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2. 왜국과의 관계
  • 3) 5세기 왜국과의 관계

3) 5세기 왜국과의 관계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사흔의 귀국 이후 눌지왕 15년(431)부터 智證王 원년(500)까지 12회(눌지왕 15년·24년·28년, 자비왕 2년(459)·5년·6년·19년·20년, 소지왕 4년(482)·8년·19년, 지증왕 원년)나 왜병이 신라를 침략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에 이 시기 신라와 왜국이 적대관계만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눌지왕 17년 신라가 백제와 화친관계를 맺었으므로, 백제의 동맹국 왜국과 신라의 관계도 개선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눌지왕 5년 이후 자비왕 21년(478)까지 왜국은 신라와 백제연안을 통과하는 항로를 통하여 10회나 송에 조공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왜국의 대송외교는 백제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296)山尾幸久,≪古代の日朝關係≫(塙書房, 1989), 216쪽. 백제는 전지왕 12년(416)에 송의 책봉을 받은 후, 久爾辛王 원년(420)·5년, 비류왕 3년(429)·4년·14년·17년·24년, 蓋鹵王 3년(457)·4년·13년·17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4세기 말 이후 왜국과 군사동맹체제를 유지하던 백제는 대중국외교를 통해 국내지배를 강화하려던 왜국조정에 對宋외교를 매개해 줌으로써 동맹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는 왜국의 신라침공을 막기 위해서 왜국이 신라 연안의 교통로를 이용하여 중국에 갈 수 있도록 허가할 것을 신라측에 요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왜병의 빈번한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신라는 백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눌지왕 17년에 백제와 화친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눌지왕 34년에 고구려 변장이 신라인에게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눌지왕 39년부터 신라는 백제와 군사적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다. 신라는 눌지왕 39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를 도왔고, 자비왕 17년에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백제 개로왕에게 원병을 보냈다. 소지왕 3년(481)에 신라는 고구려와 말갈의 공격을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막아내었으며, 같은 왕 5년에도 고구려의 공격을 백제와 함께 막아내었다. 신라는 소지왕 15년에 이벌찬 比智의 딸을 동성왕의 비로 보내 백제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였다. 소지왕 16년에는 고구려와 싸우다 포위된 신라군을 백제 동성왕이 군대를 보내 구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곤란에 빠진 백제를 신라가 구원하였다.

 왜왕이 允恭(인교우)천황 27년(438)부터 백제·신라·임나·진한·마한 등 한반도 남부 국가에 대한 군사권과 관련된 칭호를 인정해 주기를 송에 요구한 것은 왜왕이 한반도 남부지역 출신의 도래인을 통할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297)이는 백제왕이 중국계 신하에게 출신 지역명을 인정한 태수호를 임시로 주어 이에 대해 남조의 승인을 요청하였던 것과 유사하다(李永植,<五世紀倭の五王の韓南部諸國名の稱號>,≪加耶諸國と任那日本府≫, 吉川弘文館, 1993, 88∼95쪽). 이 지역의 국가들과 군사적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이러한 칭호를 요청하도록 왜왕에게 권유하는 한편 송에게는 왜왕을 책봉해 주도록 요청한 나라는 송-백제-왜국으로 이어지는 군사동맹체제의 결성을 꾀하고 있었던 백제였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는 비유왕 24년(450) 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국을 책봉해 주도록 권유하였고, 송은 文帝 28년(451)에 왜왕 濟를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으로 책봉하였다. 왜왕 제는 允恭천황으로 추정되는데, 이 천황대에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말해 주는 기사가≪일본서기≫에 보이므로298)≪日本書紀≫권 13, 允恭天皇 3년 정월 신유삭·8월, 同 42년 정월 을해삭 무자·11월. 왜국의 사신파견에 신라가 양해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5세기에 왜왕은 국내 지배체제의 구축을 위해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입하면서, 한편으로 백제의 권유에 따라 송 중심의 책봉체제에도 편입하고자 하였다. 백제는 개로왕 7년(461)에는 왕의 동생 곤지를 왜국에 파견하여 군사동맹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299)延敏洙,<5世紀後半 百濟와 倭國>(≪日本學≫13, 1994), 300쪽. 그러나 개로왕 21년 한성의 함락과 개로왕의 敗死로 인한 백제의 위기와 479년의 송조의 멸망으로 인해 왜국의 雄略(유우랴쿠)정권은 종래의 대외정책을 변경해야만 하였다. 웅략천황대에 지방호족의 반란이 집중되었다는 傳承은 5세기 후반 왜왕의 국내지배가 동요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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