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3. 영토의 확장과 왕권강화
  • 1) 영토의 확장
  • (3) 대지방민 정책

(3) 대지방민 정책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 진흥왕대에는 급격한 영토의 확장을 하게 되고 이것이 나아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커다란 밑받침이 되었다. 그렇다면 신라가 이렇게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며, 또 확대된 영토에 대한 통치는 어떠하였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신라가 이렇게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크게 본다면 대내적인 것과 대외적인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외적인 원인으로는 고구려·백제·가야 등 인접국의 국내정세 변동이나 이들 나라와 신라와의 관계 및 중국·왜와의 관계 변화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대내적인 요인으로는 앞 장에서 살펴본 정치제도의 정비와 불교의 공인, 군사제도의 정비와 화랑도의 설치 등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신라가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을 확보하고 또 통치하기 위해서는 복속된 지역의 주민들에 대한 통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삼국 모두 인근지역을 복속시켜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획득한 인적 자원은 바로 국력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즉 이 시기의 영역확장은 토지 그 자체보다는 여기에 거주하는 인민 즉 인적 자원의 확보에 일차적인 목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삼국시대의 세제가 토지보다는 인민을 대상으로 하는 인두세적 성격이 강하였음을 고려한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238)金基興,≪三國 및 統一新羅 稅制의 硏究≫(역사비평사, 1991), 201∼205쪽. 따라서 복속된 지역의 인민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동원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국력이나 군사력과 직결되는 것이다. 특히 새로이 확보한 지역의 주민들에 대한 회유정책은 이들을 통제하는 데 소모되는 군사력을 절약하고 나아가 이들을 다시 전선에 투입함으로써 이중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므로 국가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신라의 대민정책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는 근래에 발견된 <丹陽 赤城碑>와<蔚珍 鳳坪碑>를 우선 들 수 있다. 우선<적성비>는 그 上半部가 절단되어 비문 전체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나, 적성 공략에 협조하여 공을 세운 也尒次를 비롯한 몇몇 적성인과 그 가족에게 어떤 특전을 베푼다는 것과 앞으로도 이와 같은 공을 세운 사람과 그 가족에게는 동등한 은전을 베풀겠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당시에 야이차를 비롯한 적성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공을 세웠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들이 세운 공로는 적성 공략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임은 분명하다.239)李宇泰,<丹陽 新羅 赤城碑 建立의 背景-也尒次의 功績과 恩典의 性格을 중심으로->(≪泰東古典硏究≫8, 1992), 3∼42쪽. 따라서 신라의 중앙정부에서는 이들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후한 상을 줌으로써 공로에 보답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러한 사실을 널리 알리고 앞으로도 야이차와 같은 지방민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적성비를 건립했던 것이라 보인다. 이에 반해<봉평비>는 신라에 대해 비협조적인 행위를 한 居伐牟羅 男彌只의 주민과 지방관들에 대한 처벌이 주된 내용이다.240)<봉평비>의 해석에는 구구한 견해가 있으나, 그 주된 내용이 居伐牟羅 男彌只에서 일어난 모종의 사태에 대해 그 책임자를 처벌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한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李宇泰,<蔚珍鳳坪新羅碑의 再檢討-碑文의 判讀과 解釋을 중심으로->,≪李元淳敎授停年紀念 歷史學論叢≫, 敎學社, 1991, 73∼116쪽). 그러나 양자 모두 지방민에 대한 정책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건립되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뿐만 아니라 중고기 이후의 군사조직은 지방민에게 의존하는 바가 매우 컸으며 지방민의 적극적인 군사활동이 통일전쟁에 있어서의 승리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민의 활동을 뒷받침한 신라의 대지방민 정책은 군공포상과 지방민에 대한 홍보정책이며 이는 중고기 전기간을 통해 일관되게 추진되어 왔던 것이다.241)李宇泰,<新羅 三國統一의 一要因-對地方民 政策을 中心으로->(≪韓國古代史硏究≫5, 1992), 113∼122쪽. 이러한 정책을 통해 신라는 보다 중앙정부에 협조적인 지방인으로 지방세력을 재편하고 이에 따라 보다 효과적인 지방통제가 가능했던 것이다.<明活山城 作城碑>(진흥왕 12년, 551)와<南山新城碑>(진평왕 13년, 59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국적인 규모의 力役동원을 통한 왕경에서의 축성사업은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한 것이었으며, 지방인의 통치에 대한 자신감을 내외에 선포하는 효과도 함께 거두었을 것이다. 이 두 비에 보이는 전국적인 규모의 역역의 동원은 곧 동등한 정도의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며, 실제 진흥왕∼진평왕대의 대규모 전투와 이를 통한 영토의 확대는 지방인들을 조직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춤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진흥왕대의 비약적인 영토의 확장은 바로 이러한 대민정책을 바탕으로 가능했던 것이며, 또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힘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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