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3. 영토의 확장과 왕권강화
  • 1) 영토의 확장
  • (1) 한강유역의 확보와 백제·고구려와의 항쟁

(1) 한강유역의 확보와 백제·고구려와의 항쟁

 진흥왕이 등장할 무렵의 고구려의 사정을 살펴보면 왕위계승 문제로 왕실의 내분이 있어 국내정세가 상당히 불안했던 것으로 여겨진다.≪日本書紀≫에 의하면 欽明天皇 7년(546)에 고구려에서 큰 난리가 있어 죽은 자가 2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하는데 그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百濟本紀에 이르기를 고구려가 정월 丙午에 中夫人의 아들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나이가 8살이었다. 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正夫人은 아들이 없었고, 중부인이 세자를 낳았는데 그 아버지가 麤群이며, 소부인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버지가 細群이다. 박왕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세군과 추군이 각기 그 부인의 아들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군측의 죽은 사람이 2천여 명이나 되는 것이다(≪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7年 春正月).

 이 기록을≪三國史記≫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삼국사기≫에 는 安原王이 죽은 연대를 545년이라고 하여 1년의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안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陽原王은 안원왕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라고 하는 등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때에 고구려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왕실 내부에 치열한 다툼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이로부터 6년 뒤인 양원왕 7년(551;신라 진흥왕 12년)에 신라가 居柒夫로 하여금 고구려의 한강 상류지역을 공격할 때에 그가 승려시절에 은혜를 입은 고구려 僧 惠亮을 맞아오게 되었는데, 이 때 혜량이 거칠부에게

지금 우리 나라는 政亂이 일어나 멸망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원컨대 귀국으로 데려가 주길 바란다(≪三國史記≫권 44, 列傳 4, 居柒夫).

 고 한 것으로 보아 확인된다. 아마 당시의 고구려의 왕실 내부의 다툼으로 인해 전반적인 국내정세가 매우 혼미했을 뿐 아니라 민심도 이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무렵의 백제는 성왕이 수도를 熊津에서 泗沘로 遷都하여 국정을 쇄신하고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사비로 천도한 후 22部의 中央官署와 5部·5方의 수도 및 지방 행정제도를 갖추었으며, 謙益과 같은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의 진흥을 꾀하고 국가의 정신적 토대를 굳게 하였다. 또 밖으로는 중국의 梁과의 연결을 더욱 강화하여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였고, 倭와의 친선도 두터이 하여 왜에 여러 방면의 기술자를 보내 주는 이외에 불교를 전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라와는 가야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는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고구려의 남하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연맹관계가 잘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내정비와 신라와의 친선관계를 바탕으로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회복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무렵 등장한 신라의 진흥왕은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처음에는 母后의 섭정을 받았으나 재위 12년(551)에는 開國이라는 年號를 사용하면서 親政을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의 대외정복 사업은 보다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먼저 진흥왕 11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道薩城과 金峴城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異斯夫로 하여금 두 성을 빼앗았다.223)≪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1년. 이 두 성을 둘러싼 공방은 먼저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하자 고구려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였던 것인데, 두 나라의 병사가 피곤한 틈을 타 신라가 이 두 성을 차지한 것 같다.224)≪三國史記≫권 19, 高句麗本紀 7, 양원왕 6년 및 권 26, 百濟本紀 4, 성왕 28년. 이 두 성의 위치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도살성은 天安 또는 曾坪 근처라고 생각되고, 금현성은 全義로 비정된다.225)李丙燾,≪譯註 三國史記≫(乙酉文化社, 1977), 57쪽. 이는 모두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요충지가 되는 곳으로 이 지역의 확보를 위해 고구려와 백제가 공방을 벌이는 동안 신라가 이를 모두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해 3월에 진흥왕이 娘城(淸州)에 순수하여 于勒과 그의 제자를 불러 음악의 연주를 들었다고 하는데, 이 순수는 앞의 두 성을 차지한 뒤 새로이 개척된 영토를 획정하기 위한 목적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고구려·백제는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는데, 백제의 입장으로는 곧 벌어질 한강유역에 대한 신라와의 합동 공격을 위해 이를 묵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진흥왕 12년(551) 신라와 백제는 한강유역의 공격에 나서게 된다. 신라는 거칠부 등 여덟 장수를 보내 竹嶺 이북 高峴 이내의 10개 군현을 탈취하였고, 백제는 평양을 격파하였는데,226)≪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2년 및 권 44, 列傳 4, 居柒夫. 고현이 어디인지는 불확실하나 죽령 이북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이 때에 신라가 획득한 지역은 한강 상류지역의 고구려 영토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이 당시에 건립되었다고 보이는<丹陽 赤城碑>의 위치로 보아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가 공취한 지역에 대해≪일본서기≫欽明天皇 12년조에 漢城·平壤 등의 6개 군을 취하였다고 했으니 이는 한강 하류지역으로 현재의 서울을 포함한 지역일 것이다. 이로써 백제는 지난날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옛땅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 신라는 백제의 동북지역을 공격하여 이 지역에 新州를 설치하고 각간 武力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이는 백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커다란 충격이었고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반대로 신라의 입장에서는 고대해 마지않던 숙원사업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라로서는 한강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점령함으로써 많은 人的·物的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여 국제관계에 있어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를 분리시킴으로 인해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부터 신라와 백제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데,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긴 직후에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로 보내고 있는데, 이는 일단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편입한 것을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경계심을 늦추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신라에 대한 본격적인 침입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음해인 554년 7월 성왕은 大加耶軍 및 왜와 합세하여 신라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에 나서게 된다. 이 때의 싸움터가 지금의 沃川 부근인 管山城이었는데, 처음에는 백제가 유리한 듯 하였으나 적진 깊숙히 진격한 아들 餘昌(威德王)을 위문하러 성왕이 친히 步騎 50을 이끌고 밤에 가다가 狗川에서 신라의 복병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이를 틈타 신라의 대반격이 시작되어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였는데 당시 백제의 군사 29,600명이 전사하였다고 한다.227)≪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5년.

