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2) 백제의 불교
  • (2) 교학의 발전과 불교신앙

(2) 교학의 발전과 불교신앙

 漢城시대의 승려로서는≪삼국사기≫백제본기에 道琳이 보인다. 앞에서 기술한 바 있듯이, 그는 백제의 敗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고구려의 승려였다. 이 같은 기록을 보면 백제에서는 불교전래 이후로도 면면히 불교를 숭상하였을 것이며, 아울러 승려들은 왕궁 출입에 크게 제한을 받지 않았다고 추측된다. 고구려 군사에 의해 蓋鹵王이 죽음을 당하자, 그 아들 文周王은 熊津(公州)으로 천도하였다(475).

 백제 승려로서 이름이 남아 있는 맨 먼저 인물은 發正이다. 그는 天監 연간(502∼519)에 梁나라에 건너가서 스승을 찾아 佛道를 배운 지 30여 년만에 귀국하였다. 발정이 중국에 있었을 때 越州界山에 관세음 堵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보니 두 승려가 수행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두 道人이 있었는데 서로 入山하기를 재촉하였다. 각각 골짜기 하나를 차지하여 한 사람은≪화엄경≫을, 또 한 사람은≪법화경≫을 독송하고자 하였다(≪觀世音應驗記≫).

 아마도 위의 두 경전은 백제에 수용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南中國에서 사용한「道人」이라는 칭호가 백제에서도 유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075)辛鍾遠, 앞의 책, 182∼183쪽.

 彌勒佛光寺事蹟에 의하면 백제승 겸익은 聖王 4년(526)에 인도에서 梵本五部律을 직접 가지고 돌아와 28인의 승려와 함께 번역하였다고 한다. 曇旭과 惠仁은 이에 대한 律疏 36권을 저술하였으며, 왕은 번역된 新律의 序를 썼다.076)李能和,≪朝鮮佛敎通史≫(新文館, 1918), 33∼34쪽. 이 사료는 매우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겸익은 한국→남중국→인도에 이르는 해양 실크로드를 경유했을 것이다. 둘째 이때는 백제에 불교가 전해진 지 100여 년이 지난 때로서 불교교단의 팽창에 따라 새로운 律文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셋째 무령왕·성왕의 治世에 해당되는 이 시기는 백제가 한창 국가 중흥에 힘을 기울였고 새로운 문물을 적극 도입하던 때였으므로, 겸익은 국가에서 파견한 유학생일 것이다. 넷째 미륵불광사사적이 전하는 당시 백제의 사정이나 이웃 나라의 사정이 역사상의 제반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077)小玉大圓,<百濟求法僧謙益とその周邊>上(≪마한백제문화≫8, 1985).

 백제가 수도를 남쪽 熊津으로 옮긴 뒤부터 다시 성왕이 泗沘(扶餘)로 천도할 때까지(538) 웅진은 이 나라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시대의 절로서 그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이 약간 와전된 채로 다음과 같이 전한다.

또 大通 원년 丁未(527)에 梁帝를 위하여 熊川州에 절을 지었는데, 이름을 大通寺라 하였다(原註-웅천은 공주인데 당시 신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 丁未는 아닐테고 中大通 원년 己酉(529)에 세웠을 것이다. (법흥왕이) 정미년에 興輪寺를 세우고 아직 他郡에 절을 세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三國遺事≫권 3, 興法 3, 原宗興法).

 위 인용문은 신라 법흥왕의 崇佛 업적을 기술한 것인데, 당시 웅천주는 백제영토이므로 挾註가 틀린 것이다. 大通寺址는 공주시 班竹洞에 있는데, 대통 원년(성왕 5년)에 백제에서는 梁 武帝를 위하여 그 연호를 취해 절을 지은 것이다.078)輕部慈恩,≪百濟美術≫(寶雲舍, 1946), 93쪽. 이외에도 웅진시대의 백제 사찰로서 그 이름이 알려진 것으로는 먼저 水源寺를 들 수 있다.079)≪三國遺事≫권 3, 塔像 4, 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 이 절터가 공주시 玉龍洞에 있었다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080)金永培,<水源寺塔址調査>(≪百濟文化≫11, 公州師大, 1978).
秦弘燮,<百濟寺院의 伽籃制度>(≪百濟硏究≫2, 忠南大, 1971).
그리고 舟尾寺(공주시 주미동 절터골),081)朴容塡,<舟尾寺跡>(≪百濟の考古學≫, 雄山閣, 1972). 西穴寺(공주시 웅진동 쉬엿골-서혈동),082)金永培·朴容塡,<西穴寺跡>(≪百濟の考古學≫, 앞의 책). 南穴寺(공주시 금학동 남산),083)≪南穴寺址≫(국립공주박물관, 1993). 晩日寺(천안군 聖居面 성거산 中腹) 등이 있다.

