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3. 왜와의 관계
  • 2) 대왜관계의 전개

2) 대왜관계의 전개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왜와 처음으로 접촉한 것을 아신왕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일본서기≫에 의하면 이미 근초고왕 때부터 정치적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백제에서 七枝刀 1구와 七子鏡 1면을 보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474)≪日本書紀≫권 9, 神功皇后 52년 9월 정묘 초하루 병자. 이 칠지도에 대해서는 현재 일본의 奈良縣 天理市의 石上神宮에 소장된 七枝刀를 그 당시의 유물로 생각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런데≪일본서기≫신공황후 52년은 서기 252년에 해당된다.≪일본서기≫의 상대기사 연대는 간지 120년씩을 내려서 이해하여야 되는 것이 통설이므로 위의 기사에 대한 실제의 연대는 372년이 된다. 이는 바로 근초고왕 27년이다. 근초고왕 27년은 백제가 중국의 晋과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때이기도 하다. 그리고 칠지도의 앞뒷면에는 61자의 金象嵌 명문이 있어 주목되어 왔다. 이 명문에 대한 해석에는 많은 논란이 있다.475)栗原朋信,<七支刀銘文についての一解釋>(≪日本歷史≫216, 1966).
金錫亨,≪古代韓日關係史≫(勁草書房, 1969).
神保公子,<七支刀の解釋をめぐって>(≪史學雜誌≫84-11, 1975), 35∼56쪽.
李丙燾,<百濟七支刀考>(≪震檀學報≫38, 1974).
李進熙,<七支刀硏究の百年>(≪廣開土王碑と七支刀≫, 學生社, 1980), 37∼66쪽.
山尾幸久,<石上神宮七支刀銘の百濟王と倭王>(≪古代の日朝關係≫, 塙書房, 1989).
그런데 만약 거기에 새겨진 명문의 연호를 백제의 泰和 4년(372)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476)李丙燾는 百濟의 연호일 것으로 그리고 원년을 369년으로 해석하고 있다(위의 글, 1974). 그리고 金錫亨은 泰和를 백제의 연호로 해석하였고 그 연대는 5세기의 어느 해로 추정하였다(위의 책). 한편 근래에는 5세기 후반에 비정하는 견해들이 있기도 한다.
森浩一(<鐵劍文字は古墳文化のどこに位置するか>,≪鐵劍文字は語る≫, 1979)은 5세기 중엽이후 6세기 전반에 걸쳐 일본고분에서 출토되는 칼을 주목하여 369년설에 대한 재검토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村上英之助(<考古學からみた七支刀製作の年代>,≪考古學硏究≫25-3, 1978)는 新羅古墳 출토유물과 비교해 548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李基東(앞의 글)은 5세기 후반설을 지지하고 있다.
앞에서의 연대 추정은 대체적으로 수긍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초고왕 때부터 왜와 접촉하여 외교적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 근초고왕 27년은 중국의 동진과도 공식적으로 최초의 대중관계를 수립하던 시기이다. 백제가 이처럼 대외적으로 외교관계를 추진하게 되었던 것은 내적인 발전의 결과였다. 마한의 잔여세력을 병합하고 북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으며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근초고왕의 위업은 백제가 중국과 왜에 정식으로 통교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의 초기 기사에는 왜와의 관계가 나타나지 않지만,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는 건국 이래 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은 왜구의 피해를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왜구의 침입은 심지어 국도를 위협하였으며 金城이 포위된 것도 수차에 이르렀다. 그러나 왜구관계의 기사는 지증왕대 이후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신라는 왜와 접촉이 잦았던 반면에 백제가 왜와 접촉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를 자주 쳐들어 온 왜구의 소행이 거국적으로 조직화된 군사활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해적들이었거나 지방단위의 소규모 병력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초기의 왜와의 접촉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성격의 왜와 인접하고 도읍이 바다에 가까운 신라와 달리, 백제가 내륙지역인 한강유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왜와는 접촉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해적과 같은 왜구가 주로 해변에 위치한 신라의 도읍지 경주 부근에 소규모로 산발적으로 침입했던 것이다. 그러나≪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이러한 왜구들의 활동을 통해서 그 당시 왜로 표현되는 군사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듯하다.

