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2. 왜국과의 관계
  • 6) 대수관계의 개시와 왜국과의 관계

6) 대수관계의 개시와 왜국과의 관계

 중국에서 남북조를 통일한 隋가 등장하면서 신라와 왜국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백제는 위덕왕 28년(581)에 수와 외교관계를 개시하여 왕이 수의 高祖로부터 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으로 책봉받은 이후 惠王 원년(598)까지 8차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면서 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신라도 眞平王 16년(594) 수로부터 책봉을 받아 백제와 신라가 모두 수를 중심으로 한 책봉질서 속에 들어가게 되자, 백제는 이러한 책봉체제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즉 백제는 위덕왕 44년에 왕족인 승려 阿佐를 왜국에 파견하였는데, 이는 왜국에게 대수외교의 개시를 권유하기 위한 사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308)왜국이 수에 보낸 국서에<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왕권 개념이 나타나는 점에 주목하여, 왜국이 대수외교를 개시한 것은 고구려 승려 혜자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坂元義種, 위의 글, 49∼50쪽 및 李成市,<高句麗と日隋外交>,≪思想≫795, 1990, 31∼32쪽). 그러나 고구려가 왜국에게 대수관계의 개시를 권유할만한 이유가 확실하지 않고, 왜국이 국가적인 교섭을 개시한 지 얼마 안되는 고구려의 권유를 받아들여 대외정책을 결정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오히려 오랫동안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백제의 권유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백제는 왜국이 수와 통교를 개시한다면, 수의 책봉을 받은 신라가 수에 조공하러 가는 왜국사신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고, 견수사가 백제를 통과할 때에 왜국과의 교섭도 가능하리라는 점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백제에서 아좌가 파견된 이후 왜국은 推古천황 5년(597) 11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법흥사의 완공과 대수외교를 개시하겠다는 뜻을 신라에 알렸다. 신라는 진평왕 20년(598) 4월 왜국사신이 귀국할 때에 까치를 보내고, 사신을 파견하여 협조의 뜻을 알렸다.

 추고천황 8년에 왜국은 수에 최초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 때 왜국사신은 왜왕을「天」이나「日」과 동렬에 두고 중국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려고 하는 자세를 보여, 수의 책봉을 받지 않는「不臣의 外夷」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309)石上英一,<古代東アジア地域と日本>(≪日本の社會史≫1, 岩波書店, 1988), 83쪽. 이와 같이 왜국이 수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자세를 보인 것은 왜국에게 대수외교를 권유한 백제의 의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즉 왜국이 수 중심의 책봉질서에 포함되게 된다면, 왜국의 대외정책은 수의 영향권하에 놓이게 되므로 백제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다. 따라서 백제는 왜국의 자존의식을 자극하여 왜국이 수의 책봉을 받지 않도록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서기≫에서는 왜국이 수에 사신을 파견한 600년대에 신라와 왜국의 관계가 상당히 악화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310)≪日本書紀≫권 22, 推古紀에 의하면 600년∼603년에 왜국의 신라 침공계획이 있었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는 백제가 23년만에 신라를 공격한 602년의 전쟁이 왜국과의 협의에 의한 것인 것 같이 서술하여 양국이 오랫동안 군사동맹체제를 유지한 것처럼 기록을 남기고자 백제계 도래인들이 만들어 넣은 조작기사다. 왜국은 신라 연안항로를 이용하여 수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었고,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도 없다.

