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
  • 2) 수공업

2) 수공업

 철기는 청동기와 달리 원료의 채취가 쉽고, 대량 생산이 비교적 용이하였으므로 무기뿐만 아니라 토목공구·농기구 등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 그런데 철기의 제작과 사용은 철광석의 채취·제련·제작과정에서 고도의 기술을 가진 숙련공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採鑛과 철기제작에 종사하는 전문적 匠人集團을 전제로 한다. 초기에는 우수한 제철기술을 보유한 야장이 정치적 지배자로 부상하기도 하였다.517)≪三國遺事≫권 1, 紀異 2의 昔脫解 관련 설화에 석탈해 자신이 야장임을 밝힌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어느 단계부터 정치적 지배자가 정치력을 강화하면서 철기만을 제작하는 전업적인 장인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들은 사로국이나 각 소국 수장층의 철저한 관리와 통제 아래 철기류를 생산하였고, 그 대가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최근 발견된 경주시 황성동 제철 유적은 4세기 단계에 製鐵-鑄造-製鋼-鍛冶의 일괄 공정을 갖춘 제철공방을 중심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518)李榮勳,<경주 황성동 철기제작유구>(≪第34回 全國歷史學大會發表要旨≫, 1991), 372∼379쪽.

 한편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금·은·동 등이 생산되었고, 가공기술도 매우 발전하여, 고대 일본인들은 신라를「金銀의 나라」로 일컫기도 하였다.519)≪日本書紀≫권 9, 神功王后 攝政前紀(中哀天皇 9년 10월). 일반적으로 금·은·동의 원료는 산지가 매우 한정되어 있다. 또 원료의 채취에서 제품의 생산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별로 전문화된 장인 내지 장인집단이 필요하고, 그 집단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일관되게 움직이는 생산조직과 그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세력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금은세공품을 가공할 수 있는 세력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다. ‘민간에서 금은의 사용을 禁한다’라는 기록이520)≪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일성니사금 11년. 말해 주듯이 신라는 귀금속의 사용을 제한하거나 그 생산체계를 통제하였다. 철제품과는 달리 금으로 만든 귀중품은 경주지역 이외의 신라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경상도지역에서는 그 발견 예가 드문 것은521)금제 귀걸이가 대구 내당동과 비산동 고분군, 양산 부부총, 동래 복천동 고분군 등에서 발견되었고, 또 양산 부부총에서는 금제 팔찌가 발견된 바 있다. 이외에 낙동강 동안지역의 경상도지역 고분들에서 발견되는 장식품들은 은이나 금동제가 대부분이며, 그 품질도 경주지역의 것에 비해 저열하다. 이와 관련이 있다. 물론 각 소국마다 金銅製品을 생산하는 체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5세기 초·중엽 이전 시기에 일부 소국에서는 出字形 立飾이 아닌 독특한 형식의 금동관을 제작하였던 사실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522)이러한 형식의 金銅冠은 5세기 초·중엽 이전에 축조된 의성 탑리 고분, 동래 복천동 11호분에서 출토되었고, 성주지역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이후 낙동강 동안지역에서 발견된 금동관이 출자형입식으로 획일화된 현상은523)出字形 立飾의 金銅冠은 동래 복천동 1호분, 창녕 교동 7호분, 경산 임당동 7호분, 대구 비산동 37호분, 양산 부부총에서 출토되었고, 선산지방에서도 그것이 수습된 바 있었다. 그러한 제품들의 생산체제가 신라세력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던 사정을 반영한다.524)全德在,<新羅 州郡制 成立背景硏究>(≪韓國史論≫22, 서울大, 1990), 43∼45쪽. 장신구를 비롯하여 금은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의 대부분은 신라가 직접 제작하여 각 소국의 수장층과 지배층에게 사여한 것이었다고 보인다.525)李漢詳,<5∼6세기 新羅의 邊境支配方式-裝身具 分析을 중심으로->(≪韓國史論≫33, 서울大, 1995), 46∼52쪽.