 ≪일본서기≫에서는 신공황후 섭정 46년부터 백제 관련기록과 신라정벌에 관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477)百濟 관련기사는≪日本書紀≫권 9, 神功皇后 46년·47년·50년·51년·52년에, 신라 관련기사는 神功皇后 49년·62년에 있다. 백제 관련기록은 백제가 전남지역을 경영하는 역사로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임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신라정벌 기사도 잘 검토해 보면 그 전쟁을 수행하였던 인물들은 백제인이었다. 즉 백제인 木(羅)斤資라는 장군인데, 그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할 때 문주왕을 옹호하였던 木滿致의 부친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목(라)근자는 그 후 왜군이 대가야를 침입하였을 때 왜군을 격퇴함으로써 대가야에 대한 백제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바 있다. 이 때 왜군의 대가야 공격에 대해서는 그것을 어느 정도 신빙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른바「신공황후의 신라정벌」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백제가 아신왕 6년(397)에 왜와 관계를 맺고, 아신왕 11년에는 사신을 왜국에 보내 大珠를 구했으며,478)≪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아신왕 11년 5월. 다음해는 백제에 온 왜국사신을 백제왕이 후하게 대접하였다.479)≪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아신왕 12년 정월. 백제가 이처럼 왜에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펼치게 된 것은 고구려의 남침 때문이었다. 이 때 고구려는 영토를 널리 확장한 광개토대왕 때로서, 그 위업을 기리는 비가 남아 있어 쉽게 치적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백제와의 전쟁기록이다. 영락 6년(396, 아신왕 5)에 광개토왕 스스로가 거느린 고구려군이 한강을 건너 백제의 국도를 핍박하였으며, 백제왕은 이에 항복하여 복속을 맹세하지 않을 수 없었다.480)盧泰敦,<廣開土王陵碑>(≪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 1992), 18쪽. 아신왕이 태자인 전지를 왜에 보내어 관계를 긴밀히 하려고 하였던 것은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 취해진 외교정책의 일환이었다.481)李基東, 앞의 글, 252쪽. 아신왕 8년(399)에 이르러 백제가 서약을 위반하고 왜국과 통교하므로 광개토왕은 이에 보복하려 했다. 마침 고구려는 왜적의 침범에 대한 신라의 구원 요청이 있었으므로 행동을 개시하여 신라·가야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400).482)盧泰敦, 앞의 글, 18∼19쪽. 한편 신라의 실성왕은 이러한 전쟁 이후의 사태를 수습하는 방편으로 왜국과 통교하기로 하고 내물왕의 아들인 未斯欣을 볼모로 왜에 보내었다.483)≪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실성니사금 원년 3월.<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한 해석에는 많은 논란들이 있지만 이 무렵 왜의 군사력이 남한지역에 어떤 영향을 끼칠 정도였던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시기의 왜는 북구주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던 세력으로 이해되고 있다.484)千寬宇,<韓國史의 潮流>(≪新東亞≫1973-1).
水野祐,≪日本古代の國家形成≫(1967), 157∼158쪽.
金錫亨, 앞의 책, 345∼346쪽.
井上秀雄,≪任那日本府と倭≫(東出版株式會社, 1973), 336∼337쪽.
李基東, 앞의 글, 274∼281쪽.
崔在錫,≪百濟의 大和倭와 日本化過程≫(一志社, 1990).

 백제에서 아신왕이 죽자 조정에서는 내란이 일어났다. 왕의 가운데 아우인 訓解가 섭정을 하게 되니 왕위를 노린 막내아우 碟禮가 훈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한편 태자로서 왜에 가 있던 전지는 이 때에 왜인 100명의 호위를 받고 解忠의 도움으로 설례를 타도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485)≪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전지왕 원년. 전지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백제와 왜의 우호적 관계는 계속되었다. 전지왕대에는 왜국에서 夜明珠를 보내왔고,486)≪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전지왕 5년. 백제에서는 白綿 10필을 보내는 등487)≪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전지왕 14년 하. 왜국과의 우호관계가 더욱 견고하였다. 한편 신라의 경우, 눌지왕 2년(418)에 왜에서 머무르던 왕자 미사흔이 귀국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장수왕 15년(427) 드디어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백제·신라 그리고 왜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장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5세기 중엽 이후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전쟁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의 개로왕 18년(472) 고구려의 남진을 억제하기 위하여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그 동안의 경위를 “원한을 맺고 禍가 이어짐이 30여 년”이라고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488)≪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18년.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나제동맹까지 체결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문주왕 원년(475) 백제의 도읍 한성이 함락됨으로써 어쩔 수 없이 국도를 웅진으로 옮기고 말았다. 천도 후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부흥을 위해 힘썼던 무령왕에 대해≪일본서기≫에는 일본에서 탄생한 것으로 전하는 설화 같은 기사가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489)≪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5년 4월.

