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 구조
  • 1) 신분제
  • (1) 왕족·왕비족

(1) 왕족·왕비족

 백제의 왕계로는 부여의 解慕漱계이며 고구려 동명왕인 朱蒙의 적통을 이은 溫祚계의 扶餘氏(餘氏)가 있었고, 별도로 역시 북부여 解扶婁의 서손이며 優台(仇台)를 이어 沸流계로 계승한 優氏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朴·昔·金 3姓이 번갈아 왕위를 계승한 사례와는 다르나, 7대 사반왕의 대를 이은 고이왕은 5대 초고왕의 왕모의 아우 즉 외숙 항렬계로 왕위를 계승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이왕을 비롯하여≪삼국사기≫고이왕 27년(260)에 內臣佐平으로 임명된 고이왕의 아우 優壽가 있고, 비류왕 18년(321) 정월에 역시 내신좌평으로 임명된 왕의 庶弟 優福이 있으며 아울러 책계왕·분서왕 등도 부여씨가 아닌 異姓 우씨계로 추정된다.744)千寬宇,<馬韓地域과 伯濟王國>(≪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潮閣, 1989).
權兌遠,<中國東北地方과 百濟文化系統>(≪한민족과 북방과의 관계사연구≫95-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왕비족으로는 진씨와 해씨가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백제의 대성8족 가운데 핵심이 되는 성씨였으나, 남천 후 그 세력이 약해졌다. 그러나≪삼국사기≫에 의하면 근초고왕 2년(347) 왕후의 친척이라는 朝廷佐平 眞淨을 비롯하여 근구수왕 2년(376) 왕의 장인인 內臣佐平 眞高道, 아신왕 2 년(393) 왕의 친장인이라는 左將 眞武, 전지왕 3년(407) 內法佐平 解須, 兵官佐平 解丘가 모두 왕의 외척이라고 하였다. 이들 진씨·해씨의 두 씨족은 백제왕실의 척신으로 준왕족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동성왕 15년(493) 신라 伊飡 比智의 딸이 백제왕실에 출가해 온 이후로는 두 씨족이 왕비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렸을 만한 별다른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한편 백제는 부여나 고구려가 5부족사회를 바탕으로 고대국가가 발전한 것과 유사한 과정을 겪었다. 그 초기에는 부족적 연맹의 성격을 간직하고 있었던 5부제가 고대국가의 체제가 성립된 후로는 수도의 행정구역으로 변화·발전하였다. 그 후 웅진시대에는 전국을 22檐(擔)魯로 나누고 왕의 자제나 종실들을 파견하여 지방통치를 담당케 함으로써 점차 왕권의 전제화가 이루어졌다. 사비시대에는 수도의 행정권을 5부와 5항으로 정비하고 지방을 5방으로 나누어 대성 호족출신으로서 2품관인 달솔을 方領으로 임명하였다. 이 시대에 전제왕권이 강화되었다고는 하나 왕권은 왕비족인 진씨·해씨를 비롯하여 대성8족 등 귀족관료들로부터 항시 견제를 받고 있었다.

 시조 온조왕으로부터 6좌평과 16관등이 정해졌다고 전하는 고이왕 27년 이전까지는 左輔·右輔·左將이 왕의 숙부 등 왕족과 진씨·해씨 등 왕비족에서 임명되어 국왕을 보좌하며 행정의 책임을 맡았고 이들에 의해 왕권이 유지되었다. 4세기 후반부터 중국대륙은 남북조시대였는데, 이 무렵 백제는 개로왕 4년(458) 남조인 송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당시의 국제적 위상을 고려하여 중신들에게 左賢王·右賢王의 봉작을 요청하였다. 같은 왕 18년(472)과 동성왕 12년(490)·17년에는 南齊에 보낸 表文 중 지역명이 첨부된 王·侯의 칭호가 보인다.745)≪宋書≫권 97, 列傳 57, 東夷, 百濟國.
≪南齊書≫권 58, 列傳 39, 百濟國.
또 좌·우현왕 기사가 있는≪송서≫백제전에는 백제의 요서지방에 대한 점유기사가 전해지고 있다. 이 시기는 당시 동북아시아권의 국제적 시각으로 보아 백제왕권의 권위가 크게 신장하여 소장과 후를 거느린 이른바「백제대왕」으로서의 위상을 표명하였던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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