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3. 영토의 확장과 왕권강화
  • 2) 왕권의 강화
  • (1) 대왕호의 사용과 연호의 제정

(1) 대왕호의 사용과 연호의 제정

 <봉평비>에 나타난 신라 최고의 인물은 6부 가운데 탁부를 관장하던「寐錦王」이며 그는 다른 상층 관등을 보유한 인물들과 함께 정책을 결정하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葛文王이란 존재가 왕권을 대행하거나 정책결정을 동시에 행하는 실질적인 2인자로 나타나고 있어 갈문왕에 의한 왕권의 제약이 상정된다. 이같이 탁부의 장으로서의 매금왕과 沙喙部의 장으로서의 갈문왕의 병립적 존재는 왕의 권위를 상당히 약화시키는 상황이었다.

 신라의 왕이 部를 초월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법흥왕대부터였다.<川前里 書石 追銘(己未銘)>에 법흥왕을 另卽知太王이라 하여 법흥왕을 태왕으로 추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천전리서석의<乙卯銘>에는 법흥왕을 聖法興大王이라고 높여 부르고 있는데, 여기의 을묘년은 법흥왕 22년(535)에 해당하므로 법흥왕은 살아 있을 때에 이미 성법흥대왕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봉평비>가 만들어진 법흥왕 11년 이후 을묘년인 22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매금왕이란 칭호가 大王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왕의 소속부를 밝히는 관례도 없어진다. 즉 왕은 이전의 梁部의 대표자로서의 매금왕에서 부를 초월하여 신라국가를 대표하는 太王(大王)으로 그 지위가 격상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아마도 연호의 사용이나 불교의 공인과 같은 정치적 변동이 깊숙히 관련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법흥왕 23년 年號의 사용이라는, 중국의 황제를 모방하여 천하의 왕임을 선포한 시점에서 신라의 왕은 부를 초월한 존재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흥왕이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재위 23년(536)으로, 대왕이란 칭호가 이미 그 전해인 재위 22년에 확인된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대왕 칭호의 사용을 재위 22년 이전인 재위 15년의 불교공인이나 재위 18년의 上大等을 설치한 시기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특히<천전리 서석>의 법흥왕 22년의 명문에 성법흥대왕이란 칭호는 그 명칭으로 보아 불교의 공인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천전리 서석>의 법흥왕 26년 추명에 另卽知太王이란 칭호가 보이므로 대왕(태왕)이란 칭호는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한결 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왕 칭호의 사용은 상대등 설치나 연호의 사용과 같은 정치적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며, 그 시기는 530년대 초반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후에 출현하는 금석문에는 이와 같은 변화가 그대로 반영되어 550년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단양 적성비>에는 이전 시기의 비문들과는 다르게 왕이「敎事」의 주체로 부각되고 있음이 주목된다.<적성비>에 보면 왕은「大衆等」에게 교사를 내리고 있는데,<봉평비>의 경우 이들이 왕과 함께 교사를 행하는 존재였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왕이 초월적 존재로서 신하에 군림하는 모습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강화된 왕의 위상은<진흥왕 순수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순수비>에 보이는 眞興太王·新羅大王(北漢山碑) 및 朕(磨雲嶺碑)이란 표현은 중국의 천자에 비견되는 대왕으로서의 왕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진흥왕 6년(545)에 거칠부로 하여금≪국사≫를 편찬하게 한 것도 이러한 왕권의 강화와 관련있는 일이라 하겠으니 왕실 중심의 새로운 역사가 이 때에 정비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왕호의 변경과 연호의 사용은 단순한 명칭상의 변경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신라 왕실의 권위를 과시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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