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Ⅵ. 가야의 성립
  • 4. 가야연맹의 형성
  • 1) 가야연맹의 성립

1) 가야연맹의 성립

 김해 가락국(구야국)을 비롯한 12개의 변진 소국들이 언제 연맹체를 결성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三國志≫魏書 韓傳을 통하여 3세기 중엽에는 연맹체를 형성한 상태에 있었다고 추정할 정도이다.

 우선 변진은 진한과 雜居하고 또한 성곽이 있으며 의복과 거처가 진한과 같고 언어와 법속도 서로 비슷하나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변진은 지리적 위치나 민족적·문화적 성격에서 진한과 비슷하나 신앙습속 즉 정치적 태도면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진은 서로 구분되는 정치집단이었다. 그런데 그 진·변한 24국 중의 12국, 아마도 변진 12국이 진왕에게 속했다고 하는데, 그 속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런데 진왕은 늘 마한인이 되어 여러 세대를 이어왔으며 진왕은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마한의 진왕이 마한 54국뿐만 아니라 변진 12국을 대표하는 존재이지만 독점적인 지배권력을 배경으로 유지되는 지위라기보다 소국 臣智들의 선출에 의하여 결정되는 존재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 마한조에 진왕은 目支國을 다스리고, (목지국의) 신지는 때로 우월을 더하여 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의 칭호를 일컬으며, 그 관리에는 魏率善邑君·歸依侯·中郞將·都尉·伯長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진왕이 실질적으로는 목지국의 신지에 불과하나 중국과 교섭 때에 삼한 소국들의 대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칭호와 여러 擬制的인 관리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진왕의 관리라는 사람들 중에 위솔선읍군 내지 백장 등은 소국 신지와 같은 군장 또는 그 이하 규모 읍락의 小군장들을 의미하니, 이들은 평상시에 각기 독립적으로 낙랑·대방과 교역하지만 의제적으로는 마한 진왕에 소속한 관리임을 내세웠던 듯하다. 이는 중국 군현과 대등한 크기의 교역 주체를 내세우기 위해 韓 소국들이 만들어내고 유지해 오던 제도였을 것이다. 중국인들도 진왕이 목지국을 다스리는 신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교역의 편의상 그대로 왕의 예우를 인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목지국 신지가 때로 우월을 더하여 칭한다는「신운견지보·안야축지·분신리아불례·구야진지렴」의 칭호는 마한계 臣雲·濆臣離兒 2개 국과 변진계 安邪·狗邪 2개 국 신지들의 직위를 의미하는 것인데, 낙랑과의 교역문서 등에서 진왕이 마한 및 변진 12국 전체를 대표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 4개 국 군장들의 동의를 얻어 그들의 직함을 聯名하여야 했던 것이다.714)金泰植,<加耶의 社會發展段階>(韓國古代史硏究會 編,≪韓國古代國家의 形成≫, 民音社, 1990), 68∼69쪽. 진왕이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던 이유도 결국은 이들의 선출 또는 동의를 필요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晋書≫四夷傳에 마한의 교역 사실은 보이는데 변한의 교역 사실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對중국교역상의 이러한 외형은 적어도 3세기 후반까지는 지속되었던 듯하다.

 또한 목지국 진왕이 상대적으로나마 다른 소국들에 비하여 권력이 우월하였다는 흔적을 문헌상으로나 유적상으로나 찾을 수 없어서 목지국의 위치조차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진왕은 원래 진국의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세형동검 문화단계에는 비교적 韓諸國 전반에 대한 우월성을 유지한 적이 있으나, 철기문화가 보급된 2∼3세기에는 이미 그 지위가 종교적·상징적인 명분을 가지는 대표자의 지위로 전락하고, 실제로는 신운국·분신리아국과 안야국(함안)·구야국(김해)이 각각 마한 및 변진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변진 12국은 명분상 진왕에 소속되었지만, 실제로는 구야국·안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정치적으로 진한과 구분되면서 한·예·왜·2군과 교역하는 등 독자적인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인들로부터 韓에는 마한·진한·변한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인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삼국사기≫신라본기의 초기 기록에 가야국(또는 금관국)이 신라의 주요 경쟁상대로 나타나는 점, 김해지역에 1∼4세기의 유물·유적이 풍부하게 출토된 점 등으로 보아 안야국보다는 구야국이 좀더 우월하였을 것이고, 그런 상대적인 차이가 후대인의 인식에 남아≪삼국유사≫의 수로왕 신화와 5가야조에 김해 중심 6가야연맹의 전승을 남기게 하였을 것이다. 위의 여러 가지 증거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면, 여러 가지 한계성이 있기는 해도 3세기 전반에 변진 12국은 김해의 구야국(가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변한소국연맹 즉 전기 가야연맹을 이루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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