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2. 가야연맹의 약화
  • 4) 백제의 구례모라성 축성과 안라 경영

4) 백제의 구례모라성 축성과 안라 경영

 기능말다간기가 倭使 모야신을 중재인으로 삼아 웅천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김해·창원일대의 국제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을 때, 모야신은 이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백제·신라에게 의구심만 안겨 주었으며, 신라의 남가라 침공에 대해서도 물러나 관찰만 하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창원의 탁순국은 모야신이 왜지에서의 대표성도 없고 문제해결 능력도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쫓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모야신은 久斯牟羅(창원)에 두 해 동안이나 머물러 있으면서 그 곳에 자기 세력을 부식시키려고 획책하였다. 그리하여 탁순국 아리사등은 이번에는 왜인 사신을 제외시키고 탁순·백제·신라의 3자협정으로 지역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여, 신라·백제에 각기 사신을 보내 왜세력 배척의 명분으로 약간의 군사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안라의 걸탁성까지 진주해 있던 백제가 선수를 쳐서 背評(위치 미상)에서 모야신을 공격하였으며, 모야신은 여기서 패배하여 다시 구사모라로 쫓겨 들어왔다.732)이 해에 毛野臣은 倭使는 倭地로 돌아가는 도중 對馬島에서 죽었다고 한다(≪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24년 是歲).

 백제는 이 기회에 탁순국까지 점령하여 신라에게 선점당한 해운교역 주도권을 차지하고자 탁순국 자체를 공격하여 그 북방의 久禮牟羅(칠원)에 성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군을 하였다. 그리고 그 곳까지의 통로를 확보하면서 신라로부터의 반격에 대비하고자 그 근처의 騰利枳牟羅·布那牟羅·牟雌枳牟羅·阿夫羅·久知波多枳 등 5성을 함락시켰다. 그 결과는 탁순국 자체의 멸망이 아니라 그 주변 요지인 久禮山 5성에 대한 백제의 축성과 군대 주둔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안라에서의 경우처럼 백제의 상투적인 수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백제는 일단의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터전으로 삼아 탁순국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지속적으로 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가야 서남부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켜서 신라의 진출을 일단 억제한 백제는 530년대 후반의 어느 시기에 안라에 친백제 왜인관료 印岐彌를 파견하여 이른바「任那日本府」즉「安羅倭臣館」을 설치하였다.733)≪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5년 3월 및 11월. 백제는 아마도 자기 나라에 온 왜국사절인 인기미를 포섭하여 왜에 가까운 안라의 館舍에 주재케 한다는 명분으로 일을 추진하였으되, 그에게 맡긴 직무는 백제와 왜왕조 사이의 통상적인 교역의 대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백제는 성왕 12년(534)에 구례모라성(구례산 5성)을 축조하여 탁순에 압력을 넣을 수 있게 된 계기를 맞이하여, 5세기 후반 이래의 대왜교섭 부진을 만회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 예상된다. 그러면서도 당시 화친관계에 있던 신라나 해당 지역에 있는 가야 제국으로 하여금 강한 거부감을 가지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백제는 가야연맹 남부 제국의 새로운 영도자로 대두할 가능성이 있는 안라에 친백제계 왜인들이 상주하는 기구를 설치하고, 그를 매개로 하여 대왜교섭에 유리한 卓淳路를 설치 운영코자 하였다. 그것이 백제가 안라에 인기미를 파견한 이유이고, 그 시기는 백제의 가야 남부지역 공략이 일단 완료된 성왕 12년(534) 이후 그리 멀지 않은 때였을 것이다.

 한편 백제의 구상은 안라를 비롯한 가야연맹제국의 독립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보이므로, 안라를 비롯한 가야 남부 제국과 왜국의 입장에서 볼 때도 그와 같은 구상이 그리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안라 동쪽의 구례모라성에 백제군대가 주둔해 있는 상태에서는 부득이한 일이라고 보아 안라는 백제의 조치에 대하여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왜국과는 거의 무관하게 백제의 의도와 안라의 부응에 의하여 안라왜신관이 성립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성립 당시의 안라왜신관은 안라에 위치하는 왜국사절 주재관의 명분을 지니되 실제적으로는 친백제계 왜인들로 구성된 백제·왜 사이의 교역기관, 다시 말하자면「백제의 대왜무역 중개소」와 같은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럼으로써 백제는 안라·탁순을 거쳐 왜로 통하는 교역로를 잠정적으로 확보하고, 그러한 교역을 빌미로 하여 신라와의 마찰을 피하고 가야지역의 동향을 감시하면서 백제에 가까운 지역인「任那之下韓」에 郡令·城主를 파견하여 행정구역화해 나갔다. 여기서 임나의 하한이란 경남 서남부지역의 하동·산청·함양 일대에 해당하며, 군령·성주의 성격은 백제의 지방 군현을 통치하는 지방관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리하여 후기 가야의 남부지역 소국들은 백제·신라의 분할 점령으로 인하여 거의 소멸되었으리라고 보인다. 다만 신라에게 병합된 가야 동남부지역의 탁기탄·남가라는 그 자립성을 잃고 군현으로 편제된 것에 비하여, 백제에게 점령당한 가야 서남부지역의 구례모라성 서쪽의 소국들은 자립성을 보유한 채로 백제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된 것에서 차이가 난다. 다만 그 상태에서 백제는 가까운 하동·함양·산청 등지를 서서히 행정구역화해 나가고 있었다.

 대가야 중심의 후기 가야연맹은 5세기 후반 이후 6세기 초에 걸쳐서 세력을 떨치며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아직 그 영역을 제도적으로 정비하지 못한 6세기 전반에 들어와 그보다 고대국가 성장도가 우월한 백제·신라의 조직적인 침투에 의하여 분열되어 그 남부 제국을 잃었다. 그 결과 후기 가야연맹은 남부지역의 영토 및 주권이 축소되는 과정 중에 약화되어서「가야」로서의 통합 움직임은 상당한 타격을 입고만 것이다.

<金泰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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