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구조
  • 3) 골품제도의 계층 구성
  • (1) 골제-성골과 진골-

(1) 골제-성골과 진골-

 骨制의 원류를 생각할 때 먼저 고려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이 신라왕실의 血族집단이다. 이 집단은 麻立干시대를 통하여 6부 가운데 가장 유력한 탁부(급량부 혹은 양부)와 사탁부(사량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골제의 대상이 된 사회세력을 오로지 왕실 구성원만으로 한정하여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6부 가운데서도 본피부나 혹은 모량부의 지배적인 씨족은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중고시대의 박씨 왕비들 중에는 이 모량부 출신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또한 신라에 병합된 지난날의 유력한 小國들의 지배층 일부도 골제의 적용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법흥왕 19년(532) 신라에 병합된 金官伽耶의 왕족은 사탁부에 편입되면서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이같은 예는 고구려 멸망 후 그 왕족인 安勝의 경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즉 그는 전북 益山에 설치된 報德國의 왕에 임명되어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고 진골 출신의 여성과 혼인하기까지 했다. 보덕국이 해체된 뒤 그는 蘇判 관등을 받았다.

 소위 중고시대에 골제는 성골과 진골의 두 계층으로 나누어졌다.≪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모두 金春秋가 654년 武烈王으로 즉위함으로써 왕통이 종래의 성골에서 진골로 바뀌게 되었다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즉≪삼국유사≫王曆에는 眞平王의 죽음과 함께 성골 남성이 없어져서 그의 딸 善德女王이 즉위했다고 되어 있고, 그 뒤 眞德女王의 죽음으로 성골 왕의 중고가 끝나고 새로이 진골 왕의 下古가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삼국사기≫신라본기 진덕여왕 8년조에도 여왕의 사망 기사에 뒤이어 國人의 말이라고 하면서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28명의 왕들은 성골이요, 무열왕으로부터 마지막 왕(敬順王)에 이르기까지 28명의 왕들은 진골이라는 기사를 덧붙이고 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역사서들은 신라 왕통에 있어서 성골에서 진골로의 변화에 매우 큰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데, 한편 이들 역사서의 초기 기록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李德星은 이같은 견해에 무조건 따르고 있다. 즉 그는 골품제도가 전 사회적으로 조직되지 못한 채 오직 지배층의 建官의 기준이 되었을 뿐, 성골의 단절과 더불어 전면적으로 붕괴되어 갔다고 논했던 것이다.605)李德星, 앞의 책, 48·84·95쪽.

 이같은 이유로 해서 종래 역사학계의 골품제도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도 이 성골로부터 진골로의 왕통의 변화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그 변화의 원인을 탐구하는 일이야말로 곧 골품제도의 본질을 해명하는 것이라도 되는 양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왕족의 骨種인 성골과 진골이 구별되는 事由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성골의 實在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성골과 진골은 실질적으로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으며, 어쩌면 성골은 진성여왕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대에 고대의 王者를 聖王으로 崇尊하는 중국사상의 영향에 의해서 上代의 諸王을 追尊한 것이거나606)池內宏,<新羅の骨品制と王統>(≪東洋學報≫28-3, 1941;≪滿鮮史硏究≫上世 2, 吉川弘文館, 1960, 569∼572쪽). 아니면 선덕·진덕 兩王의 소위 여왕 통치를 정당화할 필요에서 진덕여왕이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 곧 武烈·文武 양왕 때에 성골을 추존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607)武田幸男,<新羅骨品制の再檢討>(≪東洋文化硏究所紀要≫67, 1975), 153∼166쪽.

 하기야 성골의 실재를 부인하기는 쉽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여기에 어떤 역사적 근거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성골 생성의 배경이랄까 그 진골과의 차이를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연구자세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고시대 왕실의 혼인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일단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중고시대 왕비의 아버지에게는 대개 갈문왕 칭호가 붙는데, 진골인 무열왕의 할아버지 眞智王의 왕비 아버지인 起烏公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아 어쩌면 성골에서 진골로의 변화, 즉 신분상의 降等은 혹 母系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는 견해도 있었고,608)今西龍,<新羅骨品考>(≪史林≫7-1, 1922;≪新羅史硏究≫, 近澤書店, 1933, 211쪽).
―――,<新羅骨品 ‘聖而’考>(위의 책, 239∼246쪽).
다만 진지왕의 아들인 龍春(혹은 龍樹)이 성골 신분임이 틀림없는 진평왕의 딸 天明夫人과 혼인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같은 견해에는 따르기 어렵다.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성골은 父系와 母系가 모두 순수한 王種임에 대하여 진골은 그 중 어느 쪽의 한 代라도 非王種의 혈통이 섞인 까닭에 각기 구별된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요컨대 성골의「聖」은 부모 兩系의 혈통이 모두 신성하다는 의식에서 취한 것이고, 한편 진골의「眞」은 한 쪽은 非眞이나 다른 한 쪽이 眞種이라는 의미에서 취했다는 것이다.609)李丙燾,<古代南堂考>(≪서울大論文集≫1, 人文社會科學, 1954;≪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632∼633쪽). 혹은 성골 남성이 ‘盡했다’는 역사서의 기록에 유의하여 骨의 계승이 성골 간의 족내혼으로 한정된 결과 성골이 차츰 감소되어 간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610)三品彰英,<骨品制社會>(≪古代史講座≫7, 學生社, 1963), 192∼200쪽. 한편 무열왕이 중고 왕실의 혼인법칙인 성골 남녀 간의 족내혼을 어기고 파계적으로 금관가야 출신 여성과 혼인한 까닭으로 성골로서의 자격이 부정되었다가 즉위의 실현과 동시에 진골로서 긍정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611)末松保和,<新羅三代考>(≪史學雜誌≫57-5·6, 1949;≪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11∼15쪽). 金庠基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제시하여 놓은 바 있다(金庠基,<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建國大學術誌≫5, 1964;≪東方史論叢≫, 서울大 出版部, 1974, 42∼45쪽 참조).

