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
  • 4) 토지제도와 조세·요역제도
  • (1) 토지제도

(1) 토지제도

 신라 초기에는 읍락내에 공동체적인 관계의 유제가 온존하였기 때문에 개별 농가의 자립성이 매우 미약하였다. 이 때 각 읍락내의 농민들은 비교적 차별이 없는 상태에서 개별적으로 토지를 점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신라 초기에는 토지소유의 주체들이 뚜렷하게 부각되기 힘들었고, 이로 인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토지제도가 정비되기도 어려웠다. 물론 部나 읍락 그리고 소국의 지배층은 대규모 토지를 노비노동을 이용하여 경작하였다고 추정되기도 하나, 토지의 소유권 자체가 국가 차원에서 법제화된 흔적은 발견할 수 없다.

 신라의 토지제도가 국가적 차원에서 정비된 것은 6세기 이후였다. 4∼6세기 철제 농기구와 牛耕의 보급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발달은 농민들의 계층분화를 촉진시켰다.552)고구려에서는 3세기 무렵부터「力田自給」하는 계층과 더불어 고용농의 존재가 확인되고,<광개토왕릉비>을 통해서「富足之者」가 각 촌락마다 상당수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도 4세기 말부터 유이민의 존재가 발견되며, 5 세기 말에는「游食百姓」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전덕재,<4∼6세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사회변동>,≪역사와 현실≫4, 한국역사연구회, 1990, 30∼40쪽). 이 결과로 읍락내에서는 토지를 둘러싼 소유의 분화 현상이 나타났고, 이러한 현상의 심화는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확립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553)전덕재, 위의 글, 35∼37쪽. 한편 이 무렵에 신라는 이와 같은 사회변동에 대응하여 소국이나 읍락을 해체한 다음, 그 곳을 州나 郡·村으로 재편하여 전국에 걸친 일원적인 수취체계를 정비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국가에서는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한 소유관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국가적 규모에서 비로소 토지제도가 정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554)安秉佑,<6∼7세기의 토지제도>(≪韓國古代史論叢≫4,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278쪽.

 6세기 이후에 정비된 토지제도는 그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전모를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일단 현재 확인되는 토지의 종류로서는 국유지와 사유지, 촌락공유지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국유지에는 왕실직속지와 국가소유지, 사유지에는 농민과 귀족들의 사유지가 있었다.555)사유지는 개인에게 그 소유권이 귀속된 토지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수취대상 토지를 말한다. 왕실직속지는 국가의 수취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에서 사유지로 보기 힘들다.

 먼저 왕실직속지는 내성에서 관리한 토지를 말한다. 문무왕 2년에 왕은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내성 관하로 추정되는 本彼宮의 財貨·田莊·奴僕을 나누어 주었다.556)≪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2년 2월. 본피궁과 마찬가지로 內省私臣이 관장하였던 大宮·梁宮·沙梁宮에도 각각 그에 딸린 田莊이 있었을 것이다. 사량궁의 唱翳倉은 이들 전장에서 거두어들인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또 왕실직속지와 관련된 토지로는 말기르는 목장인 馬阹가 있었다. 문무왕 9년에 왕실은 22곳의 마거를 하사받았다.557)문무왕 9년에 174곳의 馬阹를 官과 관리들에게 하사한 바 있는데, 이 때 왕실을 의미하는 所內가 22곳을 하사받았다(≪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9년 5월). 마거는 섬 등의 변방지역에 산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국가소유지는 국가에서 귀족들에게 下賜한 토지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진흥왕 23년(562) 대가야 멸망에 공을 세운 斯多含에게 진흥왕이 良田을 하사하려 하였다.558)≪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23년 7월.
한편 列傳 斯多含條에서는 사다함이 良田을 거부하고 閼川의 不毛之地를 請하여 사여받았다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문무왕 2년에는 김유신에게 田 500結을 하사하였다.559)≪三國史記≫권 42, 列傳 2, 金庾信. 여기서 양전이라고 표현한다든지 또는 전 500결이라고 서술한 사실에서 사여대상 토지가 이미 경작하고 있는 토지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인물들에게 사여되기 이전에 이들 경작지의 소유 주체는 국가였을 것이다.

 국가소유지의 기원과 관련하여 김인문이 熊川州의 토지를 하사받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560)<聖住寺朗慧和尙塔碑>(≪譯註韓國古代金石文≫3, 1992), 107쪽. 웅천주는 백제의 故地였으므로 김인문이 위의 토지를 하사받은 시점은 백제 멸망 후이다. 당시 일반 농민들의 토지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대로 소유권을 인정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김인문이 하사받은 토지는 백제의 국가소유지나 백제왕실의 직속지, 또는 고위 귀족들의 사유지였다고 짐작된다. 여기서 국가소유지의 확보가 바로 신라가 멸망시킨 나라들의 위와 같은 성격의 토지들을 몰수하는 것에서 연원하였다고 추론해볼 수 있겠다. 물론 백제와 고구려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加耶諸國, 그리고 경상도 각 지역의 辰韓小國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도 그와 같은 토지가 확보되었을 것이다. 초기에는 왕실직속지와 국가소유지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행정조직의 정비와 더불어 이들 토지 역시 왕실직속지와 국가소유지로 구분되었다고 보인다.