 武寧王陵이 발견됨으로써 이 시절 불교신앙의 구체적 모습을 알 수 있게된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무령왕비는 불교신자였고 淨土願生者였음이 그 木枕의 圖像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北魏 용문석굴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한다.084)吉村怜,<百濟武寧王木枕に畵かれた佛敎圖像について>(≪美術史硏究≫14, 1977). 또한 무령왕릉은 華藏世界요 蓮花臺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여 왕릉을 造營한 성왕은 父王과 그 妃의 능을 극락정토로 꾸몄을 것이라고 한다.085)史在東,<武寧王陵 文物의 敍事的 구조>(≪百濟硏究≫12, 1981).
趙載勳,<武寧王陵과 百濟의 宗敎>(≪百濟武寧王陵≫, 公州大, 1991).
그 근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능의 羨道와 玄室이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것은 능이 하나의 극락정토임을 의미한다. 壁龕의 白磁등잔은 蓮花世界를 이루는 燃燈供養이며, 벽감은 寶珠形이니 곧 摩尼寶珠가 된다. 金製 귀금속의 새 모양은≪觀無量壽經≫에서 說한 極樂鳥로 볼 수 있다.

 6세기 전반 내지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유물로는 瑞山 普願寺址 출토 金銅佛立像과086)李殷昌,<서산 용현리 출토 백제 금동여래입상>(≪考古美術≫9-7, 1968). 禮山의 四方佛087)朴永福,<예산백제사면석불의 고찰>(≪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1984).을 들 수 있다. 보원사지 금동불입상이 발견된 지점은 중국과 해상을 통하여 교류하던 泰安半島에서 부여로 가는 첫 길목이다. 그리고 백제 四方佛像은≪觀佛三昧海經≫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고 추정되고 있다.088)文明大,<백제 사방불의 기원과 예산 石柱四方佛像의 연구>(≪韓國佛敎美術史論≫, 1987), 69쪽.

 성왕 19년(541)에 왕은 使者를 梁나라에 파견하여 毛詩博士와 涅槃 등 經義와 工匠·畵師 등을 요청하여 이들을 제공받았다.089)≪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성왕 19년.
≪南史≫권 7 및≪梁書≫권 54.
당시 중국에서는 열반경 교리에 밝지 않고는 행세할 수 없을 정도로 이 경이 유행하였는데, 그러한 학풍이 백제에 전해지자 특히 열반경 義疏를 청하게 되었다고 한다.090)金東華, 앞의 글, 68∼72쪽.
―――,<백제불교의 日本傳授>(≪百濟硏究≫2, 忠南大, 1971).

 熊州人 釋 玄光은 중국으로 건너가 陳나라의 南岳 慧思禪師(514∼577)에게서 法華 安樂行門을 은밀히 받고 精修하였다. 스승으로부터 印可를 받은 뒤 귀국하여 고향에서 법문을 크게 폈다.091)≪宋高僧傳≫권 18, 陳新羅玄光傳. 법화 안락행문은≪법화경≫安樂行品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는 법화경 교리에 대한 이해나 講說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이를 실천하고 證得한 자였다.092)金煐泰,≪百濟佛敎思想硏究≫(東國大, 1985), 28∼31쪽. 모든 고승전에서 그를 신라인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착오임이 분명하다.

 惠現(慧顯, 570∼627?)은 일찌기 출가하여 오직 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법화경 讀誦을 業으로 삼았으며, 三論을 공부하기도 한 그에게는 靈應이 많았다고 한다.093)≪三國遺事≫권 5, 避隱 8, 惠現求靜.
≪續高僧傳≫권 28, 釋慧顯.
현광이나 혜현을 통하여 우리는 백제시대 法華三昧의 실천적 경향을 볼 수 있다.094)삼국의≪법화경≫수용에 대해서는 福士慈稔,<朝鮮半島に於ける法華經傳播について>(≪大崎學報≫145, 1988) 참조.