 5세기 이후 신라의 지방 소국 수공업 생산체계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유물이 바로 토기이다. 토기는 일상적인 용구이기 때문에 신석기시대 이래로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아무나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다가 2∼3세기경 정치권력이 일찍 확립되는 곳에서부터 전업적 토기 생산체계가 갖추어져 陶質土器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토기 제작기술과 양식이 주변지역으로 서서히 전파되는 양상이 보인다.526)李盛周,<原三國時代 土器의 類型·系譜·編年·生産體制>(≪韓國古代史論叢≫2,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1), 294쪽. 4세기 말 이후에 낙동강 동안지역(신라식 토기:성주 포함)과 낙동강 서안지역(가야식 토기)으로 토기의 양식이 분명하게 나누어지는 양상은 신라와 가야의 정치적 영향력이 주변으로 확대되는 과정과 관련이 깊다. 이 때 신라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각 소국들은 신라의 통제를 받으면서 그들 나름대로 각각 도질토기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삼실과 명주실을 섞어 짠 縑布(거친 비단)가 생산되었다. 天馬塚(황남동 155호 고분)에서 나온 섬유질은 대부분 平織과 1/2綾織이고, 浸染에 의한 염색법과 夾纈에 의한 捺染法을 사용한 것으로서 5세기 단계의 직조 및 염색기술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달하였음을 알려 준다.527)金相溶,<遺物을 통하여 본 古代 織物技術-경주 황남동 155號 고분 출토 섬유물의 분석고찰->(≪직물검사≫2-2, 1974), 3∼4쪽. 이 섬유질은 전업적인 수공업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고급 비단으로 추정된다.

 신라 초기의 수공업체계는 6세기 무렵 각 소국의 해체와 그에 이은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새롭게 재편되었다. 中古期에 국왕이나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궁중 자체에서 생산하는 궁중수공업과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는 관영수공업으로 수공업체계가 분화·정비되었는데,528)홍희유,≪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지양사, 1988)에서는 신라의 관청수공업 내에 궁정수공업이 포함된 것으로 분류하였다. 한편 朴南守,<宮中手工業의 成立과 整備>(≪東國史學≫26, 東國大, 1992)에서는 궁중수공업을 관영수공업과 구별되는 국왕 직속 內省 산하의 수공업 경영형태로 이해하였다. 이 가운데 궁중수공업의 정비는 內省의 설치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眞平王 44년(622)에 金龍春을 內省私臣에 임명하고, 大宮·梁宮·沙梁宮을 관장하도록 하였다.529)≪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평왕 44년 2월. 진평왕 7년부터 3궁에 각각 私臣을 두어 관장케 한 바 있는데, 내성사신의 설치는 3궁의 관리체계를 일원화하겠다는 의도의 반영이다. 아마도 이 때 궁중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수공업 계통의 관청들도 체계적으로 정비되었을 것이다. 내성 관하에는 106개의 관청들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수공업과 관련된 관청은 약 30여 개이다. 직관지에 전하는 내성 관하의 수공업 관청들과 그 업무를 정리하면<표 2>와 같다. 내성 관하 수공업 관청 가운데 어느 것이 중고기에 설치된 것인지를 가려내기는 어렵다. 일단 여기서는≪삼국사기≫직관지의 내성 관하의 관청 가운데 수공업 관청을 모두 망라하였다.