 한편 국가소유지 가운데 특수한 토지의 하나로서 변경지대 군대주둔지에 설치한 屯田을 들 수 있다. 통일전쟁이 한창이던 7세기 중반에 신라에서 둔전을 두었음이 확인된다.561)≪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 7월 26일. 그리고<丹陽 赤城碑>에 보이는「佃舍法」은 둔전경영과 관련된 법조항으로 보인다.562)安秉佑, 앞의 글, 319∼324쪽.

 왕실직속지와 더불어 국가소유지가 어떠한 방식으로 경영되었는지 알려 주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원 1세기경 漢人 1,500여 명이 진한인에게 잡혀 노비가 되었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밭에서 참새를 쫓았다고 전한다.563)≪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이 때 노비들 대부분은 소국 수장층의 소유였을 것이다. 따라서 위의 경우는 수장들이 노비노동을 이용하여 토지를 경작하던 당시의 모습을 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로국왕의 직속지에서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경작되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서 6세기 이후 왕실직속지에서도 노비노동을 이용한 농업 경영방식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해봄직하다. 그렇지만 모든 왕실직속지가 그러하였는지는 여전히 숙제로 남겨진다. 물론 국가소유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564)통일신라시대의 官僚田이 佃戶制에 의하여 경영되었다고 본 견해가 있다(李喜寬,<統一新羅時代 官僚田의 支給과 經營>,≪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13, 1992, 74쪽). 이러한 경영방식이 중고기의 왕실직속지와 국가소유지에도 존재하였으리라 짐작되지만, 그 비중이 얼마만큼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소유권이 개인에게 귀속된 사유지는 신라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읍락공동체의 해체과정에서 농민들은 세습적으로 점유하던 토지를 자신들의 사유지로 확보하였다. 국가는 각 읍락이나 촌락에 거주하는 농민들의 토지소유관계를 조사하여 수취의 기준자료로 삼았다고 보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농민들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해 주었을 것이다.565)당시에 量田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각 촌마다 어느 곳의 논과 밭은 누구의 소유라는 정도는 관행상 모두에게 인지되는 사실이었다고 믿어진다. 아마도 국가는 그러한 관행을 그대로 추인해 주었지 않았을까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러한 농민들의 토지는「烟受有田(畓)」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농민들의 토지는 제한적인 범위내에서 증여뿐만 아니라 매매까지도 가능하였다.

 한편 농민들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대규모 사유지를 소유한 주체였다. 귀족들은 우선 국가로부터 토지를 하사받아 대규모 사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귀족들은 대규모 토지를 확보하였을 것이다.566)귀족들의 대규모 토지소유의 연원과 관련하여 신라 초기에 骨伐國王 阿音夫가 사로국에 항복하고 田莊을 하사받은 사실이 주목된다. 초기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 어렵지만, 그러나 한편 이것을 통해 신라국가에 귀속된 각 소국의 수장층이나 지배층들이 국가로부터 그와 같이 토지를 수여받았음을 시사받을 수 있다. 아마도 이 때 신라에서 수여한 토지의 대부분은 원래 소국 수장층이나 지배계층들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귀족들의 대규모 사유지를 田莊이라고 불렀다.

 사유지는 원칙적으로 국가의 수취대상 토지였다. 그리고 이들 토지들은 귀족이나 관리들이 부분적으로 수취권을 행사할 수 있는 食邑地와 祿邑地로도 설정되었을 것이다. 이 때 귀족들은 자신의 대토지가 위치한 지역의 고을을 자신들의 식읍지나 녹읍지로 수여받으려고 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신라에 항복한 金官國王 金仇亥는 김해지역을 식읍지로 수여받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촌락공유지는 阿達城太守가 날짜를 정하여 일제히 성 밖에 나가 麻를 심도록 한≪삼국사기≫의 내용을567)≪三國史記≫권 47, 列傳 7, 素那.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아달성은 말갈의 침입이 잦은 변경지방에 위치하였으므로 위의 조치는 그들의 침입에서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것만이 성민들이 일제히 나가 麻를 심은 이유의 전부였을까. 일반적으로 麻田의 경작은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개별 가호가 독자적으로 그것을 경영하기는 힘들다고 한다.568)마전 경영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安秉佑, 앞의 글, 310∼312쪽이 참조된다. 이와 같은 마전 경영의 특성을 염두에 둔다면, 위의 사실은 城民 전체가 공동으로 마전을 경영한 실례를 보여주는 자료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촌민 전체로 경영되는 토지를「촌락공유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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