 이즈음 만들어진 불상으로는 鄭智遠銘金銅釋迦佛立像(보물 196호)이 있다. 불상의 造像例로 볼 때 백제에서는 미륵신앙도 적지 않게 유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위덕왕 31년(584)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가지고 온 미륵석상 이외에도 부여의 扶蘇山 東部 建築址 및 定林寺址에서 滑石製의 半跏像 2軀가 발견되었다.095)黃壽永,<百濟半跏思惟石像小考>(≪韓國佛像의 硏究≫, 삼화출판사, 1973), 58∼59쪽.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태안마애삼존불의 중앙 尊像 또한 미륵보살이며, 좌·우는 각각 釋迦·多寶佛이라고 한다.096)文明大,<泰安 百濟磨崖三尊佛像의 新硏究>(≪佛敎美術硏究≫2, 東國大, 1995), 1∼25쪽. 그리고 서산의 마애삼존불도 중앙은 석가, 왼쪽은 관음, 오른쪽은 미륵반가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백제의 사찰 가운데 烏含寺는 창건의 사정(法王 또는 武王代)이 전해지는 드문 예에 속한다. 충청남도 保寧郡에 있는 聖住寺는 원래 백제의 오함사인데097)洪思俊,<百濟 烏合寺考>(≪考古美術≫100, 1968). 같은 이름의 절이 일본 河內에도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백제의 오함사 관계자가 일본의 하내지방에 정주해서 그 곳에 氏寺를 세우고, 본국의 오함사를 모방하여 절 이름까지 동일하게 붙였기 때문이라고 한다.098)田村圓澄,≪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吉川弘文館), 120∼124쪽.

 왕의 諡號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법왕은 신심이 돈독하였고, 불교 진흥을 위해 힘쓴 왕이었다.≪삼국사기≫의 다음 기사를 보도록 하자.

겨울 12월에 令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人家에서 기르는 매를 거두어서 놓아주었고, 고기잡는 도구와 사냥하는 도구를 불살랐다(≪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법왕 원년).

봄 정월에 王興寺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을 득도시켰다. 크게 가물었으므로 왕은 漆岳寺에 행차하여 기우제를 지냈다(≪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법왕 2년).

 위의 두 기사는 상호 연결되는 일련의 사건 같이 보인다. 거의 같은 내용이≪삼국유사≫興法篇, 法王禁殺條에도 있다. 이에 대해서, 법왕이 내린 명령은 미륵신앙에 의한 계율이며, 그것은 미륵상생신앙의 요건으로서 법왕 당시 백제에서는 미륵상생신앙이 성행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왕이 이를 널리 펴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다고 해석하는 이가 있다.099)洪潤植,≪三國遺事와 韓國古代文化≫(圓光大, 1985), 182쪽. 왕흥사를 미륵사와 동일시하는 사료가 있는가 하면,100)≪三國遺事≫ 권 2, 紀異 2, 武王. 부여군 규암면 新九里 절터를 왕흥사로 비정하기도 한다.101)秦弘燮,<百濟寺院의 伽藍制度>(≪百濟硏究≫2, 1971), 101∼102쪽.

 ≪삼국유사≫武王條에 의하면, 무왕의 妃가 미륵사 건립을 발원하자 신라 진평왕이 工人을 보내어 원조해 주었다고 한다. 미륵사의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薯童說話의 해석 여하에 따라 무왕대,102)黃壽永,<百濟帝釋寺址의 연구>(≪百濟硏究≫4, 1973). 武寧王代103)사재동,<서동설화연구>(≪藏庵池憲英華甲紀念論叢≫, 1971). 또는 東城王代104)李丙燾,<서동설화에 대한 신고찰>(≪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라고 각각 주장한다.105)金福順은 서동설화에 나오는 知命을 신라 진평왕 때의 大德 智明과 동일인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신라에서 지명을 諜者로 백제에 보내어 미륵사의 大役事를 유도하고, 그것이 백제 멸망의 한 요인이었다고 하였다(金福順,<三國의 諜報戰과 僧侶>,≪伽山李智冠華甲紀念 韓國佛敎文化思想史≫上, 伽山文庫, 1992). 그러나 자신의 本色을 숨겼을 智明이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을까 하는 등 의문이 남는다 어떻든 미륵사가 완성된 후 그 규모와 경관이 어떠했던가는 다음과 같은 후대의 평가를 보아도 짐작이 간다.

