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구조
  • 3) 산업
  • (2) 수공업의 발달

가. 관영수공업의 성장과 경영형태

 백제 수공업709)백제의 수공업 발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白南雲, 앞의 책, 242∼256쪽.
劉元東,<韓國商工業史>(≪韓國文化史大系≫2,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65), 995∼1003쪽.
홍희유,≪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부, 1978;지양사, 1988, 5∼68쪽).
林永周,<韓國古代工匠考 1>(≪文化財≫25, 1992), 60∼72쪽.
朴南守,≪新羅手工業史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3).
의 연원은 삼한시대로 소급되는데, 마한에서는 치레걸이인 瓔珠·綿布 등의 직물과 가죽신 등을 생산하였다.710)≪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 30, 韓. 3세기 무렵 철 수요가 높아지면서 교역과 철생산이 촉진되어 백제 관영수공업 성장의 배경이 되었다. 철은 당시 생활용품·무기·농토목 용구 등의 원료로서 사회적 수요가 증대되고 있었던 만큼 그 자원 및 생산기술의 확보는 바로 부의 축적을 의미하는 동시에 지배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철은 삼한 가운데 주로 변진에서 생산되어 삼한 소국이나 낙랑·대방·왜와 교역되었는데,711)≪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 30, 弁辰.
≪後漢書≫권 85, 東夷列傳 75, 韓.
백제지역에서 산출되기도 하였다. 七支刀의 단조처인「谷那」라는 철산지의 존재나,712)≪日本書紀≫권 9, 神功天皇 52년 9월. 서산 명지리 토광묘에서 출토된 철의 중간 소재인 철정,713)金永培·韓炳三,<瑞山 大山面 百濟土壙墓 發掘報告>(≪考古學≫2, 1966), 58쪽. 근초고왕 때에 卓素라는 야철공을 왜에 파견한 기록714)≪古事記≫中卷, 應神紀 國主の歌·百濟の朝貢. 등이 참고된다. 이러한 철 수요의 확대는 재산의 소유관계에도 크게 변화를 일으켰던 것으로 여겨진다. 철과 같이 교환가치가 높은 자원이나 특별한 제작기술을 거치는 물품이 지배자집단에게 독점적으로 소유됨으로써 정치권력의 집중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715)李賢惠,<4세기 加耶社會의 交易體系의 변천>(≪韓國古代史硏究≫1, 1988), 163쪽.

 국초에는 수공업 생산이 주로 생산자인 민의 자급자족의 형태로 이루어져 왔으나, 국가나 구소국·부·부내부 수장층들은 사치품·무기·생활용품 등을 만들기 위해 일정한 생산물이나 생산수단을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 지배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관영수공업의 경영형태도 변화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가는 중앙정치에 참여한 귀족이나 단위 정치체의 수장층과 호민에게 기존의 생산방식과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대신에 국가에 일정한 생산물을 공납토록 하는 수취방식을 취했다.716)朴南守, 앞의 책, 26쪽. 그리고 철과 같이 사회적 생산력을 규정할 수 있는 생산물이나 금·은과 같은 사치품은 국왕을 비롯한 중앙귀족이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에 군 단위까지 지방통치조직이 정비되고, 또 중앙정부에서 각 지방별로 소출되는 특산물을 일률적으로 파악하게 됨에 따라717)≪日本書紀≫권 11, 麟德天皇 41년 3월. 관영수공업의 경영형태에도 어떤 변화가 있었을 것이 예상된다. 그 구체적인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이를 계기로 중앙 지배력이 직접 미치는 지역에는 군을 수취단위로 하여 調의 형태로 수공업 생산에 소요되는 생산물을 확보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지방 특산물의 체계적인 수취를 전제로 하여 생산기술 수준이 높아지고 새로운 수공업부문이 생겨나면서, 왕실이나 관청에서는 장인을 확보하여 필요한 물품을 전업으로 생산하는 관영수공업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관영수공업이 제도적으로 정비된 것은 사비시대 초기인 성왕대였다. 중앙의 정치기구 안에 관영수공업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여러 관청을 두고 그 곳에 장인들을 배속시켜 왕실이나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생산토록 하였다. 성왕이 국왕 중심의 정치운영을 위해 설치한 22부 가운데 관영수공업을 관리·운영하는 관청을 두었던 것이다.