 직관지에는 내성 관하 수공업 관청의 운영체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각 관청의 직능을 통하여 대략적인 내용을 추론해볼 때 일부 제품의 경우는 분업화된 생산체계를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직물류의 생산과 관련하여 누에고치에서 실을 켜는 일을 담당한 䟽典, 精練한 후에 표백을 맡은 漂典, 염색을 담당한 染宮과 紅典, 직조 후 印染을 맡았던 攢染典, 직접 織品을 만드는 錦典과 朝霞房·綺典 등 원료의 채취에서부터 완제품 생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생산공정을 갖추었음을 살필 수 있다. 가죽제품의 생산에서도 皮典-打典-鞦典-皮打典-鞜典·靴典 등 서로 연관되는 분업체계를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530)朴南守,≪新羅手工業史≫(신서원, 1996), 109∼112쪽. 이외에 다른 제품의 경우에는 일련의 생산공정을 추론할 수 있는 분업체계는 보이지 않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貢賦의 형태로서 보완하였다고 추정된다. 궁중수공업은 신라 수공업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국왕을 비롯한 왕실과 일부 진골귀족들의 사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폐쇄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전반의 수공업 발전 수준과 괴리를 보이기도 하였다.

官 廳 名 改 名 職 能
朝 霞 房   朝霞紬(고급비단) 생산
染 宮   염색작업과 염료제조
䟽 典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일
紅 典   붉은 염색물 취급
蘇 芳 典   蘇木을 길러 붉은 물감을 채취하는 일
攢 染 典   옷을 염색하는 일
漂 典   표백 담당
倭 典   일본과의 무역에 필요한 수공업품 제조
錦 典 織 錦 房 고급비단 생산
鐵 鍮 典 築 冶 房 각종 철기와 유기의 생산
漆 典 飾 器 房 각종 그릇의 옻칠 담당
毛 典 聚 毳 房 모직물 제작
皮 典 鞄 人 房 가죽제품 생산
鞦 典   마구에 쓰이는 가죽제품 생산
皮 打 典 䩵 工 房 각종 가죽 북 제조
磨 典 梓 人 房 각종 목공품 제조
鞜 典   가죽신 제조
靴 典   가죽장화 제조
打 典   가죽제품의 무두질 관계
麻 履 典   각종 미투리(삼신) 제작
麻 典 織 房 局 각종 의복 제조와 천 짜기
曝 典   각종 제품을 햇볕에 말리는 일
阿 尼 典    
綺 典 別 錦 房 고급비단 생산
席 典 奉 座 局 돗자리를 비롯한 자리 제조
机 槪 典 机 盤 局 밥상, 책상, 탁상 등 제조
楊 典 司 篚 局 각종 광주리 제조
瓦 器 典 陶 登 局 각종 도기와 벽돌, 기와 등 제조
南 下 所 宮 雜 工 司 각종 특수한 수공업품 제조
針 房   의복과 자수품 제조

<표 2>궁중수공업 관청

 한편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생산하는 관영수공업은 국가조직의 분화가 미숙한 단계에서는 독자적인 영역으로 존재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6세기 이후 신라가 중앙과 지방행정조직을 정비하면서 각 행정조직에 필요한 수공업 제품들의 수요가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관영수공업이 궁중수공업 체계와는 다른 체계로서 분리되었던 것이다.

 수공업 관계 행정부서로서 대표적인 것이 工匠府이다. 신문왕대에 공장부의 장관과 차관급인 令과 卿이 두어졌다 하더라도 그 하급 실무관리인 主書는 眞德王 5년(651)에 설치되었으므로 중고기에 이미 관영수공업을 관장하는 조직이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병장기와 선박의 제조를 담당하던 兵部, 선박제조 등을 관리하던 船府, 국왕의 의장용 수레와 말을 관리하고 수레의 제작과 마구 등을 생산하는 수공업관청을 관리하던 乘府, 수도 경주의 성을 축조하거나 수리를 책임지던 六部少監典 등이 수공업과 관련된 관청들이다.

