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2. 정치체제의 정비
  • 3) 지증왕대
  • (2) 국호 및 왕호의 개정

(2) 국호 및 왕호의 개정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증왕의 등장은 신라정치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지증왕대에는 주목할 만한 일련의 개혁이 단행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우선 주목되는 것이 국호와 왕호에 대한 개정이다. 이에 관해≪삼국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0월에 群臣이 아뢰기를 “시조 창업한 이래로 나라의 이름이 일정하지 않아 혹은 斯羅라 하고 혹은 斯盧라 하고 혹은 新羅라 하였으니, 신들은 생각하건대 ‘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德業日新)는 뜻이요, ‘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網羅四方)인 즉, 그것으로 國號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하오며, 또 생각건대 자고로 국가를 가진 자는 모두 帝 또는 王이라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가 건국한 이래 지금 23世로되 단지 방언으로 칭하고 존호를 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지금 군신은 한뜻으로 新羅國王이란 尊號를 올립니다” 하매 왕이 거기에 좇았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마립간 4년).

 위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德業日新 網羅四方’과 같은 다분히 유교적인 색채가 농후한 덕목을 국호에 대한 설명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을 보면, 지증왕대의 일련의 개혁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신라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과 지배조직을 강화해 나감에 따라 요청되는 선진적인 중국식 정치조직과 문물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즉 국호 및 왕호의 漢化政策이 단순한 명칭상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통하여 당시의 신라가 추구하고자 하는 정책의 목표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는 다만 명칭상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殉葬의 금지, 牛耕의 보급, 지방제도의 실시, 喪服法의 제정 등 일련의 개혁정책이 모두 동일한 목적으로 추진된 것임을 암시해 준다. 지증왕대에 실시된 지방제도의 정비는 州·郡 등의 명칭으로 보아 다분히 중국적인 제도를 채택한 것이며, 우경의 보급도 중국의 발달한 생산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장려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순장의 금지와 상복법의 제정은 동족적 관계를 명시하는 중국적 사회 편제방법의 도입이라고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지증왕대의 이러한 개혁정책이 중국을 모범으로 하는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증거로 지증왕 3년(502)과 9년 두 차례에 걸쳐 중국 北朝의 北魏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을 들 수 있다.191)≪魏書≫권 8, 帝紀 8, 世宗宣武帝, 景明 3년(502) 및 永平 元年(508) 3월 己亥에 ‘斯羅’가 조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의 사라가 신라를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李基白·李基東, 앞의 책, 153쪽). 신라는 이로써 奈勿王 27년(382) 이래 120년간이나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교섭이 다시 열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식의 지방제도와 상복법 등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중고 율령시대의 단서를 열어 법흥왕대에 율령을 시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되어야 할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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