 백제사에서 6세기 전반기는 가야지방에 대한 영유문제를 중심으로 신라 및 왜와의 사이에서 복잡한 관계를 갖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미묘한 관계는≪삼국사기≫보다≪일본서기≫에 그 내용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전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왜가 가야지방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木滿致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듯하다. 목만치는 과거에 가야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결국 백제의 강력한 세력으로 진출하게 된 인물이었다. 그가 왜에 건너가 왜의 중요한 인물로 등용됨으로써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목만치의 이주에 이어 5세기 말경에는 대가야의 대족들이 왜에 건너가 河內지방에 정착하여 상당한 집단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6세기 중반경에 이르면 낙동강 동쪽 연안의 가야지방이 신라의 세력하에 들게 되고 진흥왕 23년(562)에는 대가야가 정복됨으로써 가야지역은 완전히 신라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백제는 이 시기에 이르러 남천 후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명실상부하게「다시 강국이 된」시대였다.490)≪梁書≫권 54, 列傳 48, 百濟, 普通 2년. 그 결과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수세에만 처해 있던 백제가 다시 대등한 관계로까지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천도 후의 무질서했던 국가기구와 제도는 이 기간 동안에 안정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특히 사비천도 이후로 크게 진전되었다. 왕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관료적 조직화가 완료되었으며 왕권국가 중심의 체제가 완비되었던 것이다.491)盧重國,≪百濟政治史硏究≫(一潮閣, 1988), 214∼292쪽.

 6세기 전반 백제사의 또 하나의 특색은 왜와의 외교적 관계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백제로부터 五經博士 등의 전문지식인을 왜국으로 파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왜에 파견되었던 박사들 중에는 오경박사 이외에 易博士·醫博士·曆博士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백제가 이와 같이 왜에 많은 박사를 파견한 것은 왜의 요청에 기인한 바 크다. 높은 학술과 전문지식을 가진 이들은 왜국의 국가제도 정비와 사회의 문명화를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었다. 왜국의 문화적 욕구에 따라 백제가 준 대가로서 백제는 왜에 군사적 지원을 바랐던 흔적이≪일본서기≫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신라의 대가야 공세가 적극화된 법흥왕 17년(530) 이후로 이러한 백제의 태도는 더욱 구체화되었다. 신라는 진흥왕 12년에 백제와 공동작전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며 동 14년에는 백제가 병합하려는 한강 하류지역을 쳐서 차지해 버렸다. 이는 명백히 동맹국 백제에 대한 배신이었다. 이 배신에 보복하기 위해 성왕은 신라의 狗川에까지 쳐들어 갔으나 불행하게도 신라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진흥왕의 백제에 대한 배신행위는 급격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불러오게 되었다. 결국 이 시기 이후에 신라는 고구려·백제와의 적대적 관계를 피할 수 없었다. 신라는 이러한 국제적인 고립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왜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여 관계개선에 노력하였다. 한편 백제로서는 신라와 동맹자적인 관계에서 마침내 적대국의 관계로 돌변하게 되자 기존의 외교노선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백제의 대중관계는 대체적으로 남조의 관계로 한정되었던 것이나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북조의 북제나 북주와도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위덕왕대 외교노선의 급선회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상당히 급박하였음을 알게 한다. 급박한 상황에서 백제는 왜와의 관계를 추진하였을 것이나 그러한 사실들이≪삼국사기≫에는 남아 있지 않다.

