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Ⅲ. 유학과 역사학
  • 4. 삼국의 역사편찬
  • 1) 고구려

1) 고구려

 삼국 중 가장 먼저 한자문화를 수용하고 선진문화를 이룩한 고구려에서 역사편찬도 제일 먼저 시작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문헌기록은 영양왕 11년(600)DB주석신편 한국사 책자에 '영양왕 11년(628)'로 잘못되어 있어서 DB 구축 작업에서 바로잡았다.조에 처음으로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太學博士 李文眞에게 명하여 古史를 줄여 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다. 國初에 문자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을 때에 어느 사람이 일을 기록하였는데 그 양이 100권이었고 그 이름을 留記라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줄이고 다듬었다(≪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이 기록에 대하여 종래의 학설은≪留記≫가 편찬되었다는 전제하에 국초가 언제냐 하는 데에 주로 관심이 두어졌다. 즉 이를 문자 그대로 국초로 보아야 한다는 설268)이는 李佑成의 견해이다(李基白 외,≪한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삼성문화문고 88, 1976).과 태학이라는 교육제도가 확립되었고 율령제가 반포되었으며 불교수용이 이루어진 소수림왕대를 주목한 설269)李基白 외, 위의 책, 4쪽.이 있다. 앞으로 살펴볼 백제와 신라에서의 역사편찬 분위기를 고려하면 소수림왕대설이 일견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위의 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중요점을 중심으로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는 설이 제기되었다.270)鄭求福,<傳統的 歷史意識과 歷史敍述>(≪韓國學入門≫, 學術院, 1983), 82∼83쪽. 즉 100권이라는 거대한 저술이 한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점과 ‘유기’라는 말의 뜻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점을 고려하여 위의 원문을 ‘국초에 처음 문자를 사용할 때에 어느 사람이 일을 기록하였는 데 (그것이 쌓여) 100권에 이르렀다.’라고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남겨진 기록’271)李佑成은 이를 전승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이미 피력한 바 있다(李基白 외, 앞의 책, 15쪽).이라는 뜻에서 이를 유기라고 불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유기라는 용어가 새로이 편찬된 역사서의 이름으로는 적당하지 않다는 점272)이는 편찬된 역사책의 이름으로서는 타당하지 않다는 설이 高柄翊에 의하여 제기된 바 있는데 이는 경청할 만한 견해라고 생각한다(李基白 외, 위의 책, 14∼15쪽).을 고려할 때에 더욱 그러하다. 다시 말하면 국초로부터 여러 사람에 의하여 기록되어 쌓인 자료가 100권에 이르렀다고 봄이 합리적이다. 또한 신집을 편찬하면서 새로운 자료를 보충하였다고 기록하지 않고 이를 줄여서 편찬하였다는 표현은 이 책의 편찬 직전까지의 내용을 유기가 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에서 한자를 사용하여 기록을 남긴 것은 태조 46년(A.D. 98)에 왕이 동쪽에 있었던 柵城에 순수하여 흰 사슴을 잡고 군신과 연회를 가진 후 산의 바위에 功을 기록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273)≪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46년. 이 태조의 巡狩紀功碑는 비록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후일 신라 진흥왕순수비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며 고구려에서의 한자사용은 이보다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역사기록이 국초부터 있었다는 것은 태조 무렵이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의 역사기록이 이처럼 여러 사람에 의하여 체계없이 기록된 것이고 그 분량이 100권에 이르렀다면 고구려에서는 이런 자료를 가지고 신라나 백제와 같이 역사를 편찬하는 작업이 없었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국가에 의하여 계획적인 역사편찬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의 국사편찬이나 백제의 서기도 이런 유기와 같이 기록을 남긴다는 뜻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현재까지의 연구나 저술에서는 소홀히 한 감이 있다. 방대한 자료이고 일정한 체계로 정리되지 않은 유기라는 자료를 태학의 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태학의 국사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5권의 신집으로 정리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의 역사기록은≪삼국사기≫를 통하여 전래되고 있을 뿐 원래의 기록 자체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에 발견된 금석문은 그들의 역사기록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대표적인 자료로서는 광개토대왕릉의 비문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역사기록의 내용과 고구려의 역사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존성을 들 수 있다. 고구려 역사는 天帝의 후손이 지배하며 항상 하늘님의 후원을 받으며 왕이 죽은 후에는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받은 은택이 사해에 퍼지고 九夷를 제압하였다는 표현에서 고구려 중심적인 세계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274)梁起錫,<4∼5C 高句麗 王者의 天下觀에 對하여>(≪湖西史學≫11, 1983).
盧泰敦,<5세기 金石文에 보이는 高句麗人의 天下觀>(≪韓國史論≫19, 서울大, 1988).
또한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부여 등의 조공을 받는 중화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독자적인 연호를 세웠고 대왕이라는 칭호를 가졌다. 太王 또는 大王이라 함은「王中王」이라는 뜻으로 비록 황제라는 용어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대왕이라는 칭호는 황제라는 칭호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존성은 비록 시기의 선후는 있지만 고구려만이 아니라 백제나 신라·燕·일본까지도 공통적인 고대문화의 특질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 비문을 통하여 당시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이 영토를 확장하는 정복전쟁이었음을 광개토대왕이 격파하여 점령한 성과 마을을 상세히 기록한 부분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정복전쟁은 자국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시대적 과업이었다. 이러한 정복전쟁의 승리는 왕권의 강화를 가져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대왕의 업적을 왕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고 시조로부터 물려받은 천손족의 후손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이 비문에는 守墓人에 대한 규정을 상세히 적고 있다. 수묘인을 고구려 원주민인 舊民과 새로이 포로로 잡아온 新民을 섞어서 편성하면서 구민은 곧 연약해질 것이라고 한 점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소로서 새로운 백성을 영입하였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구민이 곧 연약해질 것이라는 내용은 수묘인이 묘를 청소하고 지키는 데에 적절치 않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이 내용을 새로운 백성은 근면하고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이로써 고대국가가 발전하기 위하여 새로이 정복한 자를 적극적으로 자국의 백성화하는 데에 노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신라 진흥왕순수비에도 보이고 있다.

 넷째 이 비문에서 보면 광개토대왕의 묘에 비석을 세울 뿐만 아니라 선대의 모든 왕들의 묘에 묘비를 세우고 이를 지키기 위한 수묘인을 정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는 先代 왕들의 묘소를 존중하는 것이며, 이들에 대한 제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섯째 이 비문은 한문학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수준의 한문 구사는 고구려에서 역사기록을 남길 수 있었음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이런<광개토대왕릉비>의 주 내용이 유기 100권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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