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2) 행정조직

2) 행정조직

 백제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영역이 확대되고 民에 대한 지배력도 강화되었다. 그에 따라 중앙의 유력귀족들이 가졌던 독자적인 지배조직은 해체되어 왕권 아래 일원화되었고 국가운영에 필요한 업무도 크게 확대되고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이처럼 확대되고 복잡해진 업무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각 업무를 분담하는 여러 관부들이 만들어졌고 각 관부내에는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조직이 정비되었다.

 한성 및 웅진도읍기의 행정조직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사비시대의 중앙관서는≪周書≫백제전에 의해 그 대략을 파악할 수 있다.515)≪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사비시대의 중앙관서는 部와 司로 나뉘어 있었고, 이들이 각각 국사를 나누어 맡았다. 이 가운데 부는 중앙의 핵심적인 관청이며, 사는 부보다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서 부의 통제를 받은 屬司的 성격의 관청으로 생각된다.516)盧重國, 앞의 책, 227∼228쪽.

 중앙관청으로서의 부는 22부가 있었으며 이 22부는 내관 12부와 외관 10부로 구성되었다. 내관은 궁중과 왕실의 사무를 관장하는 관청이며, 외관은 일반 서정을 관장하는 관서였다. 그런데 이 22부제에서 내관의 수가 외관보다 많다고 하는 사실은 왕실업무의 방대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왕실 중심의 정치운영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내관 12부 중 前內部는 명칭으로 미루어 볼 때 왕실관계의 업무를 총괄하고 국왕근시와 왕명출납의 직무를 관장한 부서로 보인다.517)前內部의 이러한 기능은 신라의 內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武田幸男,<六世紀における朝鮮三國の國家體制>(≪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4, 學生社, 1980), 59쪽 참조. 穀部와 肉部는 각각 御供에 관계되는 곡물과 육식관계를 전담한 부서로 보인다. 內椋部와 外椋部는 경의 뜻이 고구려의 경우 창고를 의미하므로518)≪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왕실의 창고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馬部는 왕실 소용의 御馬를 관장하는 관부이며, 刀部는 刀劍 등 무기의 제작과 관리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功德部는 불교사원을 관할하는 관청으로서 특히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건축한 사원이나 왕성 내에 설치한 內帝釋院 등의 사원을 관할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藥部는 약의 제조와 치료를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御醫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木部는 왕실에 소요되는 모든 토목공사를 담당한 기관일 것이고, 法部는 의례·왕의 의장관계 및 율령과 관련되는 업무를 관장하는 부서로 생각된다. 後宮部는 왕의 후궁과 관계되는 여러 업무를 관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외관 10부 중 司軍部는≪周禮≫나≪書經≫에 보이는 司馬와 같은 것으로서 내외 병마관계를 관장한 부서로 생각된다. 司徒部는 교육과 의례관계의 업무를 관장한 부서로 보인다. 司空部는 토목·재정관계의 업무를 관장한 기구로, 司寇部는 형벌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點口部는 호구파악 및 노동력 징발업무를 관장한 것으로 보이며, 客部는 외교관계 및 사신접대의 업무를, 外舍部는 관료의 인사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綢部는 직물의 제조와 직물수공업자 관계의 업무를 관장한 부서이고, 日官部는 천문기상과 점술관계의 업무를, 都市部는 상업과 교역 그리고 시장업무를 장악한 부서로 생각된다.519)22부의 직능에 대해서는 梁起錫,≪百濟專制王權成立過程硏究≫(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90), 157∼161쪽 참조. 이 22부의 직능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의<표 3>과 같다.

內官(12) 外官(10)
前內部
穀 部
肉 部
內椋部
外椋部
馬 部
刀 部
功德部
藥 部
木 部
法 部
後宮部
國王近侍(?)
穀物조달
肉類조달
內倉재정
外倉재정
御馬관리
刀劒관리
佛敎寺院관리
藥物醫療
木工건조
禮儀업무
後宮업무
司軍部
司徒部
司空部
司寇部
點口部
客 部
外舍部
綢 部
日官部
都市部

兵馬軍事
學問敎育
土木建築
刑罰司法
戶口파악
外交관계
人事관계
織物징수(?)
天文占術
市場交易

<표 3>22부의 명칭과 직능

 외관 10부 중에서 사군부를 비롯하여 사도부·사공부·사구부는 관장업무로 미루어 볼 때 외관 10부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부서이다. 그 명칭은 중국의≪주례≫의 관명과 동일하므로 중국제도에서 차용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제가 이처럼≪주례≫의 관명을 차용한 것은 당시 중국의 北周가 周禮主義에 입각하여 왕권 중심의 관제를 정비하려고 한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520)李基東,<百濟國의 政治理念에 대한 一考察-特히 ‘周禮’主義的 정치이념과 관련하여->(≪震檀學報≫69, 1990), 2∼14쪽.

