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Ⅸ. 가야인의 생활
  • 1. 산업의 발달
  • 2) 후기 가야시기

2) 후기 가야시기

 4세기에 들어와 한반도 북부에서 한 차례의 정치적 파동이 일어나고 그 여파는 한반도 남부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된다. 4세기 초의 고구려에 의한 樂浪郡·帶方郡의 점령은 전기 가야에 있어 해상교역 기지의 상실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였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친 고구려의 가야지역 정벌로 인해 다시 한번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처럼 4세기부터 5세기 초까지의 일련의 정치적 파동은 가야사회에 몇가지 변화를 초래하였다. 우선 전기 가야의 중심이었던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역은 큰 타격을 입어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잃게 되었으며, 그 세력의 일부는 주변의 가야지역으로 이동하여 후기 가야사회를 형성시키는 데 기여하였다고 보아진다. 이에 반해 당시 가야지역내에서도 후진지역이었던 고령을 중심으로 한 거창·함양 등지의 내륙 산간지역은 전화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토착세력을 기반으로 착실한 성장을 이루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가야지역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신라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였던 성주·창녕 등지의 가야세력은 신라의 세력권 아래로 점차 잠식되어가는 현상을 보였다고 추측된다.

 당시의 경상 내륙 산간지방은 5세기 초의 전화도 입지 않았고 게다가 최상의 농업 입지조건을 안정적으로 영유하고 있었으므로 이곳에 철기·토기 등의 선진문화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유이민들이 들어오면서 농경사회 전체의 발전속도가 그 이전보다 가속화되어 나갔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827)金泰植,<後期加耶諸國의 성장기반 고찰>(≪釜山史學≫11, 1986), 15쪽.

 경상 내륙 산간지방에서의 농경문화 전통이 경상 해안지방보다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고령 良田洞·山淸 江樓里·晋州 大坪里 유적에서 보이는 볍씨자국의 무문토기편에서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김해지방은 삼각주 평야지대로 농경에 적합한 지대로 이용되고 있지만, 낙동강의 대규모 제방이 구축되기 이전의 김해지역은 저습지 혹은 해안지대로서 거의 해마다 홍수피해를 입어 농경에 좋지 못한 환경이었던 것이다.828)潘鏞夫·金元經,<金海地域의 地形과 聚落>(≪伽倻文化硏究≫2, 1991), 7쪽. 따라서 농업은 오히려 내륙지방에서 더욱더 활발하였으리라고 보아진다. 내륙 산간지방은 비록 김해지역과 같이 넓게 펼쳐진 평야지대의 입지는 아니지만 아직 저수시설과 수리제어기술이 미흡하여 산간의 계류를 이용한 관개시설 방식의 농경829)李賢惠,<三國時代의 농업기술과 사회발전>(≪韓國上古史學報≫8, 1991), 52쪽.을 하였던 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곳이 오히려 최상의 안정적인 농업 입지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철산지의 확보라는 점인데, 비록 후대의 자료이긴 하지만 가야지역내의 鐵場으로는≪世宗實錄地理志≫에 陜川郡 冶盧縣 心妙里의 철장과 山陰縣 馬淵洞山·三嘉縣 毛臺亦里 檻頂山의 철장 등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철산업이 발달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각 군현의 歲貢조를 참고해 보아도 야로현의 철장은 조선 초기에 正鐵 9,500근의 세공을 바쳤을 정도로 철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곳으로 가야지역내에서 다른 어느 철산지와도 비교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후기 가야는 이를 장악한 고령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沈奉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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