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
  • 3) 상업

3) 상업

 삼한에서는 중국의 郡縣·倭 등과 국제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三國志≫에 의하면, 변한지역에서 생산된 철은 韓·濊·倭뿐만 아니라 중국 군현에 공급되었고, 이 때 그것은 교환수단으로서 돈과 같이 사용되었다고 한다.540)≪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弁辰. 당시에 삼한 각 소국 간에도 교역이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당시 교역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유물이 실물화폐의 용도로서 사용된 鐵鋌이다. 철정이 발견된 고분들은 크기나 규모, 부장유물의 성격 등으로 보아 각 지역의 수장층이나 최고 지배층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541)林孝澤,<副葬鐵鋌考>(≪東義史學≫2, 東義大, 1986), 3쪽. 이와 같은 고고학적 증거는 당시 철정이 수장층과 일부 지배계층에게만 집중되었던 사실과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주로 각 소국이나 읍락의 지배층들을 중심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던 사정을 반영한다.

 그리고 3세기 단계에서 고구려가 漢 郡縣과의 경계지점에「幘溝漊」를 설치하여 중국과의 대외적인 교섭과 교역을 일원화하였다거나542)幘溝漊는 고구려 중앙정부에서만 中國 郡縣과의 대외교섭을 가질 수 있도록, 즉 대외교섭 창구를 일원화하기 위하여 현도군과의 경계지점에 설치한 교역지점을 말한다. 倭의 女王國(邪馬臺國)이 여러 소국에 관리를 파견하여서 교역을 감시하도록 하였던 예에서543)≪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倭. 보듯이 당시 사로국도 통상적인 교역루트를 장악하여 각 소국 사이의 교역행위를 통제하거나 감시하였다. 사로국이 일찍부터 낙동강 하류 수로교통의 요지인 양산의 黃山津을 장악하고 경상도 내륙지방과 백제·고구려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계립령과 죽령을 개통하여 그 곳을 통제하고,544)≪三國史記≫ 권 2, 新羅本紀 2에 보면 阿達羅尼師今 3년과 5년에 각각 鷄立嶺路와 竹嶺을 열었다고 한다. 주요 교통로나 변방지역에 성을 쌓은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이 때 사로국은 교통의 요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소국 자체뿐만 아니라 각 소국과 소국 사이의 교역까지도 감시케 하였는데, 양산지역에는 5세기 전반에 朴堤上을, 그 전에 대구지역에 위치한 達伐城에는 城主로서 克宗을 파견한 바 있었다.545)全德在, 앞의 글, 13∼15쪽.

 그러나 신라 초기에 각 소국이나 읍락 사이의 교역이 활발하였던 것에 반하여 각 소국이나 읍락집단 내부의 교역은 미미하였던 것 같다. 이 당시 각 소국은 國邑과 邑落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읍락에는 공동체적인 관계의 유제가 강고하게 잔존하여 국읍의 主帥가 읍락에 雜居할 만큼 수장층의 정치적 지배력은 여전히 미약한 형편이었다. 동예에서는 타읍락집단과의 어떠한 접촉도 허용하지 않는 강고한 폐쇄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공동체적인 관계의 유제가 온존된 사회에서는 그들 내부 성원 사이의 교역은 거의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일상 생활용품들은 자급자족적인 형태로 조달되었기 때문이다. 읍락 내부에서 교역이 활발해지기 위해서는 사회분화가 좀더 진전되어 그 내부의 계층분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만 한다.

 신라 초기의 상업은 6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그 양상이 새롭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 변화의 계기는 4∼6세기에 걸친 농업생산력의 발달이었다. 이것은 각 소국이나 읍락집단들을 신라의 州나 郡·村으로 재편하는 動因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초기에 성행하던 각 소국 사이의 교역체계는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다 농업생산성의 증대는 교환경제의 발달을 촉진시켰다.≪삼국사기≫에서는 炤知麻立干 12년(490)에 신라가 처음으로 시장을 개설하였다고 전한다.546)≪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소지마립간 12년 3월. 이어서 지증왕 10년(509)에도 경주에 東市가 개설되고, 아울러 그것을 관리하는 市典이 설치되었다.547)≪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에서는 지증왕 10년에 東市만을 설치하였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같은 책 職官志에서는 東市典을 설치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그 설치 연대 또한 신라본기와 달리 지증왕 9년이라고 하였다. 이를 볼 때 지증왕 10년을 전후하여 동시와 그것을 관리하는 시전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주는 각 지방에서 바치는 조세와 공물이 집중되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귀족들이 거주하던 곳이었으므로 그만큼 교역의 수요가 풍부한 지역이었다.

 이처럼 6세기 이후 교환경제가 발달하면서 교환수단으로서 철정 대신 布가 널리 쓰이기 시작하였다.548)‘都城 안의 시장 물건값은 布 1匹에 30碩 내지 50碩이었다’라는≪三國遺事≫권 1, 紀異 2, 太宗春秋公조의 기록과 ‘예전에는 絹布 10尋의 길이를 1匹로 하였는데, 이제 그것을 고쳐서 길이 7步, 너비 2尺으로서 1匹로 삼는다’라는≪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5년조의 기록 등에서 布가 교환수단으로서 널리 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포는 이른바「男耕女織」을 하는 일반 농민들이 생산할 수 있는 품목으로 곡물과 함께 국가 조세품목의 하나였다. 따라서 포가 교환수단으로 이용된 사실은 모든 백성들이 바로 교환경제 체제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장에서는 모두 부녀자들이 물건을 사고 판다’라는≪新唐書≫의 기록은549)≪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 통일신라시대에 부녀자들이 거래를 행하던 소규모 시장이 적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자료이다. 위의 기록이 통일기의 사실을 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시장들은 중고기 이래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상거래가 활발하게 진행된 결과를 반영한 것이었다.

 또 일반 백성들의 교환행위는 고리대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본래 고리대는 빈농들에게 사원이나 귀족, 또는 부호농민들이 높은 이자로 곡식을 대여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고리대는 고구려에서는 이미 3세기부터 성행하였고,550)3세기 무렵인 故國川王代에 賑貸法을 실시하였는데, 이것도 일종의 고리대라고 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文武王 9년(669) 고리대 원곡과 이자 탕감조치를 통하여551)≪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9년 2월. 그 이전에 고리대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리대의 성행은 부수적으로 토지매매의 증대와 더불어 계층분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6세기 이후 교환경제의 발달은 운송수단과 교통로의 발달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신라는 訥祗麻立干 22년(438)에 民에게 牛車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쳤으며, 炤知麻立干 9년(487)에는 4방에 郵驛을 설치하고, 官道를 수리하여 운송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육상운송과 더불어 수로를 이용한 운송체계도 정비하였다. 즉 智證王 6년(505)에는 선박 이용제도를 새로이 정비하였고, 문무왕 18년(678)에는 船府를 설치하여 선박운송에 관한 업무를 전담케 하였던 것이다. 이전에는 병부의 大監과 弟監이 그것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운송수단과 교통로의 정비는 일차적으로 각 지방에서 바치는 조세나 공물들의 수송을 더욱 편리하고 빠르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부수적으로 각 지방과 경주 사이뿐만 아니라 각 지방들 간의 교환을 촉진시키는 데도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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