석탑은 매우 커서 그 높이가 몇 길(丈)이나 된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33, 益山郡).

 미륵사의 창건이 彌勒佛國土 사상과 연결된다는 것은, 창건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사실들이 다음과 같은 미륵경전에 보이는 彌勒下生信仰과 밀접한 대응관계를 보이고 있다는 데서 미루어 알 수 있다. 즉 도솔천의 미륵은 七寶臺內 摩尼殿上의 獅子床에 앉아 있다가, 땅이 金沙로 덮혀 있고 곳곳에 금·은이 쌓여 있는 翅頭城의 婆羅門家에 하생한 후, 龍華樹 아래에서 成佛하고 3回의 법회를 열어 중생을 제도한다. 미륵경전에 보이는 이러한 내용과 미륵사 창건 과정상의 내용을 대비해보면 다음과 같다. 獅子床은 知明法師가 살았던 용화산의 獅子寺와 대응되고, 미륵이 하생한 시두성의 금은 서동이 마를 캐며 “흙더미 같이 쌓아 놓았다”고 한 황금과 대응되며, 용왕이 있는 못은 용화산 아래의 大池와 대응되며, 용화수는 용화산과, 龍華三會는 龍華三會殿과 각각 대응되고 있다.106)金煐泰,<彌勒寺 創建 緣起說話考>(≪馬韓百濟文化≫創刊號, 1975). 이렇게 볼 때 익산 지역은 미륵이 하생하여 성불하는 이상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107)洪潤植, 앞의 책, 213∼214쪽. 그리하여 이곳에 미륵삼존불을 모신 거대한 사찰을 건립한 것은 미륵불국토를 건설한 것이었다. 王興寺의 준공에 대하여≪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왕 35년(634) 봄 2월에 왕흥사가 준공되었다. 그 절은 물을 굽어보고 있으며,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하였다(≪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泗沘時代의 유물 가운데 金銅龍鳳蓬萊山香爐를 들지 않을 수 없다. 1993년 부여 능산리의 집터를 발굴하던 중 금동향로와 각종 금속 유물 및 유리·구슬·토기를 비롯해서 기와 등 1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향로의 형태는 머리를 들어 올린 龍을 조각하여 받침을 삼고, 몸체는 연꽃 위에 솟아난 봉래산을 표현하였으며,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신선의 세계를 표현한 博山香爐의 형식과 비슷하다.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7세기초에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 공예품의 진수라 할 만하다.108)崔夢龍,<최근 발견된 백제 향로의 의의>(≪韓國上古史學報≫15, 1994).
溫玉成,<百濟의 金銅大香爐에 대한 새로운 해석>(≪美術史論壇≫4, 1996).
이외에도 부여지방의 출토유물을 통하여「何多宣藏法師」라는 僧名이 최근에 알려졌다.109)金容民,<扶蘇山城 東門址 出土 金銅光背>(≪美術資料≫57, 국립중앙박물관, 1996), 200∼209쪽.

 백제가 멸망한 해인 義慈王 20년(660)에 僧 覺從이 일본으로 파견된 것은 나당연합군을 반격하기 위하여 請兵하러 간 것이었다. 그 후로도 백제遺民들의 부흥운동은 집요하게 전개되어서, 승 道琛은 僧將으로서 領軍將軍을 자칭하고 왕족 福信과 더불어 일본으로부터 왕자 扶餘豊을 맞아 왕으로 삼고 周留城에 依據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이들 부흥운동군에게 敗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는 등 잇달은 內紛으로 주류성이 마침내 함락되어(663) 전후 4년에 걸친 부흥운동도 終幕을 고하게 되었다.110)安啓賢,<韓國佛敎史>上(≪韓國文化史大系≫6, 高麗大, 1970), 199∼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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