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2. 백제의 요서영유(설)
  • 4) 낙랑·대방의 요서이동과≪송서≫·≪남제서≫
  • (1) 낙랑군과 대방군

(1) 낙랑군과 대방군

 한의 무제 때 설치된 漢四郡 가운데 낙랑과, 그 후의 대방은 삼국의 발전기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다.≪삼국사기≫를 통해 그들의 역사활동을 살펴보면 백제와의 관계가 중심이었다. 그 내용은 백제가 온조왕 때부터 영역을 확대해 나가며 이루어지는 활동과, 그 후 고이왕·책계왕·분서왕대에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나누어진다. 온조왕대의 기록은 주로 백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낙랑과의 관계로서, 도읍지가 그들에 의하여 불타버리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있다.448)≪三國史記≫권 22,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17년 춘. 이를 보면 낙랑은 초기 백제에 있어서 극복되어야 할 최대의 현안문제였던 것이다. 그 후 고이왕대 이후인 3∼4세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백제와 대방과의 관계이다. 책계왕대에 고구려가 대방을 침략하자 대방은 백제에 군대를 청하였고, 백제에서는 대방「舅甥之國」이라 하여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 낙랑에 비교할 때 대방은 백제와 이 시기에 상당히 밀착된 관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백제왕이 시해당하는 등 낙랑과는 계속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대방과는 적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백제와 대방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後漢 교체기에는 낙랑군에서 王調가 태수 劉憲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다. 광무 6년(30) 한에서 파견된 낙랑태수 王遵에 의하여 난이 평정되고, 낙랑은 다시 후한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이 때 후한은 낙랑의 동부 7현을 포기하고 그 곳에 토착인으로 현후를 임명하였다. 특히 환제·영제대에는 이 지역에서 한·예가 강성하였으므로 낙랑주민이 한의 영역으로 유입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낙랑 屯有縣 이남의 땅은 황무지화되었고 마침내 요동의 公孫氏가 대방군을 설치하게 되도록 이르렀다. 그로 말미암아 이 지역은 공손씨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이들이 魏에 멸망한 다음에는 위의 幽州刺史에게, 西晋이 위를 대신하면서는 서진의 유주자사에게 속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낙랑은 대방군을 분리한 이후 11현에서 대동강 이북의 5현은 없어지고 이남의 6현만이 남게 되었다.

 ≪후한서≫에 의하면 유주의 속군으로 낙랑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낙랑의 속현 중에 대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진서≫지리지에 의하면 평주에 속하게 되는데 대방군이 낙랑군과 함께 독립된 군으로 되어 있다.449)≪後漢書≫권 33, 郡國志 23.
≪晋書≫권 14, 志 4, 地理 上.
이 때의 대방은≪후한서≫에 낙랑의 속현으로 되어 있던 列口·昭明·長岑·提奚·帶方·含資·海冥 등을 관할하였다. 이른바 남부도위 소관의 7현을 관할하고 그 치소를 대방현에 두었던 것이니, 오늘날의 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속칭 唐土城이 치소가 되는 곳이었다.450)李丙燾,<眞番郡考>(≪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진서≫지리지에서 당시의 군세를 살펴보면 낙랑보다 대방의 군세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451)≪晋書≫권 14, 志 4, 地理 上, 平州. 이러한 대방군은≪위서≫지리지에서는 다시 영주에 속하는 낙랑군의 속현으로 개편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낙랑·대방은 진대에 한반도에서 활동했던 세력이었으며 더욱이 대방은 요동군 다음가는 군세였다. 이들은 4세기에 이르면 이미 중국의 예속상태에 놓여 있지 않고 토착호족들에 의하여 지배되었다.452)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吉川弘文館, 1966). 이러한 세력집단이 바로 요서지방에 웅거하고 있던 모용씨에게로 귀속되어지는 것이다. 이는 실로 당시의 중국인들에게는 중요한 세력의 변화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특히 동진으로서는 모용씨세력과 대치하던 시기이므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들이 이동하였던 요서는 요동과 마주하는 지역이다. 이들이 나뉘어지는 곳은 요하이다. 요하는 남만주를 동서로 가르고 발해만으로 유입된다. 요서군은 한대 이전에 이 지역의 서쪽에 설치되었는데 때에 따라 변동이 심했던 지역이다. 요서군의 중심지는 大凌河 하류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대에는 烏丸의 침입에 의하여 지역이 축소되기도 하였고, 요동속국이라는 특수한 행정구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후한 말기에는 鮮卑에 의하여 부활되었으나 다시 개편되었다가 晋末까지는 진에 속했었다. 그 후 이곳은 선비족이 건립한 前燕·北燕·北魏 등의 중심지로 되었다. 백제가 요서를 영유했던 시기가 진나라 말기로 규정될 때 이 시기의 요서지방은 선비족들에 의하여 점령된 역사활동의 중심 마당이었다.453)傳樂成,≪中國通史≫上(1974).
岡崎文夫,≪魏晋南北朝通史≫(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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