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1. 중국왕조와의 관계
  • 1) 대중관계의 시작

1) 대중관계의 시작

 ≪三國史記≫百濟本紀에 의하면 백제는 근초고왕 27년(372)에 중국의 晋과 처음으로 대중관계를 맺고 있다. 즉 근초고왕 27년과 28년에 연이어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있다. 이러한 백제의 사신 파견은≪晋書≫簡文帝紀에서도 확인된다.

咸安 2년 춘정월 신축, 百濟·林邑王이 각각 사신을 보내 方物을 바쳤다.

 咸安 2년 6월, 사신을 보내 百濟王 餘句를 배하여 鎭東將軍領樂浪太守로 하였다(≪晋書≫권 9, 本紀, 簡文帝).

 위의 내용은 백제의 조공과 더불어 그 해 6월에는 근초고왕을 鎭東將軍領樂浪太守에 봉책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백제와 진의 양국 사료에서 모두 공식적인 외교적 행위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에 이루어진 백제의 조공와 진의 봉책은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서로의 필요에 의한 쌍방적인 외교행위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백제의 대중관계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도 百濟란 국명이 이미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句麗·百濟 및 宇文·段部의 사람들은 모두 兵勢에 의하여 옮겨온 것으로 한인들이 의를 사모하여 온 것과 다릅니다. 그래서 모두 돌아갈 생각뿐입니다. 지금 그들의 수가 십만 호나 되어 도성이 비좁게 모여드니 장차 국가에 해가 될까 합니다(≪晋書≫권 109, 載記 9, 慕容皝).

 위와 같이≪진서≫모용황전에는 백제의 존재가 이미 보이고 있는데, 이 때는 백제가 아직 공식적으로 진과의 외교관계를 맺기 전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의 백제를 만주지역에 실제로 존재하였던 세력으로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370)李道學,<百濟集權國家形成過程硏究>(漢陽大 博士學位論文, 1991), 48∼51쪽. 그러나 3세기 말경의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기록한≪三國志≫에서는 烏丸·鮮卑·夫餘·高句麗·東沃沮·挹婁·濊·韓·辰韓·弁辰·倭人만이 기록되어 있고, 백제에 대해서는 따로 입전되어 있지 않다. 이로 보면 이전부터 만주지역에 실존하였던 세력이라고 하기보다는 특수한 상황에서 등장한 일시적 존재로 해석된다. 아마도 이러한 상황은 한반도에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樂浪·帶方이 313년경 요서지방으로 이동하면서 비롯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371)兪元載,<晋書의 馬韓과 百濟>(≪韓國上古史學報≫17, 韓國上古史學會, 1994). 백제가 진과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이전에 낙랑·대방의 요서 이동과 慕容氏의 세력 확장과정에서 백제란 국명이 중국사료에 먼저 기록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백제가 근초고왕대에 중국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갖게 된 것은 백제국 성장의 결과였다. 백제의 성장과정은 무엇보다도 馬韓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듯하다. 百濟는 마한 54개국 가운데 하나인 伯濟國으로부터 성장하였기 때문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마한은 백제의 온조왕대에 이미 멸망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372)≪三國史記≫권 97, 列傳 67, 馬韓. 그러나 이와는 달리≪진서≫에는 290년까지 수차에 걸친 마한의 진에 대한 조공기사가 전하여지고 있다.373)≪晋書≫권 97, 列傳 67, 馬韓. 그러므로≪진서≫에 나타나는 마한의 조공을 백제의 조공으로 해석하기도 한다.374)李基東,<馬韓領域에서의 百濟의 成長>(≪馬韓·百濟文化≫10, 圓光大 馬韓·百濟文化硏究所, 1987), 62쪽. 그러나≪진서≫마한전에 의하면 마한이 분명히 일관되게 조공하고 있다. 이를 국명을 달리하는 백제가 조공한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조공이란 그 특성상 쌍방이 상대를 분명히 인식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 때 조공한 것은≪진서≫의 기록대로 마한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진서≫에 나타나는 마한은 어떠한 존재일까. 이는≪삼국사기≫백제본기에 온조왕대 백제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마한과는 다른 대상으로 이해된다.≪삼국사기≫백제본기의 마한은 초기 백제와 인접하였던 차령·금강 이북의 目支國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서 마한 54개국의 일부로 파악된다.375)兪元載, 앞의 글.
盧重國,<目支國에 대한 一考察>(≪百濟論叢≫2, 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90), 72∼74쪽.
그리고≪진서≫에 290년까지 나타나는 마한은 초기의 백제에 멸망되지 않고 있던 나머지 마한세력으로서 이들의 역사활동에 대한 기록이 바로≪진서≫의 마한으로 판단된다.376)兪元載, 위의 글. 그러므로≪삼국사기≫백제본기의 마한과≪진서≫마한전의 마한을 동일시해서는 안될 것이다.377)兪元載, 위의 글. 실로 마한은 54개국으로 이루어졌던 정치구성체임을 이곳에서 다시 상기해야 할 것이며, 이들이 일시에 멸망될 수 있을 만큼 응집력이 있던 하나의 세력이 아니었음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진서≫에서 이러한 마한의 역사활동이 사라지고 백제가 근초고왕 때 진과 공식적인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마한의 잔여세력을 백제가 어느 정도 극복하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한의 잔여세력이 상존하고 있을 때는 이들에 의한 대중관계가 아직 계속되었으나, 백제가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이들 세력을 정치적으로 복속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백제국으로 발전하면서 백제라는 국명을 가지고 마한에 대신하여 대외적으로 진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실로 근초고왕 26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진군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으며, 동 21년과 23년에는 이미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를 견고히 하고 있었다. 그 후 근초고왕 27년에 이르러서는 진과 통교함으로써 동북아시아사의 일익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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