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Ⅸ. 가야인의 생활
  • 2. 종교와 풍속
  • 1) 문헌에 보이는 가야의 종교
  • (3) 도교

(3) 도교

 道敎란 민간신앙인 神仙思想을 기반으로 不老長生을 주요 목적으로 하고 현세의 吉福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도교는 자연발생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대 한국에서도 도교를 수용할 수 있는 토착적인 신앙적 기반이 있었다고 보아진다. 즉 檀君神話에 보이는 산악숭배신앙과 신선설 및 각종 方術842)방술이란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방법과 기술을 말한다.에 관한 기록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먼저 삼국에의 도교 전래를 살펴보면, 먼저 고구려의 경우≪삼국유사≫에 기록이 보이고 있다.

高(句)麗本記에 말하기를 麗末인 武德·貞觀843)武德은 唐 高祖의 연호(618∼626)이며, 貞觀은 唐 太宗의 연호(627∼649)이다.년간에 國人이 다투어 五斗米敎844)「五斗米敎」란 입교자에게 쌀을 닷말씩 바치게 한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後漢 桓·靈(147∼188)帝 때 張陵으로부터 시작된 도교의 한 祖型이다.를 신봉하였다. 唐 高祖가 이를 듣고 道士를 시켜 天尊像을 보내고 道德經을 강연케 하였다. 왕이 국인과 함께 聽講하였는데 즉 榮留王 즉위 7년인 무덕 7년 甲申(624)이었다(≪三國遺事≫ 권 3, 興法 3, 寶藏奉老 普德移庵).

 이 기사에 의하면 고구려에 도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영류왕 7년(624)이지만 원시도교의 하나인 오두미교의 전래는 시간적으로 상당히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845)오두미교의 전래 상한에 관한 기록은 “중국이 크게 어지러워 漢人들이 난을 피해 내투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고국천왕 19년)는 기사일 것이다. 이후 고구려에서는 寶藏王 2년(643) 淵蓋蘇文의 건의에 의해 재차 도교의 도입이 시도되었으나 정략적으로 행하여졌기 때문에 민중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백제의 경우 문헌상 도교전래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서 종교로서의 도교는 형성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으나,≪삼국사기≫와≪일본서기≫의 기사를 참고로 하여 볼 때 백제에도 도교가 전해져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846)백제는 369년경에 이미 도교에 관한 서적이 전래되어 지배층 사이에 읽혀지고 있었으며(≪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1, 근구수왕) 또한 백제가 도교적 잡술인 遁甲方術의 책을 일본에 전래시켰던 점(≪日本書紀≫권 22, 推古天皇 10년)과, 백제 武王이 연못에 섬을 만들어 三神山의 하나인 方丈山에 비유한 점(≪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35년)으로 볼 때 백제에서는 일찍부터 도교에 대한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에서도 고구려와 같은 공식적인 도교의 전래를 전하는 사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眞平王 9년(587)에 大世·仇柒 같은 이가 신선의 도를 배우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갔다는 기록847)≪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평왕 9년.이 있고 도교와 관련있는 방술을 구사하는 인물848)金庾信을 들 수 있는데,≪三國遺事≫와≪三國史記≫에 의하면 그는 7曜의 정기를 타고 났기 때문에 7星의 무늬가 있었다(≪三國遺事≫ 권 1, 紀異 2, 金庾信)고 하고, 17세에는 어떤 노인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았다(≪三國史記≫ 권 41, 列傳 1, 金庾信 上)고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도교와 관련이 있는 내용이다.
또한 그의 증손인 金巖은 중국에서 도교적 잡술을 배워 와서 메뚜기의 재해를 물리쳤다고 한다(≪三國史記≫ 권 41, 列傳 3, 金庾信 下).
에 관한 기사가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신라에도 도교는 전래되어 있었다849)그 외에도 仙桃山 神母를 地仙이라 했다든가, 花郞을 國仙이라 하고 화랑의 역사서를 仙史라 하였던 점에서도 추측 가능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한편 가야에 있어서의 도교전래도 그 실상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만≪가락국기≫에 수로왕이 탈해와 왕위를 다툴 때 독수리나 새매 등으로 둔갑하였다는 도교적 잡술에 관한 내용이 보이고 있으며, 수로왕이 157세로 향수하였다는 설화는 신선설과 상통하는 것으로 도교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도교와 관련되어 가야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招賢臺 …俗에 전하기를 駕洛國 居登王이 七點山 旵始仙人을 초청하니, 旵始는 배를 타고 거문고를 가져왔다. 서로 더불어 기뻐하였으므로 그대로 이름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金海都護府 古跡).

 이와 같이 선인과 관련이 있는 지명에 관한 기록을 남길 만큼 가야사회에도 도교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상에서 가야의 종교를 살펴보았다. 삼국사회에 있어 불교가 고대종교로서 수용되었는 데 비해 유교는 정치사상에 영향을 미치면서 전개되었고, 도교는 고대신앙과 연관성을 가지면서 한국 고대사회에 정착하여 각국의 고유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야사회도 이러한 범주내에서 고유신앙과 사상체계를 바탕으로 불교·유교·도교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 독자의 문화를 형성하여 나갔다고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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