 통하여 대성8족의 세력이 쇠퇴하자 국왕 중심의 체제로 전환하고 있었다.

 무왕 19년(618) 중국에서는 수를 이어서 당이 들어서게 되었다. 백제는 또 다시 당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사신을 당에 보내어 明光鎧를 전하고 인하여 고구려가 도로를 막고 上國에 來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호소하였다(≪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27년).

 무왕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 조공이 어렵다는 명분으로 간접적으로 당과 고구려와의 전쟁을 유도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당에게 고구려를 평정해 줄 것을 간접적으로 호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구려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백제의 무왕이 수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던 고구려를 멀리 할 이유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고구려의 영류왕 역시 강력한 당의 세력에 맞서야 했으며, 왕권을 강화하여 국내 정치세력을 안정시켜야 할 입장이었으므로 비록 양단책이나마 화해를 표방하고 있었던 백제를 멀리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640년대 이후 백제와 고구려는 뚜렷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의자왕 3년(643) 11월에 고구려와 백제가 공동으로 신라의 당항성을 점령하려고 했던 사실이나, 의자왕 15년에는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북계 30여 성을 점령하였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무왕 28년(627) 7월 백제가 단독으로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려고 하였다는 사실과 비교하여 볼 때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의자왕 3년 이후 그 전에 비해서 무척 친밀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기록을 살펴보면 그 관계가 더욱 친밀해져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에 신라에서 올린 표에 의하면 왕과 고려가 매번 군대에 일으켜 朝旨를 어기고 함께 신라를 침범하였다고 하였다. 내가 문득 왕과 고려가 協契를 맺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는데, 지금 왕이 올린 표를 보고 또 康信에게 물어 왕과 고려가 한 무리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으니, 이와 같음은 진실로 내가 바라는 바에 잘 부응하는 바이다. 康信이 또한 말하기를 왕의 뜻이 군대에 파견하여 관군과 함께 흉적을 정벌하고자 한다고 하였다(<唐太宗與百濟義慈王書>, 李基白 編≪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 一志社, 1987, 301쪽).

 이 기록은 의자왕 4년 백제는 당에 강신을 파견하였는데, 다음해 2월경에 당 태종이 그를 통해 의자왕에게 고구려정벌군을 동원하도록 보낸 교서이다.360)朱甫暾,<『文館詞林』에 보이는 韓國古代史 관련 外交文書>(≪慶北史學≫15, 1992), 166∼167쪽에서 이 문서의 작성 목적을 “당도 고구려 원정을 앞둔 시점에서 백제와 신라와의 화해를 도모하는 의미에서 회유책의 일환으로 형식적인 청병을 하였을 뿐 실제로는 신라가 원병을 파견하는 동안 그에 대한 공격을 못하도록 유도하는 데에 주된 목적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비록 당 태종의 물음에 대하여 강신은 백제와 고구려가 한 무리가 되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의자왕 3년 이후 양국의 동정에 비추어 볼 때 양국 사이에 모종의 協契가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하겠다.

 백제와 고구려의 밀착과 관련하여 의자왕 2년 양국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백제에서는 정월에 왕의 모후 사망 이후 翹岐 및 그의 어머니와 자매 등 여자 4인과 내좌평 기미 등 고명한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귀양갔던 사건이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같은 해 10월에 蓋蘇文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즉위시켰다. 같은 해에 일어났던 두 사건이 두 나라를 가깝게 만들었다는 것은 그럴 듯한 추정이라고 하겠다.361)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 變化에 대한 一考察>(≪東方學志≫28, 1981), 95쪽.
金壽泰,<百濟의 滅亡과 唐>(≪百濟硏究≫22, 1991), 160쪽.

