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2. 정치체제의 정비
  • 4) 법흥왕대
  • (1) 율령의 반포

(1) 율령의 반포

 법흥왕대에 이루어진 여러 정책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이 律令의 반포이다. 율령의 반포를 흔히 고대국가체제의 완성을 가리키는 지표로 삼는 것만 보아도 율령의 반포가 갖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요즈음에 와서야 그 중요성이 인식된 것이 아니라, 당시 신라 사람들도 이를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인식하였다. 최치원이 쓴<鳳巖寺 智證大師寂照塔碑>에 阿度和尙이 신라에 들어온 시기를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한 지 8년째 되는 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당시의 사람들도 율령의 반포를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율령이란 엄밀하게는 律令格式을 의미하는데, 律은 刑罰法으로 오늘날의 형법과 같은 것이고, 令은 敎令法으로 오늘날의 行政法·私法·訴訟法 등에 해당된다. 그리고 格은 율령을 改廢·변경·보완한 것이며, 式은 율령을 시행하기 위한 세칙을 규정한 것이다. 율령은 중국의 隋唐대에 완성된 것인데, 魏晉南北朝시대에 율과 령이 분화하여 각각 해당 법전을 의미하게 된 이후 고정적인 법전에 대하여 시세의 변천에 적응시키기 위해 격식이라는 새로운 법이 출현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195)田鳳德,<新羅의 律令考>(≪서울大學校論文集≫4 인문·사회과학, 1956;≪韓國法制史硏究≫, 서울大 出版部, 1968). 그러므로 율령의 제정은 곧 국가적 성문법의 제정을 의미하며, 그 법에 의거한 지배체제의 국가를 율령국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법흥왕대의 율령반포에 대해 이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주로 일본 학자들은 법흥왕대의 율령반포를 부정하거나,196)井上秀雄은 신라에서 毗曇의 난을 진압한 이후 김춘추를 중심으로 당제를 도입하여 율령제를 진전시킨 것으로 보았고(井上秀雄,<朝鮮·日本における國家の成立>,≪岩波講座世界歷史≫6, 1971), 石上英一은 통일신라에서 조차 독자적인 율령이 편찬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에서 당의 율령을 근간으로 하여 시행 세칙을 중심으로 변용해서 오직 격식만을 편찬하였을 것으로 보았으며(石上英一,<律令法國家>1,≪歷史硏究≫222·223, 東京, 1979), 北村秀人도 법흥왕 7년에 반포된 율령이란 말은 공복제도의 규정처럼 일반적 의미로 쓰인 것이라는 武田幸男의 견해를 계승하면서 무열왕대나 문무왕대에도 율령이 제정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하고 신라의 지배체제나 국제관계로 보아 중국적인 특색을 살린 율령제가 실시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하였다(北村秀人,<朝鮮における‘律令制’の變質>,≪日本古代史講座≫7, 龍溪書舍, 1982). 극히 일부분 예컨대 公服制의 실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197)武田幸男,<新羅法興王代の律令と衣冠制>(≪古代朝鮮と日本≫, 龍溪書舍, 1974). 그러나 대부분의 국내 학자들198)李基東,<新羅 官等制度의 成立年代 問題와 赤城碑의 發見>(≪ 歷史學報≫78, 1978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新羅의 骨品制度와 日本의 氏姓制度>(≪歷史學報≫94·95, 1982).
金龍善,<新羅 法興王代의 律令頒布를 둘러싼 몇 가지 問題>(≪加羅文化≫1, 1982).
朱甫暾,<新羅時代의 連坐制>(≪大丘史學≫25, 1984).
과 일부 일본 학자들199)林紀昭,<新羅律令に關する二·三の問題>(≪法制史硏究≫17, 1967).은 율령의 반포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그 구체적인 편목까지 유추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은<단양 적성비>등의 새로운 금석문이 발견되면서 더욱 증거가 강화된 느낌인데 특히 최근에 발견된<울진 봉평비>로 인해 법흥왕대의 율령반포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고 보인다.200)朱甫暾,<蔚珍鳳坪新羅碑와 法興王代 律令>(≪韓國古代史硏究≫2, 1989), 115∼137쪽.<봉평비>에 ‘前時王大敎法’이란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前時에 크게 법을 敎하였다’는 것은 법흥왕 7년(520)의 율령의 반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율령의 반포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전제가 필요하다. 하나는 율령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율령을 제정·공포하여 시행할 수 있는 국가권력의 강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지배체제가 성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경우 소수림왕대의 太學의 설립은 율령의 반포를 위한 기본조건이 마련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 지증왕대의 국호와 왕호의 개정은 중국의 유학을 받아들인 바탕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德業日新 網羅四方’에서 ‘덕업’과 ‘일신’은 유교경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또<진흥왕 순수비>에도 왕도사상과≪書經≫이 인용되어 있으며,201)金哲埈,<三國時代의 禮俗과 儒敎思想>(≪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306쪽. 진흥왕 6년(545)에≪國史≫를 편찬하였다는 것을 보아도 유교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법흥왕대에도 이미 유교에 대한 상당한 이해와 법전을 편찬할 수 있는 한학의 소양을 갖춘 학자들이 있었다고 하겠다.