 다만 적대국인 백제·고구려가 왜국에 왕래하는 것에 대해 신라가 진평왕 24년(602) 이후 어느 정도 제한을 하였을 가능성은 있다.311)신라는 600년∼610년대에 백제·고구려와의 전쟁을 하고 있다. 즉 602년 백제가 23년 만에 신라를 공격한 이후 605년·611년·616년·618년에 양국은 전쟁을 하고 있고, 603년에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 이후 603년·608년에 양국은 전쟁을 하였다. 621년 이후 신라사신들은 고구려·백제의 신라공격을 중지시켜 줄 것을 당에 호소하고 있다. 고구려는 직접 왜국의 越지방으로 항해하는 항로를 이용할 수 있었으나, 신라 연안을 통과하여야 하는 백제는 왜국에 왕래하기가 어려웠다. 백제가 무왕 3년(602)의 觀勒 이후 외교사절로 승려만을 왜국에 파견한 것은 당시 승려가 최고지식인이었던 점 이외에 만약 신라측에 잡혔을 경우에 승려의 신분인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영양왕 11년(600) 수에 조공을 시작하였으나 그 후 중국 북방의 대국 돌궐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고구려를 응징해야 한다는 소리가 隋에서 높아지자, 고구려는 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고구려는 영양왕 13년에 승려 僧隆·雲聰을 왜국에 파견하였고, 영양왕 16년에는 불상 제조용 황금 300냥을 추고천황에게 보냈다.312)≪日本書紀≫권 22, 推古天皇 10년 윤10월 을해삭 기축·13년 4월 신유삭.

 607년 수 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결정하자, 이 원정계획을 알게 된 백제는 일단 수측의 고구려 원정에 함께 참가하기를 요청하였다. 신라는 진평왕 30년(608) 승려 圓光에게 수의 군대를 요청하는 乞師表를 짓도록 하였다. 한편 왜국은 추고천황 15년(607) 小野妹子(오노노이모코)를 수에 파견하여 ‘해뜨는 곳의 천자가 글을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낸다’는 내용의 국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왜국의 태도에 수 양제는 불쾌감을 나타내었으나, 고구려 공격을 위해서는 백제·신라·왜국을 영향권 안에 넣어 두어야 하였기 때문에 소야매자의 귀국시에 裵世淸을 함께 파견하였다. 소야매자의 파견은 수의 고구려 침공계획을 확인하기 위해 백제와 고구려가 왜국조정에 권고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소야매자는 귀국 도중 수 양제가 보낸 답서를 백제에게 빼앗겨 분실했다고 보고하였으나, 사실은 답서의 내용이 왜국을 하위에 놓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소야매자가 파기하였을 가능성이 크다.313)西嶋定生,≪邪馬臺國と倭國≫(吉川弘文館, 1994), 213쪽. 추고천황 16년 9월에도 왜국은 수의 대고구려전 준비상황을 살피기 위해 소야매자를 다시 수에 파견하였다.

 고구려는 영양왕 21년(610)에도 승려 曇徵과 法定을 보내 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고, 신라는 진평왕 32년 가야출신자를 포함한 사신을 왜국에 파견하여 왜국의 정세를 살피고자 하였다. 왜국은 12년만에 파견된 신라사신을 각별히 접대하여 신라와의 우호관계도 유지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진평왕 33년 초에는 수에 군사를 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여 양제의 허락을 얻어내고, 8월에는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의 청병외교가 성공한 것을 알렸다.

 수는 大業 8년(612) 113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공격을 단행하였고, 백제는 수를 돕겠다고 약속하고는 실제로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추고천황 22년에도 왜국은 수의 정세를 살피기 위한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당시 제3차 고구려출병에 대한 반발로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왜국사신은 백제까지만 가서 머무르다가 그 다음해 9월 백제 사신들과 함께 귀국하였다.314)西嶋定生,<七世紀の東アジアと日本>(≪東アジア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5, 學生社, 1981), 21쪽.

 추고조정의 4차에 걸친 견수사 파견은 백제와 고구려의 의향을 반영하여 수의 대고구려전 준비를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 大業 8년(612)부터 3년간 3회에 걸쳐 실시된 양제의 고구려원정은 수의 대패로 끝나고, 수왕조는 반란으로 인해 618년 멸망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대수 청병외교는 실패한 셈인데, 수의 고구려 출병이 실패로 끝난 후 진평왕 38년(616) 신라는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불상을 보내어 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618년 수를 물리친 사실을 알리자 왜국조정은 고구려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315)山尾幸久,<遣唐使>(≪東アジア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6, 學生社, 1982),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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