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
  • 1) 농업
  • (1) 철제 농기구와 우경의 보급

(1) 철제 농기구와 우경의 보급

 삼국시대 신라의 주요한 경제기반은 농업이었다. 농업은 신라인들의 기본적인 생산활동이었고, 상업과 수공업 등 모든 경제활동의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농업에서의 생산증대, 즉 농업생산력의 발달은 당시 사회발전의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신라 초기에는 청동기시대 이래 농업 생산기술의 전통 위에다 철제 농기구를 이용하여 농업생산이 이루어졌다. 청동기 시대인들은 목제의 따비와 괭이를 기초로 농사를 지었다. 1970년 대전 괴정동에서 발견된 이른바「농경문청동기」에는 한 사람이 목제로 보이는 따비를 가지고 규칙적인 고랑과 이랑이 있는 네모진 밭을 가는 모습과 다른 한 사람이 목제 괭이로 땅을 파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서 사용된 따비는 따비날 부분이 상당히 길어 목제 자루의 약 2분의 1 정도이며, 날 부분은 두 갈래로 갈라진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따비는 횡목에 발힘을 가하여 따비날 부분을 흙속에 넣은 다음에 자루를 지렛대를 움직이듯이 움직여 뒤로 후퇴하면서 밭을 가는 데 사용된 것이었다. 그리고 괭이는 갈이작업 이후 땅을 공그르는 작업에 이용되었다. 이외에도 괭이는 파종 후 培土작업·제초작업에도 쓰였고,502)괭이는 묘 사이를 긁어 줌으로써 뿌리의 호흡을 촉진시켜 생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 根菜植物을 수확할 때도 사용되었다. 여기다가 당시는 곡물의 이삭 하나하나를 따는 수확도구로서 반월형석도가 널리 사용되어졌다. 신라 초기에 이르면 이러한 농기구들은 철제로 대체된다.503)최근 경상남도 창원시 다호리 1호분에서 두 종류의 따비가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폭이 좁고 길며 단면이 삼각형을 이룬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폭이 좀더 넓고 짧은 것이다. 그리고 모두 목제 자루가 끼워져 있으며, 자루와 날은 140도 각도로 휘어진 형태로 결합되어 있다(李健茂 외,<義昌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 ≪考古學誌≫1,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89, 22쪽). 그런데 앞의 것은 두 갈래로 갈라진 부분만을 제외하면, 농경문청동기에 보이는 따비와 유사하다. 비슷한 모습의 따비가 삼국 초기의 무덤인 경주 조양동 고분이나 울산 하대 고분군 등에서도 출토되었다. 이외에 신라 초기에 철제 괭이와 鐵刀子도 제작되었다.

 그러나 신라 초기에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목제나 석제 농기구의 이용빈도가 높은 편이었다. 더구나 목제나 석제 농기구는 물론이거니와 철제로 만들어진 당시의 농기구들 역시 효율성이 매우 낮았다. 때문에 파종시기나 수확시기 등 농사철을 제때에 맞추기 위해서는 집중적이고 집단적인 노동력의 투입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사람들의 사회생활도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504)≪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傳의 기록에서 3세기 단계 사람들의 사회생활 모습이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형태를 띠었던 것은 이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4세기 이후 철기 제작기술의 발달에 따라 철제 농기구의 개량이 촉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급도 확대되었다.505)4세기 초부터 주조와 단조방법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硬性·展性을 지녀 충격에 강하고 날 부분이 예리한 농구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였고, 최근에 발견된 경주시 황성동 제철 유적은 製鐵-鑄造-製鋼-鍛冶의 일괄공정을 갖추어서 철제 도구들을 대량으로 생산하였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때 갈이작업에 주로 이용되었던 농구가 U字形 따비였다. 이것은 대부분 길이 약 15∼20cm 내외, 너비 역시 15∼20cm의 크기로서 삽이나 가래의 용도로 사용되었거나 또는 괭이형의 착장구에 연결시켜서 괭이와 같은 용도로 쓰이기도 하면서 주된 용도는 땅을 일구는 것이었다.506)金光彦,<新羅時代의 農器具>(≪民族과 文化≫1, 正音社, 1988), 50∼53쪽.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추정해 본다면, 손잡이와 더불어 밭을 갈 때 발로 힘을 주어 누를 수 있는 횡목을 가로 끼워 만든 자루의 끝에 U자형 따비날을 부착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로 끼운 손잡이를 옆으로 돌린 다음, 뒤로 후퇴하면서 흙을 떠 엎는 형태로 땅을 일구었을 것이다. 이 U자형 따비가 갈이작업에 이용되면서 날이 좁고 긴 따비 종류보다 더 많은 양의 흙을 떠 엎는 것이 가능하였고, 그에 따라서 갈이작업의 효율성도 배가되었다. 이 이외에도 이 시기에는 철제 괭이와 쇠스랑의 보급도 확대되었다.