 또 지배체제의 강화에 대한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증왕대에 실시된 州郡制는 在地勢力家들을 일원적인 국가체제 속에 편입하고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력을 한층 강화한 것인 만큼 이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성립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兵部의 설치로 국왕은 병권을 장악하는 위치에 설 수 있었으며 새로운 군사제도인 전국적인 규모의 법당군단의 설치는 왕의 절대적인 권한을 한층 강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軍主의 파견과 外官携家制의 실시는 지방에 대한 통치를 한결 공고화하는 조치였을 것이다. 이렇게 강화된 지배기구를 통해 율령은 실시될 수 있었던 것이고, 이에 대한 무력적인 시위와 처벌을<봉평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202)李宇泰,<蔚珍鳳坪新羅碑의 再檢討-碑文의 判讀과 解釋을 중심으로->(≪李元淳敎授停年紀念 歷史學論叢≫, 敎學社, 1991). 그러므로 신라의 법흥왕대에는 율령을 반포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며, 그 사실을 의심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법흥왕 7년(520)에 반포된 율령의 내용이나 체계, 또는 그 모법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율령반포의 기록에 이어 ‘처음으로 百官 公服의 朱紫의 차례를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까닭에 법흥왕 7년에 반포된 율령이란 바로 공복제를 주 내용으로 하는 衣冠制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으나203)武田幸男, 앞의 글, 85∼93쪽. 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신라의 율령은 율과 령을 아울러 갖춘 완성된 법전이라고 생각되나, 그 체계는 중국이나 일본의 율령과 같이 □□令과 □□律로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니라, □□法으로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왜냐하면 법흥왕대에 만들어진<울진 봉평비>에 ‘奴人法’이란 말이 보이는데, 봉평비의 건립이 율령을 반포한 지 얼마 지나지 않는 시점이고 또 그 성격이 율령의 시행과 관련이 깊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법조문의 내용을 노인법이라 표현한 것을 보면 이는 법흥왕 7년에 반포한 율령의 한 편목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진흥왕대의<丹陽 赤城碑>에도 ‘佃舍法’이란 구절이 있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진평왕대의<南山新城碑>에서도 ‘作節如法’이라 하여「法」이란 글자가 보이는데 이 또한 당시 신라의 법전체계가 □□法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신라의 율령은 비록 고구려나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제정되었다 하더라고 그 내용이나 체제는 신라 고유의 법을 이어 받은 독자적인 체계와 내용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204)田鳳德은 신라 율령은 고구려의 율령을 모법으로 한 것이고, 고구려의 율령은 晉의 泰始律令(267)을 계수한 것이라고 추측하였다(田鳳德, 앞의 글). 이에 반해 林紀昭는 법흥왕대 이후의 신라에는 새로운 율령이 아닌 고유법이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林紀昭, 앞의 글, 154∼156쪽).≪삼국사기≫의 色服條에 법흥왕대에 처음으로 6部人의 복색의 제도를 정했으나 이는 오랑캐의 풍속으로 중국과는 다른 것이었고, 金春秋가 중국에 들어갔다 온 이후에 중국의 의관이 신라에 전래되어 중국과 같은 옷을 입게 되었다는 기록205)≪三國史記≫권 33, 志 2, 色服.은 이를 간접적으로 설명해 준다 하겠다.

 율령의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있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추정은 무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율령 속에는 관등제와 골품제에 관한 내용이 비중있게 다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골품제의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가 신분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을 규정하는 것이므로, 골품제의 성립은 관등제의 제도적인 성립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원래 관등제는 씨족 혹은 부족과 그것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읍락 등이 가진 족제적 규범을 초월할 때 성립하는 일원적인 개인적 신분체제이다.206)武田幸男,<朝鮮三國の國家形成>(≪朝鮮史硏究會論文集≫17, 1980), 48쪽. 그 까닭에 관등제의 성립은 족제적 체제로부터 초월한 군주권의 실재를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골품제의 편성과정에서 그 대상이 된 것은 혈연적 관계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의 국가권력이 기존의 족장층의 사회적 기반을 해체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관등제가 개인적인 신분제라면 골품제는 혈족적인 신분제라 하겠다. 따라서 골품제와 관등제는 상호보완적인 것이며 일원적인 관등제를 실시할 수 없었던 신라가 선택한 제도적 완충장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라 관등제의 기원은 사로국의 성장과정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이것이 제도로 완성된 것은 6세기 초 지증왕대 이후의 일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골품제도는 율령의 법제적 보장에 의해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므로 골품제의 성립은 법흥왕 7년의 율령반포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207)申東河,<新羅 骨品制의 形成過程>(≪韓國史論≫5, 서울大, 1979), 57∼61쪽.
李基東, 앞의 글(1982), 142∼144쪽.
또한 대개 지증왕대에 마련되었다고 여겨지는 외위제도 율령의 내용 중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즉 관등체계의 기본적인 틀은 지증왕대에 마련되었고 이것이 법제화된 것은 법흥왕대의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