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1. 중국과의 관계
  • 2) 수 이전의 중국과의 관계

2) 수 이전의 중국과의 관계

 신라는 지리적 격리성 때문에 중국과의 교섭은 삼국 중에서 가장 늦었다. 따라서 내물왕 26년(381)의 전진과의 외교 이후 법흥왕 8년(521)의 양나라의 교섭에 이르기까지 중국과의 외교적 접촉은 없었다. 그러나 위두의 귀국 이후 서역에 대한 초기 단계의 인식이 가능해졌을 것이며 實聖의 고구려 인질, 墨胡子의 전도, 그리고 正方과 滅垢玭의 활동 등은264)≪海東高僧傳≫권 1, 流通 1-1, 釋阿道 古記.
申瀅植, 앞의 글(1991), 121쪽.
간접·직접으로 서역이나 중국과의 교섭 필요성을 고조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서해 직통항로의 개척 이전에는 入朝의 어려움으로 중국과는 직접관계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법흥왕 이후 신라의 국가적 팽창으로 백제, 고구려의 위협이 가속화되었으며 신라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신라는 대중국 교섭의 관문인 党項城 확보가 절실하였다. 당시 백제는 椒島(풍천)에서 적산으로 연결되는 서해 직통항로를 개발하여 남·북조와 활발히 교섭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는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면서 대중접촉을 꾀하였으나 주로 승려들의 왕래를 통해 양국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 진흥왕 10년(553) 봄에 양나라에서 사신과 함께 유학하던 覺德스님을 보내면서 불사리를 보내 왔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 진흥왕 26년 9월에 陳나라에서 사신 劉思와 明觀스님을 보내어 예방케 하고 불경 1,700여 권을 보내 왔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 진평왕 22년(600) 고승 圓光이 隋나라에 갔던 사절인 奈麻 諸文과 大舍 橫川을 따라 귀국하였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이러한 기록에서 보듯이 승려들의 유학은 국가의 승인하에 이루어진 것이며, 사절왕래가 어려운 상황에서 승려들은 외교사신의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원광이 乞師表에서 진술한 것을 보더라도 당시 승려들의 외교적 활동은 정치적 의미가 컸다.

 진흥왕 14년(553)의 한강유역 확보는 신라의 중국관계에 있어서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다. 재위 25년에 北齊에 조공하여 책봉을 받은 이후 26년부터는 陳나라에 매년 입조함으로써 조공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그리하여 진흥왕(25년 이후) 때만도 북제에 3회, 진에 6회 사절을 파견하였으며, 진평왕 때에도 2회의 조공사가 진에 파견되었다. 이러한 교섭과정에서 중국에는 方物이 보내졌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중국측으로부터는 주로 佛經이 보내졌다. 그러나 고구려가 北魏·周·陳·북제 등 남북조의 여러 나라와 관계를 갖고 있음과는 달리, 신라는 진흥왕 때까지는 주로 남조인 진나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을 뿐이다.

 國人의 추대로 왕이 된 진평왕은 신성한 가문을 복구하고 眞智系(무열계)의 도전에 대해 왕통의 정통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이 시기는 남북조의 분열이 수나라에 의해서 수습되었으며, 곧 이어 唐이 등장하던 때였다. 따라서 3국이 새로운 통일왕조에 대하여 접근을 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쟁외교를 목도한 수나라는 대등한 거리를 두고 3국을 견제하였다.265)申瀅植,≪韓國古代史의 新硏究≫(一潮閣, 1984), 313쪽. 수나라 등장(581) 이후에도 신라는 가장 늦게 교섭이 이루어졌다.266)수나라와의 접촉은 백제가 제일 빨랐다. 威德王 28년(581)에 조공하고 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이라고 책봉을 받았다. 고구려는 영양왕 원년(590)에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신라는 진평왕 16년(594)에 조공관계가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양원왕 10년(554)의 大政亂과 13년의 干朱理의 모반사건 이후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평원왕 28년(586) 장안성으로의 遷都 등 국내문제가 복잡하였다. 따라서 진나라의 멸망사실을 같은 왕 32년에야 접하게 되었다. 진평왕 16년(594)에 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을 받은 것을 보면 590년대 초에 사절이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진평왕이 왕권의 강화 내지는 신성화를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선 진평왕은 제도의 개혁을 통한 왕권강화를 시도하였다. 수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맺기 전인 재위 15년까지 位和府·船府·調府·乘府·領客府 등 5개의 중앙부처를 신설하여 中古期의 왕권강화를 적극 추진하였다.267)李基白,<稟主考>(≪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141쪽.
李晶淑,<新羅 眞平王代의 政治的 性格>(≪韓國史硏究≫52, 1986), 19∼22쪽.
金杜珍,<新羅 眞平王代 初期의 政治改革>(≪震檀學報≫69, 1990), 19∼21쪽.
李明植,<新羅中古期의 王權强化過程>(≪歷史敎育論集≫13·14, 1990), 325쪽.
무엇보다도 진평왕은 弩里夫(상대등)와 金后稷(병부령) 등 친위세력을 중심으로 眞智系를 견제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켰으며, 재위 16년 이후 적극적인 親隋政策을 추진하였다. 특히 智明·圓光·曇育·安含·安弘 등 고승의 측면적 지원과 뒷받침으로 왕실의 신성한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백제·고구려의 침입에 따른 국가적 위기와 진지계의 도전에 직면하여 진지계와의 정치적 타협이 불가피하였으며,268)진평왕은 자신의 딸(天明)을 金龍春에게 出嫁시켜 김용춘계와 정치적 타협을 꾀하였다. 김용춘도 이러한 정략적 혼인을 통해 자신의 지위와 기반을 강화시켜 나갔다. 진평왕 43년(621)에는 龍春(진지왕자, 김춘추 부친)을 內省의 私臣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결국 진평왕 후반기는 舒玄(김유신 부친)과 연결된 용춘의 지위가 강화되어 왕권에 대한 견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진평왕은 兵部令을 겸직한 私臣에 대한 제도적 견제책으로 兵部大監(2인)과 侍衛府大監(6인)을 두는 한편 적극적인 왕권강화 수단으로서 親唐策을 추진하게 된다.

