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Ⅸ. 가야인의 생활
  • 2. 종교와 풍속
  • 1) 문헌에 보이는 가야의 종교
  • (1) 불교

(1) 불교

 고대국가 가운데서도 가장 문헌이 남아있지 않는 국가가 가야이다. 따라서 불교전래 사실도 주변의 삼국이 비교적 명확하게 기록을 남기고 있는 데 비해 보이지 않고 있다. 고대삼국 가운데 처음 불교가 공인된 국가는 고구려로, 제10대 小獸林王 2년(372)에 前秦의 順道가 불교를 전하였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제15대 枕流王 원년(384)에 東晉으로부터 인도승 摩羅難陀(Malananta)가 들어와서 불교를 전하였다. 신라는 그 후인 訥祗麻立干代(417∼458)에 고구려를 거쳐온 墨胡子(阿道)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널리 퍼지지 못하였고 法興王 때 異次頓의 순교와 더불어 공인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야의 불교전래에 대해서는 자료가 극히 미비하여 그 전반적인 실상은 알 수 없다. 다만 문헌기록으로≪삼국유사≫와 여기에 수록된≪駕落國記≫에 다음과 같은 불교관계 기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가야에도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추측은 할 수 있지만 전래 연대에 대해서는 확정할 수 없다.

① 왕이 가로되 내가 서울을 정하고자 한다.…이 땅이 蓼葉과 같이 협소하나 (地勢가) 秀異하여 가히 16羅漢의 살 곳이 될 뿐 아니라 하물며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는 7聖이 살 곳으로 적합한 곳이다(≪駕落國記≫).

② 妾은 본래 阿踰陀國의 공주인데 姓은 許씨이고 이름은 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駕洛國記≫).

③ 金官 虎溪寺의 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金官國으로 되었을 때 世祖 首露王의 妃 許皇后 黃玉이 東漢 建武 24년 甲申에 西域 阿踰陀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三國遺事≫권 3, 塔像 4, 金官城 婆娑石塔).

④ 銍知王 혹은 金銍王이니 元嘉 28년에 즉위하여 이듬해에 世祖와 許黃玉 왕후를 위하여 처음에 세조와 合御하던 곳에 명복을 빌려고 王后寺라는 절을 짓고 논 10결을 바쳐 충당케 하였다(≪駕洛國記≫).

 사료 ①의 16나한이라든지 7성834)16羅漢과 7聖에 대해서는 ‘16나한은 부처님의 大弟子들이고 7성은 곧 7佛(과거 6불에 釋迦를 더하여 7불)을 말함이다’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丁仲煥,
≪加羅史草≫, 釜山大, 1962, 65쪽). 또는 隨信行 등 불교의 7성을 의미한다고 한다(李丙燾,≪譯註 三國遺事≫, 廣曺出版社, 1981, 286쪽).
이 살 곳이라 한 점은 금관가야의 도읍지가 불교와 관련이 있다는 설화이고, ②·③에 의하면 수로왕 妃인 허황옥은 불교 발생지인 인도의 일국인 아유타국 출신이라 하여 역시 불교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강하게 반영한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금관가야의 건국이 불교와 관계성을 가진다고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또한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변 삼국에의 불교전래가 4·5세기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 설화는 불교가 들어온 뒤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료 ④에 보이는 王后寺의 창건을 元嘉 29년(452)이라고 기록한 기사는 어느 정도 역사성을 가진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835)이에 대해 金煐泰는 銍至王 2년(452)을 金官加耶에 불교가 初傳된 시기라고 보았다(金煐泰,<駕洛佛敎의 傳來와 그 展開>,≪佛敎學報≫27, 1991).

 그러나 가야에의 불교전래가 백제를 통해 전래되었는지 혹은 설화에 보이는 것과 같이 해로를 통해 중국 또는 인도로부터 들어왔는지 하는 점은 문제로 남는다.836)金煐泰는 금관가야에 전래된 불교는 백제나 중국보다 인도 쪽에서 들어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또한 가야의 불교가 신라불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하고 있다(金煐泰, 위의 글, 46∼47쪽). 아울러 4면이 각이 진 오층석탑인 婆娑石塔은 재질면에 있어 이 지방에서 구할 수 없는 석질이란 점에서 고고학적·미술사적으로도 검토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후대의 사료인≪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삼국사기≫地理志를 주석하는 형식으로 신라 말의 학자인 崔致遠이 찬한<釋利貞傳>과<釋順應傳>의 일문을 인용하고 있다.

 가야산신 正見母主는 곧 천신 夷毗訶之에 응감한 바 되어, 대가야왕 惱窒朱日과 금관국왕 惱窒靑逸 두 사람을 낳았다. 대가야국의 月光太子는 正見의 10대손이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144, 高靈縣).

 여기서 가야산신을 정견모주라고 하고 있는데 이 역시 불교적인 색채로 윤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견이란 불교의 八正道837)八正道란 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을 말한다. 가운데 처음의 것으로 바른 견해를 가진다는 뜻이다.

 위 설화의 내용은 가락국의 시조를 하늘에서 내려 온 난생의 사람이라 비유한 데 반해, 대가야의 시조는 천신과 산신의 감응에 의해 탄생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금관가야 뿐만이 아니라 대가야에도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반영하는 것838)대가야의 불교 전래 경로에 대해서 금관가야로부터 유입되었다고 보는 설(金煐泰, 앞의 글)과 백제로부터 유입되었다고 보는 설(金福順,<大加耶의 불교>,≪加耶史硏究≫, 1995)이 있다. 한편 南齊로부터 유입 가능성을 시사하는 설도 있다(田中俊明,≪大加耶聯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1992).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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