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2. 정치체제의 정비
  • 2) 부체제
  • (4) 부대표자 회의-화백

(4) 부대표자 회의-화백

 부체제 아래서의 중요한 정치 문제는 각 부의 대표자로 이루어진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이는 혁거세의 추대가 6촌의 촌장들의 의논으로 이루어졌다는 신라의 건국설화에서 이미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사금시대에 왕위는 유력한 집단의 장들에 의해 선임되기도 하였고 세습되기도 하였는데,≪삼국사기≫에서는 이를 흔히「國人」에 의해 추대되거나 세워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국인은 일반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6부의 대표자들을 가리키는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부대표자들의 회의를 흔히 和白이라고 부르는데 화백이라는 명칭은≪新唐書≫新羅傳에 처음 보일 뿐 우리 나라의 사료에서는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신당서≫에서는 화백회의의 운영원리에 대해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그만둔다’고 하였으니 이는 이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개개인의 정치적 역할이 매우 중대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초기의 화백회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183)≪新唐書≫新羅傳의 기록은 8세기 중반경 신라에 왔던 중국사신의 견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6세기경 상대등과 대등을 중심으로 한 회의체의 이름이 화백이라고 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거리감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李仁哲,<新羅의 君臣會議와 宰相制度>,≪韓國學報≫65, 1993;≪新羅政治制度史硏究≫, 一志社, 1993, 87쪽). 그렇다면 초기의 화백회의의 참여자는 6부의 대표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화백회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많이 인용되는 기록이다.

왕의 대에 閼川公·林宗公·述宗公·虎林公(慈藏의 父이다)·廉長公·庾信公이 南山 亏知巖에 모여 국사를 논의하였다. 이 때에 큰 호랑이가 자리에 뛰어 들거늘 여러 사람이 놀라 일어났으나 오직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서 죽였다. 알천공의 힘이 이와 같고 首席에 앉았으나 여러 사람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세에 복종하였다. 신라에는 네 靈地가 있는데, 장차 큰 일을 의논하려고 하면 대신들이 반드시 이 땅에 모여 의논한 즉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졌다. 첫째는 동쪽의 靑松山이고 둘째는 남쪽의 亏知山이고 셋째는 서쪽의 皮田이고 넷째는 북쪽의 金剛山이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眞德王).

 이 기록은 물론 진덕여왕대의 것으로 상당히 후대의 것이고 또 회의의 참석자 중에 원래 경주 출신이 아니라 금관가야 출신인 김유신이 끼어 있음으로 보아 원래의 화백회의와는 그 성격이 약간 변질되었다고 보여지지만, 회의의 참석자가 6명이고 또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기 위한 특별한 지역이 있었다는 것은 마치 백제의 政事岩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화백회의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회의의 참석자가 6명인 것은 우연인지도 모르나 6부의 6이란 숫자와 관련지을 수 있다면 원래 화백회의는 6부의 대표자들이 참석하는 회의였다고 생각된다. 이는<영일 냉수리비>에 지도로갈문왕을 포함한 7명의 참석자가 회집하여 중대사를 논하고 있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물론<냉수리비>에서도 참석자의 출신부는 몇 개의 부에 한정되고 있지만 갈문왕을 제외한 6명이 참석한다는 것은 원래 6부의 대표자가 참석했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184)과거에는 화백회의의 의장은 상대등이고 참석자가 바로 大等이었다는 견해가 유력하였으나(李基白,<大等考>·<上大等考>,≪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66∼132쪽), 최근 냉수리비의 발견으로 화백회의의 의장은 葛文王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초기에는 6부의 대표자에 의한 회의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차츰 변질되어 유력한 부에서는 더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반면에 대표자를 참석시키지 못하는 부도 생겨나서 부 사이에도 우열의 차이가 점차 분명해졌을 것이다.<냉수리비>와<봉평비>에서 보는 것처럼 후대에 가서는 화백회의에 참여하는 인원이 늘어나며 특히 梁部와 沙梁部의 인물이 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習比部나 漢祇部의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부의 위상과 아울러 화백회의의 운영원리도 초기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라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즉 신라가 내물왕대에 이르러서 부족연맹체적 체질을 탈피하고 고대국가로의 모습을 점차 갖추게 됨에 따라 부족장 회의의 전통을 잇는 화백회의도 점차 귀족회의로 바뀌게 되고 그 권위도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