 관영수공업은 크게 보아 관청이 직접 관리하는 수공업공장에서 그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거나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장인들에게 貢賦의 형태로 바치게 하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고 추정된다. 전자와 관련하여 수공업자들의 집단거주지로서 成의 명칭을 지닌 지명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검을 제작하던 寶劍成, 금을 생산하던 麗金成, 비단을 생산하던 進錦成과 濯金成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531)홍희유, 앞의 책, 7∼10쪽. 수공업자의 집단거주지는 신라가 각 지방 소국을 州나 郡·村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각 소국의 일부 장인들을 집단적으로 거주케 한 것에서 기원하지 않았나 한다. 물론 삼국통일 이후에도 백제나 고구려 계통의 장인들을 그와 같은 곳에 거주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이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신분은 6두품인 强首와 釜谷(가맛골)에 사는 冶匠의 딸이 결혼한 것에서 보듯이 천민이 아니라 양인신분이었다.532)폐쇄적인 신분제사회인 신라시대에 야장의 자식과 6두품 신분이 결혼하였다는 것은 야장이 천민이 아닌 양인신분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들 지역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국가의 직접적인 관리와 통제를 받았을 것인데, 이러한 점에서 관청에서 요구하는 물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공장이 바로 이들 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중고기에는 민간수공업도 분화되고 발전하였다. 우선 이 때 지방사회에서 전업적으로 수공업에 종사한 장인으로서 匠尺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외위를 수여받은 지방사회의 지배층이었다. 초기에 각 소국 수장층의 보호와 관리를 받던 이들은 6세기 이후에 각 촌에서 필요한 철제품이나 각종 수공업제품들을 자립적으로 생산한 다음 그것을 판매하여 상당한 경제적 富를 축적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장척층이 지방사회에서 이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감안해서 국가는 그들에게 외위를 수여하고 지방사회의 지배자로서 인정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533)全德在, 앞의 글, 30∼33쪽. 국가는 대신 이들에게 부역의 의무를 부과시켰다. 그 의무로는 南山新城의 축조에서 보이는 것처럼 일정 기간 축성이나 중요한 건축물 조성 등의 요역에 동원되는 경우, 관영수공업 공장에 일정 기간 노역으로 동원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만든 수공업 제품을 대신 바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534)일본 고대국가의 율령 조항에 백성들에게 賦稅로서 철제품을 바치게 한 규정이 있다(原島禮二,<8世紀における鐵の生産と流通>,≪日本古代社會の基本構造≫, 未來社, 1968, 390∼397쪽). 이 당시 지방사회에서는 장척 이외에 다양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존재하였는데, 비문에 보이는 雜工·工人·面石捉人·小石捉人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도 장척과 마찬가지로 외위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일부는 귀족 개인들의 수공업공장에서 일하였다. 중대에 황룡사의 종을 만든 사람이「里上宅下典」이었는데,535)≪三國遺事≫권 3, 塔像 4, 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鐘. 여기서 이상택하전은 33金入宅 가운데 하나인 里上宅에 예속된 장인을 말한다. 당시 재상가에는 奴僮이 3천명이 있었고, 甲兵과 牛·馬·猪도 그와 비슷한 숫자가 있었던 것에서 보듯이536)≪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 유력귀족들은 독자적인 수공업 공장을 차리고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무기들을 생산하였다. 후대의 경우를 통해서 미루어 볼 때, 중고기의 귀족들도 그러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라시대에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된 것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직조물이었다.≪梁書≫에는 신라에 ‘뽕나무와 삼나무가 많았으며, 縑布(거친 비단)를 짰다’라는 내용이 전한다.537)≪梁書≫권 54, 列傳 48, 諸夷 東夷 新羅. 그리고 신라 초기에 6부 여자들이 길쌈경기를 하기도 하였다.538)≪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유리니사금 9년. 麻布는 백성들의 일상적인 옷감이었던 만큼 그들은 이것을 주로 자급자족적인 가내수공업으로 조달하였다. 그리고 마포는 초기부터 국가의 과세대상이기도 하였다. 당시 직조에 쓰인 방직기구는 고구려 쌍영총 고분벽화「직녀도」에서 보듯이 베틀의 구조와 바디·북·잉아 모양들이 조선시대에 흔히 쓰던 것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539)홍희유, 앞의 책,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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