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4) 가야의 불교

4) 가야의 불교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伽倻聯盟은 백제·신라 및 왜 등 諸勢力의 각축으로 인하여 독자적인 정치·사회적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문화적 발전이 결코 신라에 뒤지지 않았음은 근래의 발굴을 통해서 잘 알려졌다. 불교가 일찍부터 가야지역에 流轉하였으리라는 것은 本伽倻의 첫 임금 首路王과 그 왕비 許왕후에 관한 설화에 의해 짐작이 된다.≪駕洛國記≫는 고려 文宗(1046∼1083) 때에 찬술된 史書다. 이에 의하면 수로왕은 멀리 바다를 건너 온 인도 阿踰陀國의 공주 許黃玉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그 후 제8대 銍知王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王后寺를 세웠다고 한다.169)≪三國遺事≫권 2, 紀異 2, 駕洛國記. 또 金海 虎溪寺의 婆娑石塔은 허왕후가 가지고 온 것이었다는170)≪三國遺事≫권 3, 塔像 4, 金官城婆娑石塔. 등 일련의 설화는 가야불교의 始源이 인도 내지 南方系와 연결된다는 점을 시사하여 준다. 이 외에도 경상남도 河東 雙磎寺의「七佛庵懸板記」에는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서 成佛하였다 하여 칠불암이라 하였다는 사적이 적혀 있다.

 이러한 전설적 사료에 착안하여 그 증거를 찾으려는 노력이 근래 시도되었다. 먼저 가야불교에 대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인도의 아요디아 지방에서 태국의 아요디아→일본 九州→가야로 들어왔다고 하거나,171)이종기,≪駕洛國探査≫(一志社, 1975). 스키타이→간다라→인도 아요디아→중국 四川省 普州→가야→일본 구주로 왔다고 하는 흥미진진한 논증이다.172)김병모,≪김수로왕비 허황옥≫(조선일보사, 1994). 이들은 그 物證으로서 지명이나 雙魚紋의 존재를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그렇지만 씨족의 이동이나 문화의 전파를 주장하려면 더욱 보편적이고 견실한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쌍어문이 그렇게 세계 곳곳에 보인다면, 오히려 그것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사용한 상징이라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객관적이라 하겠다. 물고기는 어느 지역이나 흔하며 쉽고 간단하게 그릴 수 있는 物像이기 때문이다.

 ≪가락국기≫에「羅漢」·「아유타」등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논평이 있다. 즉 그것은 가락국의 건국설화를 인도의 아유타 왕국과 결부시킨 것이며, 아유타국에서 아직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공존하던 시절에 가야가 건국되었다고 함으로써 가야의 건국연대를 끌어올리기 위한 날조라는 것이다.173)최복흥,<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고조선과 가락국 건국신화의 불교관계자료에 대하여>(≪력사과학≫1986-4;≪북한의 우리 고대사 인식≫1, 대륙연구소, 1991). 적어도「아유타」라는 지명은 불교전래 후에 생긴 것일 터이므로, 인도 지역에 그러한 지명이 있을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가락국기≫는 그 순서나 분량·제목 등으로 보아 고려 문종 때 金官州知事이던 어떤 문인이 편찬한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174)金福順,<위 최복흥의 논문에 대한 논평>(위의 책), 322쪽.

 비록 신라의 사적이지만 불교는 南海路를 통해 한반도의 東南海 沿岸地方에 직수입되었다는 이야기는<金剛山楡岾寺事蹟記>나 洛山寺의 관음신앙 유래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들 사료에다 가야의 건국설화까지 검토한 뒤에 “기원 전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서 해상교통의 상황을 조명해 본 결과 불교가 南海路를 통해 한반도의 동·남해 연안지방에 직수입될 수도 있었다는 推斷에 이르게 되었다.”175)무함마드 깐수,<한국불교 南來說 試考>(≪史學志≫22, 檀國大, 1989;≪新羅·西域交流史≫, 檀國大, 1992, 312쪽).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 설은 南來說 사료를 적극적으로 검토는 하였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 제시가 부족하여,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남게 되어 아쉽다.

 인도의 불상이나 탑이 어떤 인연으로 신라에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황룡사장육존상 설화가 있다. 이 또한 진평왕대의 사실을 진흥왕의 奉佛事蹟인 것처럼 연대를 거슬러 올렸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유점사 53불 연기도, 이것을 원래 인도에서 봉안하려다 실패하고 南解王 원년(A.D. 4)에 有緣國土인 신라에 와서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이 53불의 제작 시기는 신라 하대 혹은 그보다 늦은 유점사 창건 연대로 추정되고 있다.176)黃壽永,<유점사 五十三佛>(앞의 책), 317∼318쪽. 따라서 유점사 창건 후 어느 시점에서, 이들 불상이 古來의 신성한 것이라고 함을 점차 그러한 식으로 설명하였고, 그것이 고려시대에 閔漬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가락국기≫의 설화도 이러한 불국토 또는 유연국토신앙이 가야 지방에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굳이 가야의 건국연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는 평은 오히려 현대 史家의 관심사에 매몰된 시각이라 하겠다.

 다만 최치원도 문경≪봉암사지증대사비≫에서

불교가 전래됨에 있어서 毘婆娑(小乘)가 먼저 전래하였으니 四郡이 四諦의 法輪을 몰았고, 摩訶衍(大乘)이 뒤에 이르러 온 나라에 一乘의 거울을 빛냈다.

 고 하였다. 역시 소승불교의 先來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가능성이 있다.

 역시 가야불교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려는 태도에서 나온 최근의 연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一善郡 지방은 지리적으로 고구려보다는 가야에 더 가깝다는 점을 들어, 우리 고대국가의 불교는 금관가야→대가야→신라의 순서로 전해졌다고 보기도 한다.177)金煐泰,<駕洛佛敎의 전래와 그 展開>(≪佛敎學報≫27, 1991), 36∼41쪽.
洪潤植,<伽耶佛敎에 대한 諸問題와 그 史的 意義>(≪伽耶考古學論叢≫, 1992).
그렇지만 묵호자 또는 아도가 고구려로부터 왔다는 사료를 부정할 정도의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550년대에 백제의 聖王과 대가야와의 군사동맹 및 성왕의 불교전파 정책을 들어, 대가야는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보기도 한다.178)金福順,<大伽耶의 불교>(≪加耶史硏究-대가야의 政治와 文化-≫, 1995), 285∼288쪽. 이 주장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아동 벽화고분의 연꽃그림이 백제의 벽화고분과 흡사하다는 점도 들고 있어 설득력이 있다.

 한편 최치원이 지은<釋利貞傳>등을 보면, 대가야의 月光太子가 가야산 해인사의 前身이라고 할 擧德寺에서 수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료에 대해서도 해인사 및 대가야국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179)백승충,<于勒十二曲의 해석문제>(≪한국고대사논총≫3, 1992), 465쪽. 기존의 사실 및 口傳을 채록했을 것이라고도 하여 의견이 상반되고 있다.180)金福順, 앞의 글, 288∼291쪽.

 ≪삼국사기≫·≪삼국유사≫의 書名이 말해주듯이 우리의 고대 사료는 고구려·백제·신라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문헌자료의 발굴과 아울러 유물·유적을 통해서도 가야불교에 대한 실체를 밝혀야 할 일이 또한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다.

<辛鍾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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