 한편 이 시기 수확도구상에서의 커다란 변화는 낫의 보급에서 찾을 수 있다. 압록강 중류, 두만강 유역 등의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지에서는 철도자와 낫이 공반 출토되고, 茶戶里 고분 등에서도 그것이 출토된 바 있다. 그러나 삼국 초기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낫은 매우 소수였다. 그러다가 4세기 초 이후 낫은 한반도 전역의 유적에서 고르게 출토된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경상도지역의 경우 4세기 초 이후에는 수확도구 가운데 낫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507)李賢惠,<三國時代의 농업기술과 사회발전-4∼5세기 新羅社會를 중심으로->(≪韓國上古史學報≫8, 1991), 54쪽.

 더욱이 이 때에 이르면 낫의 종류도 날이 곧게 뻗은 것과 약간 곡선을 이룬 형태로 나누어지고 있다. 전자는 날과 나무자루가 직각으로 연결되어져서 주로 곡식을 수확하는 데만 이용할 수 있었고, 후자는 날 부분 전체가 곡선을 이루거나 뽀족한 날 끝 부분만이 안으로 약간 구부러진 형태로서 수확뿐만 아니라 초목을 벨 때에도 사용되었다. 특히 후자와 같은 종류는 곡물이 미끄러지지도 않고, 또 구부러진 부분에 힘이 집중되어 쉽게 절단되는 효과가 있었다. 또 날 끝 부분이 뾰족하고 안으로 구부러져 있어서 다른 한 손이 부상당할 염려가 없었으며 작업시 곡물 사이로 잘 헤치고 들어가 작업능률을 높여 주었다.

 반달칼이나 철도자는 곡물의 이삭 하나하나를 자르는 도구였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량의 수확이 불가능하여 수확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수확에 많은 시간이 걸리면 자칫 때를 놓쳐 이삭이 땅에 떨어지고, 또 완전히 익기도 전에 수확하게 되면 결국은 곡물 건조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또한 그 기간에 부패되기 쉬워서 이전에 아무리 작황이 좋았다 하더라도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낫은 한꺼번에 여러 포기를, 그것도 그루터기를 뿌리째 베어낼 수 있으므로 많은 양의 수확이 가능하여 수확기에 상당한 노동력의 절감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손실을 크게 줄여 주었다. 게다가 짚의 수확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가축의 사료나 연료·퇴비 및 농민의 각종 수공업 재료로서 활용할 수 있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4세기 이후 U자형 따비(갈이작업), 괭이와 쇠스랑(整地作業과 中耕除草作業), 낫(수확작업)의 보급에 따라 농업생산기술에서 진전이 있었지만, U자형 따비 역시 인력을 이용하여 갈이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牛耕은 인력 대신 축력을 갈이작업에 이용하는 방법으로서 의미있는 농업기술상의 발전이었다.

 신라에서는 智證王 3년(502)에 처음으로 우경을 이용하였다고 한다.508)≪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왕 3년 3월. 그러나 이는 일반적으로 우경의 시작을 알려 준다기보다는 국가적 차원에서 우경을 장려한 조치로 이해되고 있다. 실제로 ‘犂耜를 제작하였다’라는 기록이≪三國遺事≫紀異篇 弩禮王條에 보이고 있다. 그리고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 사이의 고구려 군사요충지였던 서울 구의동에서도 V자형의 홈이 파져 있는 보습 4점이 발견되었고,509)崔鍾澤,<九宜洞遺蹟出土 鐵器에 대하여>(≪서울大博物館年報≫3, 서울大, 1991), 28쪽. 6세기 전반경으로 편년되는 진주 옥봉 7호분에서도 너비 27cm의 보습이 출토되었다.

