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2. 왜국과의 관계
  • 2) 4세기 후반∼5세기 초 왜국과의 관계

2) 4세기 후반∼5세기 초 왜국과의 관계

 먼저 신라와 왜국의 관계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삼국사기≫에서는 脫解 3년(59) 왜국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양국의 외교관계가 시작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양국관계의 시작이 왜국으로부터의 사신파견으로 시작되었고, 양국의 관계가 오래된 것처럼 서술하기 위하여≪삼국사기≫편찬자가 중국사서의 기사를 참고로 하여 조작한 기사다.294)탈해니사금 3년 5월조는≪삼국사기≫편찬자가≪후한서≫에서 倭奴國의 낙랑입공기사를 참고로 하여 만들었고, 아달라니사금 20년 5월조는≪삼국지≫왜인전의 기사를 참고로 하여 만든 기사로서 사실로 보기 어렵다(鈴木英夫,<“三國史記”の倭關係記事>,≪古代の倭國と朝鮮諸國≫, 靑木書店, 1996, 26쪽).≪일본서기≫에서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로 양국관계가 시작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이 기사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주의를 요한다.

 ≪삼국사기≫·≪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라와 왜국과의 관계에 대한 기사 가운데에서 다른 사료들과 비교 검토가 가능한 것은 4세기 후반 이후의 것들이다. 즉<七支刀銘>·<廣開土王陵碑>등의 금석문과≪宋書≫·≪隋書≫·≪新唐書≫·≪舊唐書≫ 등의 중국 사서가 존재하므로 이 자료들을 통해 역사상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칠지도명문>·<광개토왕릉비>·≪삼국사기≫·≪일본서기≫ 등에 의하면 奈勿王 17년(372)에 왜국이 백제와 외교관계를 개시한 이후, 왜국과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협력체제를 유지하였다. 신라는 내물왕 11년 백제와 외교관계를 가졌으나, 같은 왕 22년과 27년에는 고구려의 권유로 前秦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37년에는 實聖을 인질로 고구려에 보내면서 고구려 진영에 가담하였다. 고구려의 廣開土王이 재위 6년(396)에 백제 수도를 공격하여 한수 이북의 백제땅을 빼앗자, 백제 아신왕은 재위 6년(397) 왜국에 태자 腆支를 파견하여 원병을 요청하였고, 왜국이 이에 응하여 고구려·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왜국의 군사협력이 이루어졌다. 백제·임나가야·왜의 연합군이 내물왕 44년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는 광개토왕 10년 신라에 진군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신라성 등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402년에 새로 즉위한 실성왕은 내물왕자 未斯欣을 왜국에 파견하여 관계개선을 꾀하였으나, 왜국은 미사흔을 억류하였고, 履中(리츄)천황 5년(404)에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이후에도 왜국은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이중천황 6년 아신왕이 사망하자 왜국에 있던 전지가 귀국하여 즉위하였고, 전지왕대·비유왕대에 백제와 왜국은 사신을 교환하였다.295)古川政司,<5世紀前半の百濟政權と倭>(≪立明館文學≫433·434, 1981), 66∼67쪽.

 미사흔의 억류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5세기 초까지 왜국은 신라와 적대하고 있었는데, 실성왕 4년(405)·7년에 왜병이 신라 동변을 침범하자 신라는 실성왕 11년에 내물왕자 卜好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관계를 강화하였고, 실성왕 14년에는 침입한 왜인을 격파하였다. 그 후 고구려의 도움으로 즉위한 눌지왕은 재위 2년(418)에 동생 미사흔을 도망시키고 8년에는 고구려와의 수호를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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