 이처럼 성골에서 진골로의 변화 문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관점으로 부각된 것이 중고 왕실의 혈족집단 문제였다. 그리고 그것은 족내혼의 문제로부터 혈족집단의 구성원리라는 범위 문제로 새롭게 확대되었다. 즉 성골의 계승에는 直系가 하나의 조건이 되며 무엇보다도 친족집단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무열왕이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된 것은 가야 계통 여성과 혼인했을 뿐 아니라 마침 그가 박씨 왕비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지증왕대로부터 7代째가 되어 소위 7世同一 친족집단의 말단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신라시대에는 7세동일 친족집단이 사회편제의 기본단위였다고 한다.612)金哲埈,<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下(≪歷史學報≫2, 1952), 99쪽.
―――,<新羅時代의 親族集團>(≪韓國史硏究≫1, 1968;앞의 책, 157∼179쪽, 특히 169쪽).
그 뒤 중고시대의 왕위계승 친족집단 구성원리로는 3代 家系說이 제기되고 성골 신분을 유지하는 혈족집단도 역시 이 원리와 일치한다는 견해가 나온 바 있다.613)李鍾旭,≪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嶺南大 出版部, 1980), 148∼162·266∼279쪽. 그러나 진골 신분의 경우 世代數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독 성골 신분에만 그것이 적용되었다는 견해에는 따르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하긴 같은 진골이라고 해도 정치적·사회적 지위에 있어서는 현실의 국왕과의 寸數 여하에 따라 그 우열에 차등이 있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분 자체에 어떤 변동이 발생되는 것은 아니었다.

 왕족의 골제가 성골과 진골로 갈라지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만족할 만한 설명이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문제는 해명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종전과는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같은 의미에서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정치적 차원에서의 파악이다. 즉 7세기 중엽의 선덕·진덕·무열 3王代를 중심으로 한 왕족의식의 변화라는 일반적인 배경에, 다시 직접적으로는 선덕여왕 때의 정치·외교문제가 성골의식을 촉발시켜 마침내 성골이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614)井上秀雄,<新羅の骨品制度>(≪歷史學硏究≫304, 1965;≪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304∼312쪽). 이러한 발상법은 무엇보다도 성골·진골의 문제를「골품 降下」라는 면에서만 추구한 종래의 연구법과는 달리 적극적인 의미에서「성골 생성」의 면에 주목한 참신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선덕여왕 말년에 일어난 상대등 毗曇의 반란(647)을 진압하면서 마침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은 여왕의 후계자로 진덕여왕을 옹립한 김춘추 일파가 진덕여왕을 성골로 떠받들면서 정작 자신은 진골에 머물렀다는 점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성골의 성립은 중고시대 왕실 혈족집단의 分岐化과정에서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진골 최초의 왕인 무열왕의 가계집단을 보면 그 시조가 진흥왕의 次子인 眞智王이고, 한편 이와 對蹠的인 위치에 있던 가계로서는 진지왕의 맏형인 銅輪太子系가 상정된다. 진지왕은 동륜태자가 진흥왕 33년(572) 3월에 죽자 어린 조카 白淨을 제치고 즉위했으나, 재위 4년째 되는 해에 和白회의의 결의에 의해서 폐위되었다. 백정이 즉위하여 진평왕이 되었는데, 당시는 국가불교의 고조기로 진평왕은 자신의 가족 이름을 釋迦의 가족 이름에서 고스란히 빌려올 정도로 가계의 신성화 작업에 집착했다.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성골은 바로 이 동륜태자의 직계 卑屬으로 구성된 왕실의 小家族집단이 일반 내물왕계 왕족의 진골 신분과 구별되는 상급 신분으로서 스스로 주장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생각된다.615)李基東,<新羅 奈勿王系의 血緣意識>(≪歷史學報≫53·54, 1972; 앞의 책, 31∼35쪽). 이 점 성골의 개념이 불교 공인 후 불교의 종교적 신성 개념에서 도출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는616)丁仲煥,<新羅 聖骨考>(≪李弘稙回甲紀念 韓國史論叢≫, 新丘文化社, 1969), 33∼52쪽. 참고할 만하다. 皇龍寺 丈六尊像·9층탑과 더불어 이른바 신라 3寶의 하나로 전해 내려오는 金玉으로 장식한 국왕의 寶帶는 본디 진평왕이 쓰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사람들이「天賜帶」617)≪三國遺事≫권 1, 紀異 2, 天賜玉帶. 혹은「聖帝帶」618)≪高麗史≫권 2, 太祖 20년 5월 癸丑.라 불렀다는 것도 성골의식의 발생을 암시하는 한 자료로 볼 수 있다. 삼국간의 항쟁이 한창 치열하던 국가 비상시기에 진평왕의 딸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의식에 힘입은 바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당시 신라인들은 여왕에게「聖祖皇姑」619)≪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선덕왕
≪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傳.
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한다.620)李基東, 앞의 글(1982), 142쪽.
辛鍾遠은「聖祖皇姑」를 “신성한 祖先의 皇統을 이은 여인”으로 풀이하고, 이 칭호를 당시 신라인의 성골 관념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간주한 바 있다(辛鍾遠,<‘三國遺事’ 善德王知幾三事條의 몇가지 問題>,≪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17, 1996, 45∼48쪽 참조).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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