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조직
  • (2) 방·군-성(현)제

(2) 방·군-성(현)제

 한성시대부터 마련되어 웅진도읍기까지 실시되었던 담로제는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새로이 정비되었다. 이 시기에 정비된 지방통치조직이 바로 方·郡-城(縣)체제이다. 이것은 성왕이 중앙의 지배조직을 새로이 정비함과 동시에 지방통치조직도 정비하는 과정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방·군-성체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5부이었다. 5방은 전국을 크게 5구역으로 나눈 것으로서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을 말한다. 이 5방은 사비시대 말기에 와서는 5部로도 표기되었다. 방의 중심지 즉 治所는 方城이라 하였으며, 장관은 方領이라 하였는데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방령 밑에는 方佐가 배속되어 임무를 보좌하였다.566)5방의 명칭과 구조에 대해서는≪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참조. 이 5방에 있는 방성의 명칭과 위치를 정리하면 다음의<표 1>과 같다.

5 方 方城 왕도를 기준한 방위 및 거리 方城의 넓이 병력 方城의 추정지
中 方
東 方
南 方
西 方
北 方
古 沙 城
得 安 城
久知下城
刀 先 城
熊 津 城
남  260리
동남 100리
남  360리
서  350리
동북 60리
方 150보
〃  1리
〃 130보
〃 200보
〃 1리반
1,200명
700∼1,000명


古阜
恩津
求禮(?)
?
公州

<표 1>5방의 방성 명칭과 위치

 그런데 5방성의 위치에서 볼 때 중방성의 古沙城이 수도보다 남쪽인 古阜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5방의 편제가 수도를 중심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고부지역을 국토의 중심으로 하여 사방을 편성한 것 같다. 이같은 중방의 위치 설정은 아마 수도 사비가 북쪽에 치우쳐 있었던 것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한다.

 郡은 방과 기본 성격상에서는 동등하나 군사적 측면에서는 방령의 관할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군의 수는 37군이었으며 각 군에는 기본적으로 5∼6개의 작은 성이 소속되어 있었던 것 같다. 군의 장은 郡將이라 하기도 하고 郡令이라고도 하였는데 한 군에 파견된 군장은 3명이었다.567)≪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이러한 군장의 복수제는 군사와 행정업무를 분담하기 위해서 나온 조처로 생각된다. 이 군장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은 덕솔이었다.

 방과 군의 통할을 받는 하위의 지방지배조직이 城이었는데 이 성은 현으로도 표기되었다. 이 현(성)은 종래 담로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였던 성(촌) 중 지역규모나 인구 또는 물산면에서 독립적인 지방조직이 될 만한 곳을 분리하여 만든 것이다. 이 성(현)에 파견된 지방관의 명칭은 城主 또는 道使라고 하였다. 이 점은≪翰苑≫에 “郡下의 현에는 道使를 두었는데 또한 성주라고도 이름하였다”고 한 것과568)≪翰苑≫蕃夷部, 百濟.≪일본서기≫흠명천황조에 군령·성주라는 기사가569)≪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5년. 보이는 데서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지방통치조직은 군사조직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각 방성에는 1,000명 내지 700명의 군사가 배치되었고 방성의 장관인 방령이 이를 통솔하였다. 따라서 방은 일종의 군관구적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군의 경우도 장관의 명칭을「郡將」이라고 한 것이라든지 백제의 멸망 후 風達郡將인 黑齒常之가 부흥군을 일으킨 것에서570)≪三國史記≫권 44, 列傳 4, 黑齒常之. 볼 때 군장도 군지휘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방과 군과의 관계를 보면 방은 최고의 지방통치조직으로서 각 방은 10여 개의 군을 포괄하였다. 그러나 방이 군을 모든 면에서 직접 관장한 것이 아니라 군사적인 측면에서 군을 관장한 것 같다. 따라서 군은 방의 통제를 받았지만 그 밖에 행정적 사항은 방과 대등한 관계로서 중앙과 직접적인 명령을 주고 받은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닐까 한다. 방이 군사적·행정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던 것은 방의 직할지와 그에 부속되는 성(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방·군-성(현)제는 종래의 담로제와는 다른 성격을 지녔다. 첫째는 방이라고 하는 광역의 행정구역을 설정하였다는 것이다. 5방은 전국을 다섯 구역으로 크게 나눈 것이고 이 방이 일정한 범위내에서 중앙의 명령을 받아 하위의 조직에 전달하고 통솔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지방통치조직이 종래에 비해 일보 진전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는 성(현)이라고 하는 하위의 지방조직을 정비하여 지방관을 파견함으로써 지방관의 수가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현의 수는 많았을 때는 200 내지 250개 정도였다.571)멸망 당시 백제의 현(성)의 수에 대해≪舊唐書≫권 220, 東夷列傳 145, 백제조에는 200으로 나오고 定林寺址五層石塔에 새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에는 250으로 나온다. 이처럼 현의 수가 많다는 것은 곧 재지세력들의 전통적 세력기반이 그만큼 약화되고 축소된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 따라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어 재지세력들은 재편제되어 간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는 지방조직의 편제에서 田丁戶口의 다과라고 하는 보다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였다는 점이다.572)≪新增東國輿地勝覽≫권 7, 京畿道 驪州 古跡 登神莊條에 의하면 신라는 통일 이후 전정호구를 기준으로 하여 군현제를 편제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백제의 경우를 짐작하는데 방증하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종래 담로체제에서는 삼한시기의 소국을 기본단위로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와서 방·군-성을 편제할 때, 특히 200 내지 250개라고 하는 많은 수의 현을 만들 때의 전정과 호구의 다과를 기준으로 하여 군현을 편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지방통치조직의 편제상에서 객관적인 기준이 마련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