 백제가 고구려와 가까워질수록 그만큼 당과의 등거리외교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백제는 의자왕 11년과 12년에 각각 한 차례씩 입당사를 파견한 것을 제외하고는 의자왕 5년 이후에는 무왕대 이래 매년 보냈던 입당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의자왕 11년의 입당사 파견은 당 태종의 죽음으로 인한 당의 변화된 사정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 파견된 입당사가 가져온 교서에 의하면 백제왕이 만약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당은 고구려를 거란과 諸蕃으로 하여금 혼란시킨 다음 신라가 요청한 바에 따라 백제와 결단을 하겠노라고 위협하였다.362)≪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11년. 의자왕은 이듬해 당의 눈치를 살피기 위한 入唐使를 한번 더 파견한 후 당과의 관계를 청산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확인이나 해주듯이 당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하여 의자왕 13년에는 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363)왜국과의 통교는 일찍부터 있어 왔다. 의자왕 13년의 통교는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우의를 다짐하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입당사가 파견되지 않았던 때로부터 백제와 당과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단절되었다고 하겠다.

 의자왕 5년 이후 백제는 당 대신 고구려를 택했다고 하겠다. 이 사실은 백제 멸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던 만큼 비중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당 태종이 의심하였던,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協契가 주목된다. 양국 사이에 맺어진 협계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 시대에 행해졌던 양국의 공동작전을 생각해 보면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협계에 따라 공동작전이 행해졌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의자왕 3년과 15년 양국은 두 차례에 걸쳐 공동작전을 펼쳤다. 의자왕 3년에는 신라에서 당으로 가는 통로였던 당항성을 공격하려 하였고, 동 15년에는 신라의 북계 30여 성을 점령하였다. 북계 30여 성의 구체적인 지명 고증은 어렵겠지만, 당항성을 중심으로 한 한강유역이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두 차례 모두 공격대상이 신라였으며, 당항성 부근의 한강유역이었음은 주목된다.364)물론 두 나라에게 공통적으로 가능한 공격지역으로는 한강유역 밖에 달리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연개소문이 고구려를 방문한 김춘추에게 죽령 서북지역의 땅을 반환해 줄 것을 요구했었다(642)는 사실이 주목된다. 당시 신라가 죽령 서북의 땅을 반환해 준다는 것은 도저히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일을 신라에게 요구했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신라와 동맹을 맺을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입장으로서는 백제가 신라에 비하여 보다 소망스러운 동맹대상으로 믿고 싶었던 것 같다. 大耶城을 함락하여 승세에 있었던 백제가 고구려에게 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즉 고구려는 백제에게 한강유역이라는 미끼를 던져 줌으로써 백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당항성이 신라의 당과의 교통로였던 만큼 신라를 고립시키는 데 양국의 일차적 목적이 있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당항성 부근의 한강유역은 무왕 28년(627) 백제가 공격하려던 곳이었을 것이다. 무왕은 잃었던 땅을 회복하려고 했었다. 백제로서는 한강유역이 중국과의 교통로일 뿐만이 아니라 백제의 발상지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역이었다. 한강유역은 고구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역이었다. 보장왕 원년(642) 고구려를 방문한 김춘추에게 연개소문이 반환을 요구한 땅이 죽령 서북지역이었다. 죽령의 서북지역이라면 바로 남한강유역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한강유역은 백제나 고구려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라고 하겠다. 양국이 이 지역을 공동으로 회복하려고 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협계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한강유역을 공동으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즉 양국이 맺은 협계의 목적은 당항성 부근의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신라를 당으로부터 고립시키는 데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외교정책은 백제와 고구려 양국에서 공동으로 유리한 정책이었지만, 후자보다는 전자에게 더욱 소망스러운 정책이었다. 양국 사이에 실제로 행해진 군사작전지역이 당항성 부근의 한강유역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러하다. 사비시대 국왕의 권력강화에 최대의 걸림돌이 되었던 것 중의 하나가 한강유역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백제가 의자왕대에 들어서서 점차 당과 결별하고 고구려와 친밀해져 가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자왕대 초반 백제나 고구려의 입장에서 한강유역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강유역은 당의 입장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하겠다. 당은 북쪽 돌궐과의 투쟁을 마무리짓기까지에는 삼국이 분열된 상태에서 현상유지하는 정도를 원했었던 것이다.365)≪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28년 8월. 이 기사 가운데 당이 백제에 보낸 교서가 전하는데 삼국이 오랜 숙원을 풀고 화목하게 지낼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신라를 위해서 군대를 파견해 준다는 것도 아닌 지극히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어투이다. 당이 이러한 교서를 작성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때 당은 국내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한「貞觀의 治」를 진행시켜 가고 있었으며, 북쪽 돌궐과의 투쟁에 더 신경을 쓰던 무렵이었다. 따라서 삼국간의 외교관계는 적당한 선에서 현상유지 정도로 이끌어 가려고 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교서를 보낸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신라의 당과의 거의 유일한 통로인 당항성을 고구려와 백제에게 점령당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당의 이러한 의도를 알아차린 고구려와 백제가 당과의 외교관계를 무시한 채 한강유역에 대한 공격을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고구려의 경우 당과의 관계개선을 위하여 도교를 받아들이려고 하였으며, 백제는 당과 고구려 가운데 어느 쪽이 유리할까 저울질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백제와 고구려 양국은 당의 의도를 어느 정도 높여주어야 했었다.

