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2. 대백제관계의 심화와 부용외교
  • 2) 야마토왜에 대한 군사기지 제공

2) 야마토왜에 대한 군사기지 제공

 내륙의 탁순이 366년 야마토왜와 관계를 맺고 백제와의 관계를 중개함으로써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었던 야마토왜와의 관계가 탁순이 중심이 된 관계로 바뀌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대로다. 그런데≪일본서기≫신공기 49년조에 의하면 369년 탁순을 근거로 한 백제의 가야 7국 평정군에 야마토왜의 沙沙奴跪(사사나코)가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탁순과 야마토왜의 366년 이래의 단순관계가 이 때에 와서 군사관계로 전환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야마토왜가 탁순을 근거로 한 백제의 가야 7국 평정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지리적으로 보아 한반도 남부의 금관가야를 통과해야 하는데 평정의 대상인 가야 7국 중의 하나인 금관가야가 야마토왜의 가야 7국 평정군 참여를 좌시할 턱이 없다. 그리고 만약 평정대상인 가야 7국 중의 하나인 금관가야가 야마토왜의 통과를 용인했다면 백제의 가야 7국 평정에 협력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백제와 금관가야의 상하관계는 백제의 가야 7국 평정의 결과로써 성립된 만큼 그런 이야기는 성립될 수 없다.

 ≪일본서기≫신공기 62년조에 보이는 382년 야마토왜의 고령가야 침략을 사실로서 인정하여 당시 야마토왜가 남부가야 및 내륙의 고령가야까지도 그 세력하에 넣고 있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790)田中俊明은 이 내용이 442년의 사실로 ‘이전부터 우호관계에 있던 금관 내지는 안라국을 발판으로 해서 독자적으로 대가야에 진출하여, 거기에 패권을 확립하려고 했으나 대가야의 구원요청을 받은 백제의 공격에 의해서 실패했다’고 하여 가야를 구원한 것이 백제인 점은 인정하고 있으나, 이 사건을 야마토왜가 가야지역에 패권을 확립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田中俊明,≪大加羅聯盟の興亡と任那≫, 東京;吉川弘文館, 1992, 97쪽). 그러나 이는 그 이전에 야마토왜가 금관가야나 안라가야 등 한반도 남부지역을 이미 그 세력권하에 넣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으로서 가야 7국 평정이 야마토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설과도(위의 책, 87쪽) 모순된다. 그리고 백제가 이미 가야 7국과 상하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 기사에서도 야마토왜가 사사나코를 파견했기 때문에 야마토왜에 구원을 청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구원을 백제에 청했다면 사사나코로 표시된 사람을 파견한 나라도 백제가 되어야 하는 점이나 지리적인 관계 등으로 보아 가야를 친 나라를 야마토왜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369년의 가야 7국 평정이 야마토왜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나 기존의 임나경영설을 전제로 한 것으로서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382년 야마토왜가 고령가야를 침략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366년 이래의 야마토왜에 대한 탁순의 단순한 중개자로서의 관계는 그 후에도 별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400년과 404년 야마토왜와 고구려의 싸움에서 고령가야가 야마토왜에게 대고구려전의 전진기지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5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야와 야마토왜와의 366년 이래의 단순관계가 군사관계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의 남하는 가야 제국에게도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가야 제국은 야마토왜의 대고구려전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서 고령가야와 야마토왜와의 관계가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정치적 협력관계로 발전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고령가야와 야마토왜와의 관계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고 가야와 백제와의 관계에서 결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때의 가야와 야마토왜와의 관계는 가야와 백제와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종속적인 관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야마토왜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한 것이 고령가야라는 사실은 고령가야가 백제와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야마토왜와의 관계에서도 탁순을 대신해서 가야 제국 중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도 고령가야의 주체적 역량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의 국제정세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고령가야가 중심이 된 가야의 대외관계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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