 이 때의 관영수공업은 크게 두 체계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 하나는 궁궐 내의 필요한 물품과 국왕의 사여물이나 대외교역품을 생산하는 궁중수공업으로서 궁중의 업무를 담당하는 내관 12개 관청 가운데 馬部·刀部·木部 등이 설치되었고, 다른 하나는 관청에 소요되는 물품을 생산하는 관청수공업으로서 일반 행정관부인 외관 10개 관청 가운데 司軍部·司空部·綢部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 관청의 직능은 그 명칭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궁중수공업을 관리·운영하는 마부는 마정과 함께 궁실에서 필요한 말과 수레의 여러 부속품의 생산을, 도부는 궁중에서 필요한 환두대도·칠지도와 같은 의전용 대도 등의 생산을, 목부는 왕실 안에서의 토목·건축의 업무와 목제품의 생산을 각각 맡았을 것이다. 그리고 관영수공업을 관리·운영하는 사군부는 군사행정과 함께 각종 무기의 생산을, 사공부는 각종 건설·보수공사의 업무를, 주부는 공물수취 행정과 함께 직물수공업의 생산을 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6세기 이후 백제의 관영수공업은 백제 수공업부문의 규모와 기술수준 및 운영·조직체계면에 있어서 상당한 비중을 지닌 것이었다. 관영수 공업에 포괄되어 있는 업종들은 바로 이 시기 관영수공업의 분업 수준을 반영한다. 특히 불교건축 부문에 있어서는 분업화가 상당히 진행된 듯하다. 6세기 후반 법흥사 건립을 지원하기 위해 왜에 파견된 백제의 장인들 가운데에는 寺工·鑪盤博士·瓦博士·畵工 등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718)≪日本書紀≫권 21, 崇峻天皇 원년. 당시 사원건축 부문에서는 생산 공정별로 상당한 수준의 분업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관영수공업 부문이 점차 다양해지고, 또 분업에 의한 생산기술이 향상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백제는 상급 장인들에게 박사의 직위를 수여하여 업종별로 전문화하려고 하였지만, 신라의 경우처럼 제도적으로 생산공정을 분업화하여719)朴南守, 앞의 책, 74∼80쪽. 이를 체계화하지는 못한 것 같다. 아마도 초보적인 단순 협업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관영수공업의 관리체계에 있어서는, 22부의 해당 관청은 외형적으로 국왕 직속으로 병치되어 있으나 일단 해당 6좌평에게 소속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책임자는 3년 임기의 長史·長 吏였다.720)≪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百濟.
≪翰苑≫蕃夷部, 百濟.
22부의 직제 구성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위덕왕 때에 왜에 파견된 백제사절단의 구성을 통해 그 단편적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사절단의 책임자는 德率·奈率의 率級 관등을 지녔고, 단원들은 대체로 五經博士·易博士·醫博士·曆博士·採藥師·樂人의 직책을 지닌 德級의 관등 소지자였다.721)≪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15년 2월. 이들 단원의 관복은 띠의 색으로 솔급과 구별되고 있어 각기 22부에 소속된 전적인 실무 행정관리인 듯하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22부의 책임자인 장사 또는 장리는 솔급으로 임명되고, 실무에 종사하는 행정관리는 솔급 아래인 덕급으로 임명된 것이 아닐까 한다.722)金周成,≪百濟 泗沘時代 政治史硏究≫(全南大 博士學位論文, 1990), 58쪽.

 한편 국가는 관영수공업의 행정관리체계와 함께 생산 의욕을 고취시키고 일반 장인들을 관리·통제하기 위해 효율적인 생산관리를 도모해 나갔다. 22부의 수공업 관련의 관청에는 궁중이나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기 위해 소규모의 작업장을 설치하고 거기에 업종별로 우수한 장인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장인들은 예하의 하급 장인들을 기술적으로 지도·통제하는 업무를 부과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 대가로 국가로부터 박사의 직위와 주로 덕급의 관등을 수여받을 정도로 크게 우대받았다. 근초고왕 때에 왜에 파견된 冶匠 卓素와 신라 황룡사 9충탑을 세운 백제의 阿非知,723)≪三國遺事≫권 3, 塔像 4, 皇龍寺九層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은제 팔찌를 만든 多利,724)文化財管理局,≪武寧王陵≫(三和出版社, 1973), 29쪽. 그리고 왜에 파견된 박사들이 이에 해당하는 장인으로 간주된다. 상급 장인의 밑에는 양인 출신의 하급 장인들과 노비 출신의 장인들이 많이 배속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각기 사회경제적인 처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하급 장인들은 상급 장인과는 달리 대부분의 경우 자기경리로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관역에 징발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생산한 수공업제품을 공물세인 調로 수탈당하면서 관역에 징발되어 부역노동을 부담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관영수공업의 생산효율을 저하시키는 역기능을 초래하였고, 아울러 민간수공업의 발전을 저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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