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4) 귀족회의체

4) 귀족회의체

 백제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정치운영에 있어서는 귀족들의 회의체에 의한 합좌제적 성격은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백제의 귀족회의체는 佐平會議體이다. 이 좌평회의체의 토대는 5부체제 단계에서 좌평을 의장으로 하고 솔계 관등을 가진 귀족들로 구성된 諸率회의체였다. 제솔회의체의 성립 시기는 좌평이 설치된 고이왕대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근초고왕대에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갖추어지고 왕권이 확립되자 귀족회의체의 위상과 역할도 변화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통적 성격을 다분히 지닌 率이 왕에 대한 臣屬的 성격이 보다 강한 신하로 轉化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543)이는 신라의 경우 귀족회의의 구성원인 大等이 신하의 의미를 가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회의체는 諸臣회의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솔회의체가 제신회의체로 전환되면서 그 정치적 비중은 낮아지게 되었고 반면에 중요한 국사는 최고위 귀족들인 대신들이 모여서 논의하고 결정하게 되었던 것 같다. 대신의 존재는<광개토왕릉비문>에 백제왕이 광개토왕에게 대신과 장사를 인질로 보낸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544)<광개토왕릉비문>의 영락 6년조 기사 참조. 이 대신들의 회의체를 바로 대신회의체라 할 수 있다.

 그 후 전지왕대에 와서 상좌평이 설치되면서545)≪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전지왕 4년. 좌평은 상·중 하좌평으로 분화되었고546)≪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5년 12월. 이 가운데 상좌평이 수석좌평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좌평이 이렇게 분화되면서 대신회의체 구성원은 좌평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좌평회의체 구성원의 수는 분명하지 않으나 사비천도 때까지는 5명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시기의 회의체는 상좌평을 의장으로 하는 5좌평회의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백제는 한성시대 말기에서 웅진도읍기의 초기를 거치면서 정치가 매우 불안정하고 왕권도 미약하였다. 병관좌평 解仇가 문주왕을 죽이고 군국정사를 전단하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그 예가 된다.547)≪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삼근왕 2년. 웅진도읍기의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동성왕-무령왕대를 거치면서 점차 극복되었고, 그 토대 위에서 성왕은 사비천도를 단행하였다. 사비천도를 계기로 성왕은 16관등제와 22부제 등 관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나갔다. 성왕에 의해 추진된 이러한 관제정비와 왕권강화책은 정치운영상에도 영향을 주어, 종래의 5좌평회의체는 정치일선에서 밀려나게 되고 그 대신 왕명을 봉행하는 22부를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성왕이 한강하류지역의 영유를 둘러싸고 신라를 공격하던 중 관산성전투에서 대패하여 왕과 다수의 측근세력들이 전사한 후,548)≪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5년. 위덕왕대에는 국가운영의 실권은 신라와의 전쟁을 반대하였던 귀족들이 잡게 되었다. 이 시기에 실권귀족은 大姓8族으로549)대성8족은 사씨·연씨·협씨·해씨·진씨·국씨·목씨·백씨를 말한다(≪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百濟). 불리우는 대귀족가문 출신들이었다. 이로써 왕권은 크게 제약되었다. 혜왕과 법왕의 단명과 마를 캐던 서동이 왕이 된 것도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실권귀족들의 정략적 소산이라 할 것이다.

 이 실권귀족들은 좌평의 정원을 5명에서 6명으로 확대하고 중국의 6典조직을 모방하여 각각의 직무를 규정하였다. 6좌평의 분장업무를 보면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것에서부터 재정·왕궁숙위·의례관계·군사권·형벌권 등에 이르기까지 국가운영상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 6좌평회의체에서의 의장은 내신좌평이 맡았다.

 이처럼 실권귀족들에 의해 제약되었던 왕권은 무왕과 의자왕대를 거치면서 점차 강화되었다. 무왕이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한 후 거대한 미륵사를 건립하면서 轉輪聖王을 자처한 것이라던가550)金煐泰,<彌勒寺創建緣起說話考>(≪馬韓·百濟文化≫1, 1975). 의자왕이 즉위 초에 친위정변을 일으켜 실권을 지닌 귀족들을 추방한 것은 바로 왕권강화를 위한 조처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자왕은 재위 16년 이후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되면서 좌평 성충을 투옥하고 또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에 임명하는 등 좌평직을 남발하였고,551)≪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17년. 대좌평과 같은 非常位도 만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6좌평회의체의 지위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최고귀족회의체로서의 좌평회의체는 중요한 국사를 논의·결정하였다. 예를 들면 귀족회의의 의장을 선출한다던가552)≪三國遺事≫권 2, 紀異 2, 南扶餘. 왕위의 계승문제 또는 전쟁의 선포와 같은 사항들은 좌평회의체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화백회의로 알려진 신라의 大等會議體(대신회의체)가 중요한 국사를 논의 결정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백제에서 국가운영과 관련한 정무를 집행하고 논의할 때 정청은 南堂이었다. 남당은 원래 원시집회소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정청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553)李丙燾,≪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1976), 623∼629쪽. 고이왕이 정장을 하고 “남당에 앉아서 정사를 살폈다”고 한 것은554)≪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28년. 남당이 바로 정청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귀족회의체에서 중대한 국사를 논의할 때는 특별히 신성한 장소에서 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국가에서 재상을 선출할 때 뽑아야 할 사람의 이름을 3, 4명 적어 상자에 봉해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 꺼내 보아 印跡이 있는 자를 재상으로 삼았다”고 하는 政事巖 고사이다.555)≪三國遺事≫권 2, 紀異 2, 南扶餘 前百濟. 이 고사는 재상의 선출 등과 같은 중대한 국사를 虎巖寺에 있는 정사암에서 논의하였다는 것과 이곳이 바로 신성한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한성시대의 신성한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와 관련하여 負兒岳이 주목된다. 부아악은 오늘날 서울의 삼각산으로, 온조집단이 남하하여 왕도를 정할 때 올라가 사방을 둘러본 곳이다. 그런데 이 부아악=삼각산을 김정호는≪大東地志≫에서 橫岳으로 파악한 바 있다.556)金正浩,≪大東地志≫, 漢城府 山水.

 ≪三國史記≫에 의하면 횡악은 왕들이 전렵을 행한 장소로, 여름에 크게 가물자 왕이 친히 기우제를 지낸 곳으로 나온다. 고대사회에서 전렵은 단순한 사냥이 아니라 군사훈련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으며, 동시에 사냥을 통해 얻은 희생물로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또 농업이 중요한 경제기반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기우제를 지내는 곳도 특별한 장소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렵이 행해지고 기우제가 행해진 부아악=횡악은 바로 신성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웅진도읍기에 와서 귀족회의체가 열린 신성한 장소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동성왕대에 전렵지로서 빈번히 나오는 熊津北原이나 泗沘原(泗沘東原 또는 泗沘西原) 등은 아마도 이 시기의 신성한 장소였을 것이다. 사비시대의 경우는 앞에서 언급한 호암사 외에 日山·浮山·吳山 등의 3산이 주목된다.557)≪三國遺事≫권 2, 紀異 2, 南扶餘 前百濟. 3산은 신라의 경우 大祀가 행해지는 곳이었다.558)≪三國史記≫권 32, 雜志 1, 祭祀. 따라서 백제의 3산도 신성한 장소로서의 기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백제가 한성시대에서 사비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국사를 신성한 장소에서 논의하고 결정한 것은 그 결정에 신성성을 부여하여 구속력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盧重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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