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2. 정치체제의 정비
  • 2) 부체제
  • (1) 부

(1) 부

 삼국 모두 연맹체로서 출발한 초기의 정치조직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5部, 또는 6부의 부들이다. 고구려에는 桂婁部를 비롯하여 消奴部·絶奴部·順奴部·灌奴部 등이 있어 정치의 구심점이 되었다. 처음에 고구려의 왕은 소노부에서 나왔으나 나중에는 계루부에서 왕이 나왔고, 절노부는 대대로 왕실과 결혼하여 왕비를 배출한 왕비족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168)≪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백제의 경우에도 中部와 前·後·左·右의 이름이 붙는 5부가 있었고, 신라는 사로국의 모체인 6村이 6부로 발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部에 관한 기록은≪三國志≫魏書 東夷傳을 비롯하여≪삼국사기≫나≪삼국유사≫의 초기 기록에서부터 보이는데, 처음부터 이들이 부란 명칭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고구려에서는「那」또는「奴」라는 용어가 일찍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아, 원래는 貫那·椽那·絶奴 등으로 불리던 것이 후대에 중국식 용어인 部가 첨가되어 관나부·연나부·절노부 등으로 된 것이라 여겨진다. 여기에서「那」또는「奴」는「내」곧 냇가나 계곡의 어떤 집단이란 뜻으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의 경우에 중고기의 금석문에서 부의 명칭을 흔히「啄」·「沙啄」또는「喙」·「沙喙」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啄」과「喙」는「」또는「梁」으로도 쓰이고 있다. 이 글자들은 아마「돌」또는「」이나「벌」또는「」로 읽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돌」이나「」은 도랑(小川)의 뜻이 아닐까 여겨지는데, 도랑의 고어가「돌」또는「」로 다리(橋)나 뚝(堰)의 뜻도 가지고 있었으며, 한자로는 흔히「梁」을 사용하였다. 이「양」이「돌」로 읽혀졌음은「울돌목」을「鳴梁」이라고 쓴 것에서 알 수 있다.

 훼는 새의 부리를 뜻하는 글자인데, 이는 古所夫里·古良夫里의 夫里나 신라의 徐羅伐·比子伐의 伐과 같은 것으로「벌」또는「」로 읽혔을 것이고 들(野)을 뜻한다. 즉 훼 또는 啄·涿·梁이란 글자는 어떤 집단이 도랑이나 들을 끼고 있었던 데에서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169)盧泰敦,<三國時代의 部에 관한 硏究>(≪韓國史論≫2, 서울大, 1975), 4쪽. 신라의 6부 명칭 가운데는 이러한 梁이 붙지 않는 漢祇部 등이 있으나 안압지 출토 비편에「漢只伐部」라고 되어 있어 원래는 어떤 들(伐)의 집단이라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신라의 6부는 어떤 川邊의 집단 또는 들(野)의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6부의 명칭이 지역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곧 혈연성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들은 지역별로 형성된 단위 집단으로서의 부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집단이 나중에 중국식 명칭을 차용하여 한자로서 자신들을 표현하는 단계에 가서 部라는 용어를 채용하게 되었을 것이며, 그 명칭도 한자식의 두 글자로 된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 삼국시대의 部란 용어는 그 적용 범위가 중앙정치의 핵심인 5부나 6부에 한정되었다. 신라의 경우 사로국을 형성한 경주 부근의 지역 집단만을 부라 호칭하였고, 그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이러한 용어를 쓰지 않았다. 경주분지 이외의 지역의 소국들도 초기의 발전과정은 사로국과 매우 유사하였을 것이고, 이들 중에는 4∼5세기경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여 상당한 규모로 성장한 소국들도 많이 있었으나, 이들 소국들을 구성한 집단에 대해서는 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이들 部集團이 여타의 부족집단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었음을 명확히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치적 처우에 있어서 이들 부집단의 구성원과 여타의 지방민 사이에는 일정한 차별이 있었다. 특히 신라의 경우에는 문무왕 14년(674)에 外位制가 소멸하기 이전에는 京位는 6部人들에게만 수여되었으며 외위는 지방민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물론 통일전쟁이 치열해지는 중고기 말에는 김유신의 집안이나 竹竹의 예에서와 같이 지방민에게도 경위가 주어지기도 했지만 통일 전까지는 원칙적으로 6부인에 한해 경위가 수여되었다. 이는 6부인과 지방민이 그 소속 집단의 성격이 상이하였음을 말한다. 그 이유는 이 6부가 바로 신라 건국의 주체집단이었던 연맹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국의 주체세력이었던 이들은 지배집단으로서의 배타성을 가지고 여타의 지방민에 대해 정치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렸던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이들 6부는 경우에 따라 상호 견제하고 경쟁하기도 하였지만, 대외적으로는 지배자 집단으로서의 강한 공동체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 신라의 6부는 단지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나, 이는 부가 각자의 정치적인 세력으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상실한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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