 U자형 따비의 형태에서 간단하게 사람이 끌 수 있는 형태로 전환시켜 쟁기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때문에 우경이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사람이 쟁기를 끄는 人力耕이 갈이작업에 이용되었을 것이다. 물론 우경이 보급된 이후에도 소와 쇠보습을 모두 갖출 수 없었던 농민들도 그러하였다고 보인다. 6세기 중·후반 시기 인력경의 실시를 시사해 주는 자료가 바로 강원도 안변군 용성리 신라계 횡혈식 석실분에서 발견된 보습이다. 이것은 길이 약 24cm, 폭 10cm 정도의 소형으로서 우경보다는 인력경에 쓰였다고 보이기 때문이다.510)金光彦, 앞의 글, 48쪽.

 우경의 이용은 농업생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한 사람이 따비나 인력경으로 밭을 갈 때보다 우경을 행할 때 훨씬 더 넓은 면적의 밭을 가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우경은 개간을 촉진시켰다. 잡초의 뿌리가 깊고 조밀한 상태에서는 따비 종류나 괭이만으로 하는 갈이작업은 상당히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축력을 이용한 우경으로 그 이전 갈이작업이 불가능한 토지까지 개간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한편 축력을 이용하여 갈이작업을 하게 됨에 따라 이제 深耕이 가능해졌다. 심경은 잡초와 병충해 제거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우경의 도입은 경지 이용방식의 효율성을 증대시켰다. 최근에 발견된 하남시 미사리 경작유구를 통하여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제1·제2의 경작유구가 확인되었다. 제1경작유구는 고랑과 이랑 사이의 폭이 70∼80cm 정도로 일정한 편이며, 고랑의 방향은 동서방향이고, 현재 확인된 전체 면적은 1,500여 평에 이른다. 그리고 고랑의 바닥에 30cm 폭으로 작물을 심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에 반해 그 윗층에서 발견된 제2경작유구는 고랑과 이랑을 합한 폭이 약 100cm 가량이고, 그 길이가 약 160m 정도이며, 밭의 총면적은 약 3,000평 정도이다.511)崔鍾澤,<美沙里遺蹟發掘調査>(≪서울大博物館年報≫4, 1992), 40쪽.

 이 경작유구는 오늘날의 밭과 마찬가지로 고랑과 이랑을 약 50cm 간격으로 규칙적으로 만들었던 것이 특징인데, 이렇게 160m에 이르는 고랑과 이랑을 50cm 간격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경의 사용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에 반해 그보다 하층의 제1경작유구는 비교적 넓은 고랑과 이랑을 만들고, 또 고랑 바닥에 30cm 간격으로 작물을 심었던 것으로 보아 우경이 실시되기 이전 경지 이용방식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짐작된다. 발굴보고자는 각각의 경작유구층에서 발견되는 토기와 유물을 통해 제1경작유구를 4∼5세기 단계의 유적으로, 제2경작유구는 그보다 늦은 6세기를 전후한 무렵의 유적으로 편년하였다.

 제1경작유구에서 제2경작유구로의 변화는 파종처의 확대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농법의 발달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에 넓은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 경작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이랑과 고랑을 번갈아 가면서 작물을 파종하기 위한 배려였다는 것이다.512)崔德卿,≪中國古代 鐵製農具와 農業生産力의 발달≫(建國大 博士學位論文, 1991), 180∼192쪽. 이러한 중국의 경우를 참조해 볼 때, 미사리 제1경작유구는 이랑과 고랑을 번갈아 가면서 작물을 파종하였던 단계의 유적으로 여겨진다. 반면 제2경작유구는 전단계보다 고랑과 이랑의 간격을 줄임으로써 토지이용을 극대화시켰던 단계의 유적이었을 것이다. 매년 폭이 좁은 고랑과 이랑을 번갈아서 이용하였다면 常耕도 가능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경이 가능해지면서 지력의 회복기간이 단축된 데 힘입은 결과였다.513)중국의 경우 전국시대에 6尺의 이랑, 6尺의 고랑을 만들어 이랑 위에 작물을 재배하는 방식이 널리 쓰였고, 이후 점차 이랑 위의 파종면적을 늘려 경지이용의 효율화를 증대시키기 위하여 고랑을 3尺, 1尺으로 축소시켜 나가다가 우경이 도입되면서 1척의 이랑, 1척의 고랑으로 田地內의 파종처가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나갔는데, 이는 우경의 도입으로 深耕이 가능해져 지력의 회복기간이 단축된 덕분이었다고 한다(崔德卿, 위의 글, 155∼208쪽).

 한편 우경의 보급은 家戶 단위의 자립적인 농업생산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변화는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私的 소유권의 발달을 촉진시키고, 그들의 계층분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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