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구조
  • 3) 산업
  • (1) 농업생산력의 발전

가. 백제 초기의 수전개발과 농업생산력의 진전

 백제는 기후가 온난하고 지리적으로 한강·금강·영산강과 같은 큰 하천이 흐르고 있어서 선사시대부터 농경에 적합한 지역으로 알려져 왔다.679)백제의 농업발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梁起錫, 앞의 글(1986).
金光彦,<新羅時代의 農器具>(≪民族과 文化≫1, 正音社, 1988).
李賢惠,<三韓社會의 農業生産과 鐵製 農器具>(≪歷史學報≫126, 1990).
―――,<韓國 古代社會의 國家와 農民>(≪韓國史 市民講座≫6, 一潮閣, 1990).
―――,<三國時代의 農業技術과 社會發展>(≪韓國上古史學報≫8, 1991).
전덕재, 앞의 글.
郭鍾喆,<한국과 일본의 고대 농업기술>(≪韓國古代史論叢≫4, 1992).
安秉佑, 앞의 글.
벼농사는 위도나 기온·강수량 등의 자연조건에 제약을 받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에는 한강·금강·영산강 유역에 위치한 낮은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밀집하여 형성된 수혈주거지 주위의 경작지에서 쌀을 비롯하여 보리·수수·조·콩 등의 곡물을 소규모로 경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농경유적지로서 잘 알려진 경기도 여주 欣岩里 주거지, 양평 楊根里와 仰德里 유적지를 비롯하여 충남 부여 松菊里 주거지, 전북 부안의 所山里·盤谷里, 전남 나주 佳興里, 해남 郡谷里 등의 유적지에서 탄화미나 콩·팥 등의 곡물이 출토된 바 있다. 이 무렵의 생산도구나 생활용구는 도끼류, 반월형 석도 등의 석제품을 사용하였으나 목제나 골각기와 같은 농기구도 여전히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농업생산력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 전후부터 남한지역에 철기문화가 적극적으로 보급되어 농업생산에서 철제 농기구의 사용이 점차 활발해지고, 또 그 종류도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주조와 단조의 방법으로 제작된 도끼류, 수확구인 刀子와 낫, 논밭갈이 기구인 따비·쇠괭이·쇠삽날 등 철제 농기구가 제작·사용됨으로써 농경지 개간과 경작규모의 확대가 가능해지고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하게 되었다.680)李賢惠, 앞의 글(1990 a), 63∼64쪽. 경기도 양평 大心里에서는 철제 칼 1점, 괭이형 철제 도끼 4점과 함께 호미편 1점이 출토되었으며,681)金元龍 外,<楊平大心里 遺蹟發掘報告>(≪八堂·昭陽댐水沒地區遺蹟發掘綜合調査報告≫, 文化財管理局, 1974), 224∼225쪽. 가평 梨谷里에서도 보습틀이 출토되어682)崔茂藏,<加平郡 梨谷里鐵器時代住居址 發掘報告書>(≪人文科學論叢≫12, 建國大 人文科學硏究所, 1979) 참조. 우경의 실시문제와 관련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충북 중원 荷川里 주거지에서는 쇠괭이와 U자형 쇠삽날 등 철제의 농공 토목구가 출토되었다.683)尹容鎭,<中原荷川里F地區 遺蹟發掘調査報告>(≪忠州댐水沒地區文化遺蹟 發掘綜合報告書≫考古·古墳分野 2, 忠北大博物館, 1984), 397∼407쪽. 쇠괭이는 무쇠를 소재로 만들어진 주조품으로 질기지 못하여 다소 부스러지는 단점이 있으나,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상당량이 제작되어 보급되면서 나무괭이를 대치하게 된 듯하다. 그리고 중원 하천리의 쇠삽날은 크기가 가로폭 23.7cm, 길이 19.2cm나 되며 목재 농기구인 가래나 따비 등의 날끝을 U자형 철판으로 보강한 갈이기구이다. 이러한 철제 갈이기구를 사용함으로써 황무지를 개간하여 경지면적을 넓히고, 작업능률을 향상시켜 농업생산력을 보다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생산력의 증대로 잉여산물이 증가하여 지역간의 교역이 활발해지고, 사유재산에 대한 개념이 뚜렷해지면서 토지의 철제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른 경제적인 격차가 벌어졌다. 아울러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 생산도구의 제작과 보급을 통해 정치권력이 점차 강화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철제 농기구는 원료산지가 한정되어 있고 기술수준에 따라 질적·양적 제한이 크기 때문에 이들 철기 생산도구의 제작과 보급과정은 지배집단이 장악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는 수많은 읍락들이 지역별로 통합되어 백제국을 포함한 70여 개의 크고 작은 단위 정치체가 등장하게 되었다.