 官府의 정비는 각 관부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관직의 설치와 정비를 가져왔다. 그러나 각 관부에 설치된 관직의 명칭과 체계가 어떠한 것인지, 또한 관직과 관등과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는 자료가 부족하여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관직과 관등과의 관계에 대해서 신라나 고구려의 경우 1관직에 복수의 관등이 대응되는 1관직-복수관등체계라는 사실에서521)李基東,<新羅中代의 官僚制와 骨品制>(≪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韓國硏究院, 1980), 131∼143쪽. 미루어 볼 때 백제의 경우도 어떤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관등이 복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이제 백제의 관직에 대해 얼마 되지 않은 자료를 종합·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長史는 22부의 장의 명칭으로, 자료에 따라 長史·長吏·宰官長 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 관직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교대하는 것으로 그 임기가 정해져 있었다. 부의 장으로서의 장사의 직을 맡은 자들은 좌평이나 달솔 의 관등을 소지한 귀족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중 고유의 직무를 가지 고 있는 6좌평은 22부 중 전내부나 사군부·사도부 등과 같은 중요한 부의 장을 맡았을 것이고,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들은 다른 부의 장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左將은 병마권을 관장하는 관직으로서 고이왕 7년(240)에 처음 설치되었다.522)左將이라는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右將의 존재 가능성도 있지만 구체적인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좌장은 고이광이 종래 유력귀족이 가졌던 독자적인 군사권을 해체하여 왕권 아래로 일원화하면서 이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후일 군사권이 군정권과 근령권으로 나뉘었을 때 좌장은 왕명을 받아 군령권을 행사하였다.

 博士는 전문교육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박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근초고왕대에 박사 高興이≪書記≫를 편찬하였다고 한 경우이다. 이 박사들은 유교경전을 교육하는 자와 전문기술을 가진 자로 나누어졌다. 유교경전의 교육을 담당할 경우 五經博士·易박사·毛詩박사 등으로 불리웠고,523)≪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성왕 19년.
≪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14년.
전문기술직을 담당할 경우는 기술의 종류에 따라 瓦박사·曆박사·露盤박사 등으로524)≪日本書紀≫권 21, 崇峻天皇 14년. 불리웠다.

 王·侯가 문헌상 처음 보이는 것은 개로왕대의 左賢王·右賢王부터이다. 그러나 일본의 石上神宮에 보존되어 있는 七支刀에 侯王이 보이고 그 제작연대가 근초고왕대로 비정되고 있어, 王·侯制의 실시 시기는 근초고왕대까지 소급하여 볼 수 있다. 왕·후의 존재는 백제왕이 왕중의 왕, 즉 대왕으로 격상된 것을 보여준다.525)坂元義種,≪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塙書房, 1978), 96∼102쪽. 왕·후의 명칭 중 좌현왕·우현황은 흉노에서 사용된 직명인데,526)坂元義種, 위의 책 참조. 이러한 흉노식 직명이 백제에서 사용된 것은 백제왕실의 북방적 성격을 시사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王·侯號는 개로왕대까지는 주로 왕족에게 주어졌으나 웅진천도 이후에는 왕족 이외에 다수의 異姓귀족들도 왕·후의 칭호를 부여받고 있다. 이는 웅진천도 이후 신진세력들이 대거 중앙귀족으로 등장하여 정치운영의 중추적 역할을 한 결과로 생각된다.

 이러한 왕·후호에는 좌현왕·우현왕 외에 面中王·阿錯王·弗斯侯·弗中侯 등과 같이 지명과 연관된 이름도 있다. 지명과 연관된 왕·후를 담로의 장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527)金英心,<5∼6세기 百濟의 地方統治體制>(≪韓國史論≫22, 서울大 國史學科, 1990), 83∼88쪽. 이는 일종의 爵制로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長史·參軍·司馬는, 중국의 경우 왕의 幕府에서 막료로서의 기능을 하였다.528)金翰奎,<南北朝時代의 中國的 世界秩序와 古代 韓國의 幕府制>(≪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一潮閣, 1985), 140∼150쪽. 백제의 경우도 이 관직들은 중국의 예에서 미루어 볼 때 왕의 幕下에서 외교관계나 군사관계의 업무 등에서 참모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장사의 직을 가진 자들은 빈번히 중국에 대한 외교사절로 활동하고 있다.529)신라의 경우 長史 또는 司馬는 주의 장관인 軍主의 막료로 나온다(≪三國史記≫권 40, 雜志 9, 職官 下, 外官 참조).

 駙馬는 왕의 사위를 말하는데 駙馬都尉는 왕의 사위를 예우하기 위해 만든 관직이다. 개로왕대에 북위에 파견된 사신의 한 사람인 餘禮가 부마도위로 나타나는 것이 유일한 예가 된다.

 臺使는≪宋書≫백제전에 비유왕이 송에 보낸 사신의 하나로 나온다. 중국에서의 臺는 朝廷禁省을 말하고 이 대에서 파견한 사자를 대사라 하였다.530)臺使에 대해서는≪南齊書≫권 40, 列傳 21, 武17王 竟陵文宣王 子良傳 참조. 중국에서의 용법을 원용한다면 대사는 백제 조정의 사신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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