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3. 왜와의 관계
  • 1) 대왜관계의 시작

1) 대왜관계의 시작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기본사료로는≪삼국사기≫와≪日本書紀≫가 있다. 하지만≪삼국사기≫와≪일본서기≫의 기록은 내용과 분량에 있어서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삼국사기≫에는 백제본기에 10여 개의 짤막한 기사가 실려 있을 뿐이며, 그것도 주로 4세기 말에서부터 5세기 전반기에 걸쳐서 집중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한 백제의 대왜관계를 구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반면에≪일본서기≫에는 백제관계 기사가 80여 개조나 이르고 있어≪삼국사기≫보다 자료를 많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일본서기≫에 전하고 있는 백제관계 기사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으며 일본학계에서도 시인하고 있는 실정이다.≪일본서기≫는 고대 천황제국가 건설을 기념하여 8세기 초 일본의 지배층이 천황가의 유구성과 존엄성을, 나아가서는 일본열도 지배의 정당성을 천명할 목적으로 편찬한 고도의 정치성을 띠고 있는 역사서이다.468)李基東,<百濟의 勃興과 對倭國關係의 成立>(≪古代韓日文化交流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250쪽. 그 결과 국내관계 기록이나 대외관계 기록에서 많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개작과 왜곡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일본서기≫에서 백제와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의 근거가 된≪百濟記≫·≪百濟新撰≫·≪百濟本記≫라는 이른바 백제3서는 백제가 망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조정에서 일하던 백제사람들이 가지고 건너간 본국의 역사기록을 당시 사정에 의해 개서하고 수식하여 일본당국에 제출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469)李基東, 위의 글, 251쪽. 이들에 의해 제출된 내용들은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다시 윤색되어≪일본서기≫에 인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일본서기≫의 백제관계 기록으로부터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한 사료비판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양적으로 풍부하지 못한≪삼국사기≫의 내용과 양적으로는 풍부하나 내용상에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는≪일본서기≫의 내용을 사료비판을 통해 어떻게 조화롭게 해석하느냐 하는 점이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밝히는데 가장 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들 자료에 대한 연구가 일치된 해석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가 아신왕 6년(397)에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한 것이470)≪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아신왕 6년 5월. 왜국과의 관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는 전지왕 원년(405)에 기록된 전지왕의 등극과정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471)≪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전지왕 원년. 즉≪삼국사기≫는 4세기 말에 이르러 처음으로 왜국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아신왕대에 백제와 왜가 처음으로 접촉하였던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때의 사실은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에 대응하기 위하여 왜국과의 관계를 한층 강화하기 위한 조처로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일본서기≫에는 神功皇后 섭정 46년(246;고이왕 13;병인)부터 백제와 왜국의 접촉기사가 실려 있다. 그리고 신공황후 52년에는 백제에서 왜로 七枝刀와 七子鏡을 보내고 있어 외교적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일본학계에서 통설화되어 있는 바에 따라 간지 2운(갑) 120년을 내려 조정하면 백제의 근초고왕대에 해당하게 된다. 이곳에 실려있는 기사는 그 내용의 줄거리를 볼 때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서 일찍이 주목되어 온 바 있다. 따라서 신공기의 백제관계 기사를 일부 수정하여 취하면 당시의 백제사를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472)李丙燾,<近肖古王拓境考>(≪百濟硏究≫1;≪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514쪽).
千寬宇,<復元加耶史>(≪文學과知性≫9-1, 1978), 915∼918쪽.
≪일본서기≫의 상고기년이≪삼국사기≫의 것보다 120년 빠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내려 조정하면 적어도≪일본서기≫신공기가 백제의 근초고왕대에 해당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공기의 백제관계 기사의 내용은 근초고왕이 전남지방에 출정하여 이 지역을 경략하는 기록으로 이해되고 있다.473)李丙燾, 위의 글.
千寬宇, 위의 글.
그러므로 백제는≪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아신왕대에 이르러 왜국과 처음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며, 이전인 근초고왕 때부터 백제와 왜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사에서 근초고왕대는 대외관계에서 주목되는 시기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21년(366) 3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냈으며, 23년에도 또 보내어 진한의 통일세력으로 급성장한 신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은 태자인 근구수에게 고구려의 雉壤을 공격하도록 하고 그 후에는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더구나 근초고왕 27년에는 중국의 晋에 공식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대중관계를 시작하는 등 백제가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각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근초고왕대의 신라·고구려·진과의 관계에 짝하여 대왜관계 또한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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