 위와 같은 철기문화의 배경을 가진 백제는 부여·고구려계의 유이민으로서 한강 하류의 서울 일대에 정착하여 국초부터 국가적 관심에서 농업을 크게 장려하였다.684)≪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13년 5월·14년 2월·38년 3월. 백제는 천도의 입지조건으로서 국방상의 요인 이외에 토지의 비옥도를 중시하였으며, 또한 적극적으로 권농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영농조건을 개선하고 나아가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의 초기 기록에는 보리·콩·팥 등의 곡물명이 많이 보이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백제 초기의 농경은 벼농사보다도 밭농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후 밭농사가 농경의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점차 수전이 새로이 개발되고,685)≪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다루왕 6년 2월·기루왕 40년 4월 및 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9년 2월조 참조. 이에 따른 제방의 수리가 행해졌다.686)≪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구수왕 9년 2월.

 특히≪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1세기 무렵부터「澤」에 稻田을 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도전」이란 水田을 가리키는 것이겠지만, 「택」은 자연적으로 물이 고여 있는 소택지로서 배수불량으로 인하여 지하 수위가 높고 유기물의 분해가 불량한 자연 저습지를 뜻한다. 이는 당시 수전농업기술과 수리관개기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아마도 소택지 주변의 수전 경영은 주로 소·지류의 하천물이나 배후 습지의 지하수를 간단한 導水시설을 통해 급수하는 방법을 취했을 것이다.687)李賢惠, 앞의 글(1991), 51∼52쪽.
郭鍾喆, 앞의 글, 79∼90쪽.

 그러면 백제가 밭농사 중심의 농업경영에서 수전개발을 촉진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농업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논농사는 일반적으로 밭농사에 비해 2배쯤 생산력이 높은 것으로688)姜晋哲,<公田·私田의 差率收租의 問題>(≪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394∼395쪽. 알려지고 있다. 다음으로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건국 초기부터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로 인하여 생산기반은 물론 생산자인 농민들의 생활기반마저 위협받았다. 이로 인하여 도적이 일어나거나, 농민들이 고구려 등으로 유망하는 사례도 발생하였다.689)≪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33년·37년. 더구나 주된 경제기반이라 할 수 있는 보리나 콩의 밭농사를 해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690)보리농사 피해(온조왕 28년 4월, 기루왕 14년 3월, 고이왕 14년 여름)와 콩농사 피해(기루왕 23년 8월)에 관한 기사가≪三國史記≫百濟本紀 초기의 기록에 여러 차례 보인다. 그런데 논농사는 밭농사와는 달리 수리관개시설이 갖춰지는 조건이 전제될 때 가뭄 등의 자연재해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고, 또 농사의 재배조건에서 헤아려 볼 때 벼품종의 개량 및 벼의 생육에 필요한 질소·인산·칼리 등 자연비료를 물을 통해 얻을 수 있으며 물로 잡초를 제거하는 데 유리한 측면이 있다.691)이은웅,≪水稻作≫(향문사, 1983), 200∼201쪽. 그리고 벼가 밭작물보다 오래도록 저장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다.692)벼와 조는 보리에 비해 저장기간이 길어 군량미나 수세대상이 되었다(李賢惠, 앞의 글, 1991, 56쪽). 저장기간에 대해서는 앞의 주 33) 참조. 따라서 식량을 다량 생산한다는 의미 이외에 이를 안정적으로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백제 초기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수전개발이 적극 추진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전의 개발과 수리관개시설의 축조와 정비를 위해 철제 괭이와 가래날 등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노동력을 절감하고 경지면적을 확대시켜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켜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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