 또 한편 백제의 국내사정도 한강유역의 회복을 달가워하지 않는 요인이 잠재되어 있는 듯하다. 무왕대 이후 의자왕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백제는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대부분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략하였다.366)물론 백제가 신라 서쪽 변경을 공격한 것은 신라의 한강유역에 대한 필사적인 방어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백제의 내부적인 요인과 당과의 대외관계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무왕과 의자왕이 각각 한 번씩 한강유역에 대한 회복을 기도했었던 것은 무왕의 입장에서 그만큼 의미있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강유역의 회복은 국왕이 권력을 강화하는 데에 중요했었다고 하겠다. 한강유역의 회복은 대성 8족에 대한 국왕의 입장을 강화시켜 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회복은 위덕왕 이후 거의 100여 년동안 형성되었던 대성8족 사이의 세력균형이 깨어질 위험성이 내포되기까지 하였다. 이에 대성8족은 한강유역의 회복에 대하여 예민한 거부반응을 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367)성왕대 한강유역의 회복에 적극적이었다고 생각되는 세력으로 진씨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한강유역을 잃어버린 지 100여 년 이상이 흘러버린 의자왕대에 이르러서는 진씨도 당시의 세력균형을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자왕 당시에는 대성8족 전체가 한강유역의 회복을 기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굳어져 가고 있었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권력강화를 의도했었던 목적에서 한강유역 회복을 꾀하였던 국왕은 권력강화를 포기하지 않는 한 한강유역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는 없었다. 등거리외교를 지향하던 백제가 당과 고구려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으면서 의자왕이 결국 고구려를 택했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당과의 관계를 단절한 이후 백제는 한강유역에 대해 더 이상 당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어졌다. 의자왕 15년 백제는 마침내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북계 30여 성을 침공하였다. 이제 백제와 당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된 반면에 신라의 당에 대한 군사요청은 끊임없이 이어졌다.368)태종무열왕이 당에 군사를 요청하고 군사를 파병한다는 연락이 없자 매우 근심하고 있었는데 長春과 罷郞이 나타나 곧 당이 군대를 파견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태종무열왕 6년 10월). 이 설화 형식의 이야기는 신라가 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당의 군대를 얼마나 열망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 사이에 맺어진 백제 공략을 약속한(648) 이후 신라가 당에 파견한 사신의 주요 임무는 당이 군대를 파견하도록 종용하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성충이 당과 신라의 연합군대가 쳐들어 올 것을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은369)≪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16년. 이러한 대외관계의 변화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金周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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