 새로이 확보한 한강유역을 통치하기 위해 신라는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하고 진흥왕 16년(555)에는 왕이 친히 北漢山에 巡幸하여 疆域을 확정지었는데228)≪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6년., 현재 서울에 있는 진흥왕의<북한산비>는 이 때에 세운 것이다. 진흥왕 18년에는 신주를 폐하고 北漢山州를 두었으며 같은 왕 29년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南川州(利川)를 설치하였다가 진평왕 16년(594)에는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두었다. 이렇게 자주 州를 폐하고 설치한 것은 사실은 주의 治所를 옮긴 데 지나지 않는데, 이는 신라가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매우 고심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생각된다. 또 한강의 상류지역에는 고구려의 國原城 자리에 小京을 설치하여 國原小京이라 불렀는데, 이 지역을 정치·문화·군사의 중심지로 개척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더욱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진흥왕 19년에는 중앙귀족의 자제와 6부의 豪民을 국원소경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가야에서 귀순한 樂聖 우륵도 이런 사정으로 국원성에 머물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로서는 국원을 실질적인 한강유역의 중심지로 육성하고자 했던 것이며, 이는 고구려가 이 지역을 남진정책의 기지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는 북진정책의 기지로 삼으려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南陽灣에는 党項城이란 요새를 쌓아 이를 거점으로 진흥왕 25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의 陳과 北齊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교의 성공에 크게 힘입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한강유역의 점령이야말로 통일사업의 큰 기반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신라가 백제의 성왕을 죽인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게 된다. 진흥왕 23년에는 백제가 변경을 침입해 왔고, 眞智王 2년(577)에는 一善 지역에서 백제군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진평왕 24년에는 阿莫城(雲峰)에서 전투가 있었고 같은 왕 33년에는 椵岑城이 백제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신라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善德女王 11년(642)에 있었던 大耶城(陜川)의 함락일 것이다. 이 전투에서 신라의 都督 品釋 부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전사하였는데, 품석의 妻는 金春秋의 딸이었다. 이후 김춘추는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직접 당나라에 가서 함께 백제를 공격할 것을 간청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對唐外交에 나서게 되는데 아마도 대야성전투로 인한 백제에 대한 적개심이 그를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만들었을 것이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잃어버린 한강유역을 다시 찾기 위하여 여러 차례 군대를 보내 신라의 北邊을 침입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嬰陽王(590∼618)初의 溫達장군의 出征이라 하겠다. 平原王의 사위로 일찍이 後周와의 싸움에서 武勇으로 威名을 날린 바 있는 온달은 자청하여 군대를 이끌고 오면서 맹세하기를 “鷄立峴과 竹嶺 以西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며 비장한 각오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阿旦城229)阿旦城의 위치에 대하여는 이를 흔히 서울의 廣壯津의 峨嵯山城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丹陽의 永春面에는 溫達山城이 있고, 中原郡 上芼面 彌勒里에는 溫達 장군이 갖고 놀았다는 공기가 있는 등 온달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永春의 옛 이름이 乙阿旦縣으로 아단성과 비슷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아단성은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옳을 듯하다.의 싸움에서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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