 한편 한반도에서 이러한 정세 변동이 초래된 시기에 이어 중국에서는 수가 남북조를 통일하였다(589). 그 후 수가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게 되는 정세 변동 속에서 백제는 수와도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고 또한 고구려와도 화합을 모색하였다. 이 시기에 왜에서는 推古天皇이 즉위하고 모든 권한은 聖德太子가 장악하게 되었다. 성덕태자는 집권 초기에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그 후 왜의 독자성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독자적으로 수와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백제에 대해서는 이전보다 거리를 두는 외교를 펴나갔다. 이러한 왜의 태도 변화는 백제를 자극하였다.≪일본서기≫추고기 및≪隋書≫倭國傳에 의하면, 백제는 수에서 왜국으로 귀국하던 왜의 사신을 사로잡아 그가 가지고 있던 수의 국서를 빼앗는 사건을 일으켰다.492)≪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倭國.
≪日本書紀≫권 22, 推古天皇 15년.
이는 바로 백제가 왜의 독자적인 외교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이었다. 왜의 수나라 접근과 백제의 외교문서 탈취로 인한 양국 사이의 긴장된 관계는 무왕 후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회복되어 갔다. 즉 당이 신라와 접근한 데 자극되어 백제는 왜와의 화친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백제가 왜에 접근을 시도하는 방편으로서 나온 것이 豊璋의 파견이었다. 풍장은≪일본서기≫舒明紀에 나오고 또한 齊明紀에도 나오는데 이들은 이름은 같으나 다른 사람으로서 전자는 무왕의 아들이고, 후자는 의자왕의 아들이라 할 수 있다.493)盧重國,<7世紀 百濟와 倭와의 關係>(≪國史館論叢≫52, 1994), 165쪽. 풍장을 왜에 파견할 때 백제에서는 태자의 책봉을 둘러싸고 원자인 의자를 지지하는 세력과 왕자 풍장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갈등이 있었다. 그리고 왜에서는 舒明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실권을 장악한 蘇我氏세력이 서명의 즉위를 반대한 친백제세력인 境部臣세력을 제거해 버렸다. 경부신세력이 제거당한 사건은 왜국내에 있던 친백제세력으로서는 적지 않은 타격임이 분명했다. 이러한 복잡한 백제와 왜국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풍장을 왜국에 파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내에서는 지배세력들간의 갈등도 어느 정도 조정되었으며 왜의 조정내에 다시 친백제세력을 재건할 수 있었다.494)盧重國, 위의 글, 162∼167쪽. 그 결과 백제와 왜는 무왕 말경에 이르기까지는 우호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백제에서 의자왕이 즉위하면서 백제와 왜와의 관계는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의자왕은 즉위 후 무왕 말기부터 시작된 지배세력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친위정변을 일으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495)盧重國, 위의 글, 168∼176쪽. 이러한 과정에서 의자왕의 조카 翹岐를 비롯하여 좌평 岐味 등 수십 명의 귀족들을 대거 추방하였다. 이들은 바로 무왕이 말기에 이르러 환락에 빠지자 왕의 측근세력으로 의자의 즉위를 반대했던 무리들로 생각된다. 그런데 백제에서 추방되었던 교기는 당시 왜의 실권자였던 蘇我蝦夷大臣이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우대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는 아마도 왜에 머무르면서 의자왕의 반대세력 추방을 거부했던 백제인들의 영향도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가 교기에 대하여 취한 태도는 백제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의자왕은 대좌평 沙宅智積을 왜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아무리 적극적이었다 하더라도 왜가 응하지 않으므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귀국한 사택지적은 책임을 지고 정계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백제에서는 왜와의 공식적인 교역관계를 줄이는 등 긴장관계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후 왜에서는 지배세력이 바뀌어 이제까지 실권을 장악하였던 소아씨세력이 中大兄과 中臣兼足을 중심으로 한 세력에 의해 제거되어 孝德이 즉위하고 大化改新을 단행하였다(646). 효덕천황대에 실권을 장악했던 중대형의 백제에 대한 정책에는 한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이 때에 동아시아 정세는 신라와 당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이루게 되자 백제나 왜에서도 서로의 관계를 다시 정립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의자왕은 왕자 夫餘豊를 왜에 파견하였다.≪삼국사기≫백제본기 의자왕 13년(653)조에 왜국과 통호하였다496)≪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13년 8월.고 하는데, 이것은 비유왕 2년(428)에 왜국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사가 있은 후 220여 년이 지나서 나타나는 백제의 왜국과의 관계기사이다.

 결국 의자왕은 이제까지 소원했던 왜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 한반도에서 야기되고 있던 신라와 당의 연합세력에 대항하여 백제·왜·고구려의 또 하나의 연합관계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인 긴장관계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은 말기에 정사에 뜻이 없었다. 마침내 백제는 의자왕 20년(660)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의 멸망기에도 왜의 백제에 대한 우호적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될 때 왜에서는 대군을 파견하여 백제군을 지원하고자 한 것에서 알 수 있다.497)≪日本書紀≫권 27, 天智天皇 원년 8월.

 백제와 왜의 관계는 부흥운동기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백제가 멸망하자 각처에서는 백제의 부흥을 위해서 일어섰다. 豆尸原岳에서 일어난 좌평 正武의 부흥군, 任存城을 근거로 한 은솔 福信과 승려 道琛의 부흥군, 久麻怒利城을 중심한 달솔 餘自進의 부흥군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역시 임존성을 근거지로 했던 黑齒常之·沙吒相如의 부흥군이 가장 대표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부흥군 가운데서 가장 핵심을 이루었던 임존성을 근거로 한 복신·도침군은 좌평 貴智를 왜국에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구하는 동시에 부여풍을 귀환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498)≪日本書紀≫권 26, 齊明天皇 6년조에 의하면 福信이 왕자 夫餘豊의 귀환을 위해 사신을 처음 보낸 것은 660년 10월이었고, 661년 4월에 다시 요청하였다. 백제의 멸망이라는 급격한 상황 변동에서 백제부흥군으로부터의 군사원조 요청은 왜국내에서 혼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는 당시 정치적 실권자였던 중대형세력이 국내의 정치적 불안을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한반도의 정세 변화가 앞으로 왜에 끼칠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백제의 부흥군을 지원하려고 왜국에 있던 백제인 특히 백제왕자 夫餘勇의 활약이 컸었다. 백제의 부흥군이 그들 자체의 분열에 의해 무너져 버리자 백제와 왜국의 공식적인 관계는 끝을 맺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백제인들의 일본으로의 진출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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