 이러한 수나라와의 외교관계 속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入朝使의 형태나 지위, 그리고 자격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나라가 단명으로 멸망했기 때문에 구체적 기록은 적지만 다음의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 진평왕 22년 고승 원광이 朝聘使인 奈麻 諸文과 大舍 橫川을 따라서 돌아왔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 진평왕 24년 大奈麻 上軍을 사신으로 수나라에 보내고 方物을 바쳤다. 9월에 고승 智明이 入朝使 상군을 따라서 돌아왔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 진평왕 26년 7월 대나마 萬世와 惠文 등을 수나라에 보냈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 진평왕 27년 3월에 고승 曇育이 입조사인 惠文을 따라서 돌아왔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 진평왕 33년 왕이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請兵의 글을 바치니 수 양제가 이를 허락하였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 진평왕 35년 7월에 수나라 사신 王世儀가 와서 皇龍寺에서 百高座를 베풀고 원광 등 법사를 맞아 불경의 설법이 있었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이상의 내용은 신라와 수나라와의 외교교섭상을 나타낸 것이다. 이를 알기 쉽게 도표화하면<표 1>과 같다.

인 명 관 등 파 견 연 대 귀 국 연 대
諸 文 나 마   진평왕 22년(600)
橫 川 대 사  
上 軍 대나마 진평왕 24년(602) 진평왕 24년(602)
萬 世 진평왕 26년(604)  
惠 文 진평왕 27년(605)

<표 1>신라의 對隋사절

 <표 1>에서 보면 신라의 사절은 대나마(10위)·나마(11위)·대사(12위) 등 중하위급 관등을 가진 자로서, 백제사절에 비하면 하위급 인물이 파견되었다.269)고구려의 對隋使節의 인명은 나타나 있지 않으나, 백제의 경우에는 扞率(燕文進, 무왕 8년)·佐平(王孝隣, 무왕 8년) 등 고위층의 인물들이 파견되었다(申瀅植,≪三國史記硏究≫, 一潮閣, 1981, 224쪽). 그리고 특히 주목되는 것은 諸文과 橫川, 萬世와 惠文의 경우처럼 동시에 두 사람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두 사람의 관등 차이로 보아 正·副使의 성격을 띤다고 하겠다. 그리고 체류기간은 비교적 짧았으며, 그들의 임무가 求法僧의 귀국알선과 請兵까지 맡고 있다. 당시 승려의 신분과 지적 수준에 따라 그들이 외교사절로서의 직능을 다했으리라 여겨진다.

인 명 나라 출 국 연 대 귀 국 연 대 귀 국 방 법
覺 德   진흥왕 10년(549) 梁나라 사신을 따라
明 觀   진흥왕 26년(565) 陳나라 사신(劉思與)을 따라
智 明 진평왕 7년(585) 진평왕 24년(602) 신라 사신(上軍)을 따라
圓 光 진평왕 11년(589) 진평왕 22년(600) 신라 사신(諸文·橫川)을 따라
曇 育 진평왕 18년(596) 진평왕 27년(605) 신라 사신(惠文)을 따라
安 含 진평왕 22년(600)  
安 弘   진평왕 42년(620)  
圓 安      

<표 2>신라의 구법승(隋 이전)

 <표 2>에서와 같이 구법승들도 국가의 통제하에 출국·귀국하였으며, 대개 사신을 따라 돌아오고 있다. 이들은 당시의 중국문화뿐 아니라, 서역의 문화를 전달해 줌으로써 신라문화 개발에 기여하였을 것이다.270)신라의 구법승의 활동에 대해서는 權悳永의<三國時代의 新羅求法僧의 活動과 役割>(≪淸溪史學≫4, 1987)에서 자세한 언급이 있어 참고가 된다.

 이 때를 전후하여 서역문화의 수용에 큰 역할을 한 장본인은 원광이다. 그는 진평왕 11년(589)에 해로로 陳(金陵)에 들어가 成實·涅槃·三論 등을 전수받았다.271)≪海東高僧傳≫권 2, 流通 1-2, 圓光. 그러나 그 해에 진이 멸망하자 수(장안)나라로 들어가 통일왕조의 새로운 문물과 그 곳의 서역문물을 섭렵하였다. 진흥왕 37년(576)에 安弘272)≪三國史記≫권 4, 진흥왕 37년조의 ‘安弘法師入隋求法’이란 기록은 진흥왕 37년(576) 당시는 隋의 건국(581) 이전이므로 사실이 아니다.≪海東高僧傳≫권 2, 流通 1-2, 安含조에는 안함과 安弘을 동일인으로 간주하고 있다.이 胡僧 毗摩羅 등과 귀국했다던가,≪海東高僧傳≫에 안홍이 서역승(3인), 漢僧(2인)과 함께 돌아왔다는 사실273)≪海東高僧傳≫ 권 2, 流通 1-2.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구법승들이 서역에 대한 광범한 지식을 가지고 돌아왔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6세기 후엽 이후 신라인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그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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