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Ⅰ. 토착신앙
  • 2. 백제의 토착신앙
  • 3) 지신신앙

3) 지신신앙

 백제의 땅에 대한 신앙은 하늘에 대한 신앙과 함께 이루어졌다. 백제 시조 온조왕 20년(A.D. 2) 왕이 큰 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낼 때 하늘과 땅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38년 10월에도 큰 단을 설치하여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그 다음 왕인 다루왕 때에는 즉위 직후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다루왕 2년(A.D. 29) 정월 즉 즉위한 다음해 정월에 먼저 시조 동명묘를 배알하고, 다음달 2월에는 남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즉위 직후에 제사가 이루어졌음을 볼 때 즉위의례적 성격이 강함을 알 수 있다. 시조묘와 하늘과 함께 땅에 대한 제사의 중요성을 알 수 있으며 땅에 대한 신앙과 숭배가 시조나 하늘에 대한 그것에 못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 제사가 가장 많이 행해진 것으로 전해진 고이왕 때도 땅에 대한 제사가 하늘에 대한 제사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고이왕 때에는 재위 5년·10년·14년 세번에 걸쳐 땅에 대한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낸 시기가 모두 정월달이며, 하늘에 대한 제사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때는 큰 단을 설치하였는데 남쪽에서 거행되었으며, 산과 내에 대한 제사도 함께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이러한 제사의례를 행할 때는 북과 나팔을 사용하여 음악이 연주되어 축제적 분위기를 자아낸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제의에는 희생의례가 이루어졌음을 비류왕 때의 제의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비류왕 10년(313) 봄 정월에 남교에서 땅에 제사를 지낼 때 왕이 친히 짐승을 베는 희생의례를 행하였다. 희생물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에 없어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한편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중신을 임명하는 예는 신라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아신왕 2년(393) 봄에 동명묘를 배알하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나서 중신을 임명하였다. 이와 같은 사례는 신라의 경우 일반적인데 백제도 그러했던 것 같다. 하늘과 땅, 시조로부터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후 인사권을 행하는 것이다. 땅이나 산천에 대한 제사는 홍수나 가뭄이 들었을 때도 행하였다. 아신왕 11년 여름에 크게 가물어 벼와 풀들이 모두 말라버려 왕이 橫岳에서 제사를 지내니 비가 내렸다. 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부여의 경우와 같이 이를 왕의 책임으로 받아들여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한편 왕의 즉위의례로서의 제의에서는 대사면령이 내렸다. 전지왕 2년(406) 봄 2월에 왕이 동명묘를 배알하고 남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하늘과 땅, 시조로부터 왕권의 정통성을 부여받고는 인사권을 행하거나 은사권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는 풍년이 들었을 때도 행하였다. 동성왕 11년(489) 가을에 대풍년이 들어 남쪽 지역에서 복속의례를 행하자 단을 설치하여 하늘과 땅에 감사를 드리는 제사의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그 노고를 치하하였다. 농경사회에서는 풍흉이 사회의 생산력을 가늠하는 것이므로 가뭄과 홍수 때는 물론 풍년이 들었을 때도 제의를 행하였다. 그런데 이후로는 백제에서 땅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武寧王(501∼523)의 사후 그의 장례를 치룰 때 토지신에 대한 의례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무령왕의 誌石과 買地券을 통하여 당시 백제인들의 토지관을 엿볼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지석이 출토되었다. 왕의 지석의 앞면에는 왕의 이름과 죽은 날자와 장례를 치룬 날자가 기재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방위가 기재되어 있다.017)최근 公州 艇止山에서 발견된 유적이 국가 차원의 제의를 위해 만든 시설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것이 시조나 선왕들에 대한 제사인지 아니면 6세기 전반대의 왕이나 왕비 혹은 왕족의 사망에 즈음하여 단기간 동안 의례를 행하던 곳(殯地)인지의 여부는 추후 정밀한 검토가 팔요하다. 그러면서도 무령왕과 왕비의 능과 관련성이 있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개진되었다(李漢祥,<公州 艇止山遺蹟 發掘調査의 槪要>, 第40回 全國歷史學大會 發表要旨, 1997, 337∼384쪽). 왕비의 지석에는 왕비의 죽은 날자와 장례날자가 기재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매지권이 기재되어 있다. 이 매지권의 내용은 돈(錢) 1萬文을 가지고, 묘지 1건을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武寧王)이 土王·土伯·土父母·上下衆官 二千石秩에게 서쪽 땅(申地)을 사서 묘를 만들었으므로 증서(券)를 만들어 분명하게 했으니 어떤 律令도 이 영역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018)成周鐸,<武寧王陵 出土 誌石에 관한 연구>(≪武寧王陵의 硏究現況과 諸問題≫, 公州大, 1991). 왕과 왕비의 묘지를 쓸 때 토지신에게 이를 사서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율령보다도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산소에 가면 먼저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개토를 할 때도 토지신에게 開土祭를 지냄을 볼 수 있다.

 法王 2년(600) 정월에 王興寺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크게 가물어 왕이 漆岳寺에 순행하여 비가 오기를 빌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아신왕 11년(402)에는 가뭄이 들어 횡악에 가서 비가 오기를 빌었는데 여기서는 칠악사에 가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이것으로 침류왕 원년(384)에 불교가 수용되어 공인되고 백제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면서 토착신앙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019)車勇杰,<百濟의 祭天祀祗와 政治體制의 變化>(≪韓國學報≫11, 一志社, 1978), 51∼76쪽. 종래에는 가물거나 홍수가 나면 땅이나 산천에 비가 오기를 빌거나 비가 그치기를 빌었다. 그러나 불교가 백제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면서부터 가물거나 홍수가 났을 때 절에 가서 비가 오기를 빌거나 그치기를 비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불교가 수용된 것은 침류왕 원년이지만 불교가 국가의 공식적 의례로서 나타난 것은 법왕 2년이니 그동안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과 융화되어 가는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왕이 절에 가서 비오기를 빌었지만 그 절의 이름인「漆岳寺」를 통해서 산에 있는 절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토착신앙인 산신신앙과 불교가 융화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산성의 연구에서 산성과 제사와 관련성이 있다는 견해는 이미 지적된 바 있다.020)閔德植,<新羅 王京의 防備에 대한 考察>(≪史學硏究≫39, 韓國史學會, 1987). 二聖山城의 발굴에서도 제사와 관련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021)≪이성산성 이차발굴보고서≫(漢陽大博物館, 1988).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도 해상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022)全榮來,<周留城, 白江 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부안군, 1973). 또한 익산 금마 오금산성에 위치한 백제의 보덕산성의 발굴에서도 성곽과 제사와의 관계가 밀접한 것이 밝혀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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