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2. 지방·군사제도
  • 2) 군사제도
  • (3) 군사조직과 병력의 충원

(3) 군사조직과 병력의 충원

 백제의 군사조직은 중앙군사조직과 지방군사조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앙의 군사조직으로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수도 5部에 배치된 부대들이다. 이 5부의 부대에는 각각 500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지휘하였다.597)≪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따라서 이 왕도 5부는 군관구로서의 성격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 왕도 5부에 배치된 부대들은 수도의 방위와 경찰의 임무를 담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왕도의 부대들에 대한 훈련의 한 방법으로서 왕은 수시로 閱兵을 하였다. 한성시대의 열병은 漢水의 서쪽 또는 남쪽으로 행해지기도 하고, 石川에서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또 왕은 도성내에 射臺를 만들어 스스로 활쏘기를 하거나 도성사람들을 모아 활쏘는 것을 익히도록 하였고,598)≪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비류왕 7년 및 권 25, 百濟本紀 3, 아신왕 7년. 때때로 군사들의 활쏘는 것을 관람하기도 하였다.599)≪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9년.

 이러한 군사훈련은 田獵행사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전렵은 단순한 사냥이 아니라 천지에 제시지내는 제의적 성격도 지니면서 군사를 조련하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600)≪三國史記≫권 45, 列傳 5, 溫達. 한성시대의 전렵지로는 橫岳·漢山·西海大島 등이었고, 웅진천도 후에는 熊津北·牛鳴谷·泗沘原 등이었다.

 지방에 주둔한 군사조직으로는 5방의 方城에 배치된 부대를 들 수 있다.≪翰苑≫백제조에 의하면 5방의 방성은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고, 여기에는 700∼1,200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군대를 지휘하는 자는 방의 장관인 方領이었다. 그리고 이 방령은 달솔의 관등을 지닌 자가 맡았다.601)≪翰苑≫蕃夷部, 百濟. 방성 외에 군의 치소인 郡城에도 군부대가 배치되었을 것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이러한 부대들의 군사작전과 방어작전은 거점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거점성은 5방의 중심지인 방성이나 군의 중심지인 군성 및 그밖의 현에 해당하는 성들이다. 이러한 거점성들의 군사들은 여기에 파견된 지방관이 관할하였다. 방의 장관인 방령, 군의 장관인 郡將(郡令), 현의 장관인 도사(성주)는 바로 군지휘관이었던 것이다. 이는 곧 군사조직과 지방통치조직이 하나의 체계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중앙과 지방에 배치된 군부대 가운데 핵심적인 부대에 배속된 군사들은 상비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대다수 부대의 군사들은 일반민을 동원하여 충원하였던 것 같다. 丁의 연령층에 해당되는 일반민은 모두 군역의무가 부과되었는데, 이들의 복무기간은 3년이 원칙이었던 것 같다.602)이러한 사실은 백제시대의 노래인 禪雲山歌(≪高麗史≫권 71, 志 25, 樂 2, 百濟俗樂)에 의해서 확인할 수 있다.

 군사들은 평상시에는 지정된 부대에서 복무하였지만 유사시에는 전국적으로 모병되어 부대를 편성한 후 출동한 것 같다. 아신왕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크게 병마를 징발하였다던가,603)≪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아신왕 8년. 근초고왕이 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고 한 것은604)≪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초고왕 26년. 이러한 군사동원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동원된 군사들의 군사편제는 기본적으로 육군과 수군이었다. 육군은 다시 기병과 보병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실제 전투에서는 보병부대와 기병부대가 합동으로 작전을 하기도 하였다. 수군의 경우, 구체적으로는 백제멸망기에 나당군에 대항하기 위한 백제부흥군과 왜군의 연합작전에서 그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각 부대들은 그 부대를 상징하는 깃발들을 사용하였다. 근초고왕이 한수 남쪽에서 열병을 할 때 모든 기치에 황색을 사용한 것이605)≪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초고왕 24년. 그 예가 된다. 그러나 각 부대의 구체적인 깃발의 색은 알 수 없다.

 군사의 무장은 보병과 기병이라는 兵種에 따라 달랐다. 보병의 주무기는 궁시·도검·창·도끼 등이었는데, 이는 무덤에서 출토되는 무기류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백제의 풍속에서는 騎射를 중히 여긴다”고 한 기록에서606)≪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미루어 볼 때 기병도 중요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말을 타고 갑옷으로 무장을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주로 내륙의 목장이나 섬지방에서 사육되었는데607)신라의 경우≪周書≫新羅傳에 ‘섬에서 목축을 한다’는 기사가 나오는데,≪翰苑≫百濟條에도 ‘섬에도 성읍이 있어 사람이 산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연관시키면 백제에서도 섬은 목축장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 가운데 국가의 馬場에서 사육된 말은 國馬로서608)국마의 존재는≪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구수왕 즉위년조에서 알 수 있다. 왕실이나 유력한 귀족들이 이용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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