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1. 언어와 문학
  • 2) 시가
  • (2) 창작적 노래의 출현과 민족의 발견

(2) 창작적 노래의 출현과 민족의 발견

 그러나 구지가계 노래와<공무도하가>에 구현된 세계는 민족의 범위를 넘어 어디서나 있을 법한 범문화적 성격이 강하다. 다시 말해 이들 생성기의 노래는 아직까지 한국시로서의 구체적 개별성을 획득하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구지가계가 우리만의 노래가 아닌 범세계적 보편 유형이듯이,<공무도하가>의 비극적 국면 역시 범문화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노래의 극적 정황으로 설정된 부부의 연쇄적 죽음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서나 있음직한 보편적 제재로서, 그 호소력의 원천 역시 역사적 진실성보다 허구적 진실성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공무도하가>가 쉽게 중국에 수용되어 악부화될 수 있었던 까닭도 이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노래는 아직 한국시가로서의 역사성과 민족문학으로서의 개별성을 획득하기 이전 단계에 향유되었던 우리시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고구려의<黃鳥歌>, 신라의<兜率歌>·<會蘇曲>·<辛熱樂>, 가락국의<구지가>등 기원 전후 1세기경에 산출된 일련의 작품들은, 우리시가의 형성 과정상 앞 단계의 생성기와 구별되는 또 다른 국면을 보이는 자료들이다. 이들 기원 전후의 작품에 와서부터 비로소 우리시는 민족문학으로서의 역사성과 개별성을 획득하면서 한국시의 서정적 전통을 마련할 길을 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기원 전후의 이 시기가 철기문화의 급격한 확산과 더불어 본격적인 민족국가의 출현을 경험하게 되는, 민족적 정체성의 발견 시기와 긴밀히 맞물려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三國史記≫에 漢譯歌의 형태로 남아 전하는<황조가>와 노래의 유래만 전하는<도솔가>는, 현전하는 자료로서는 처음으로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과의 긴장 속에서 생성된 창작적인 노래들이라는 점이 우선 주목을 끈다.<황조가>는 고구려의 2대 瑠璃王이 왕비 宋氏가 죽은 후 繼室로 맞아들인 두 왕비-漢族 출신의 禾姬와 鶻川人 출신의 稚姬-의 질투어린 갈등상을 배면에 깔고 읊은 애정의 노래다.314)≪三國史記≫권 13, 고구려본기 1, 유리왕 3년.<도솔가>는 신라 3대 儒理王이 거리의 부랑민들까지 구휼할 만큼 선정을 베푼 ‘民俗歡康’의 정치상을 반영한 송축의 노래다.315)≪三國史記≫권 1, 신라본기 1, 유리니사금 5년. 따라서 이들 노래에서 우리는 한국시가가 자연발생적인 구술전승의 향유 단계를 넘어 창작적 노래의 향유 단계로 확산되는 상황을 어느 정도나마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자료가 왕실 중심으로 편중되어 전하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앞 단계의 노래와 달리 역사적 구체성을 띤 특정한 정황의 정치현실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조가>는 표면상 치희와의 총애 다툼으로 떠나버린 화희에의 애틋한 미련을 외로움의 정서로 표출한 소박한 사랑의 노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일찍부터 선학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316)李明善,≪朝鮮文學史≫(朝鮮文學社, 1948), 16쪽. 그 이면에는 고구려 건국 초기의 어지러운 정치현실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사랑 노래로 보기는 어렵다. 두 계실인 화희와 치희의 갈등은 단순한 총애 다툼이라기보다 이들을 등에 업은 두 정치세력의 팽팽한 권력다툼, 곧 漢人으로 대표되는 외래세력과 골천인으로 대표되는 토착세력간의 정치적 알력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황조가>는 곧 이들 정치세력의 견제와 조정을 통해 아직 채 다져지지 못한 왕권을 굳혀 나가려다가 벽에 부딪힌, 유리왕의 강한 정치적 좌절감을 바탕에 깔고 있는 서정적 사랑의 노래인 것이다.

 <도솔가>의 경우는 그러한 정치현실과의 밀착 관계가 더욱 직접적이다. 비록 작품이 전하지 않아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민속환강의 國泰民安을 구가하는 정치성이 짙으리라는 것은 문맥상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도솔가>는 왕권의 확립을 통해 건국 초기의 國基를 다져 나가려는 유리왕의 국가체제 정비 시책과 직접 맞물려 제작된 노래이기도 하다. 지배기반으로서의 六村을 정비하고 통치기구로서의 官制를 확립하는 등의 통치체계 구축, 농기구 여[犁]를 제작하고 길쌈을 장려하는 등의 산업기반 조성, 臧氷庫를 짓고 수레를 제작하는 등의 왕실기반 확립 등과 더불어, 왕실음악으로서의 歌樂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첫 노래가 곧<도솔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317)李明九,<兜率歌의 歷史的 性格>(≪城大論文集≫22집, 成均館大, 1976), 19∼31쪽.

 사실<황조가>와<도솔가>가 창작되는 기원 전후 1세기 무렵은 우리 역사상 실질적 의미의 자생적 민족국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시기라 할 수 있다. 漢四郡의 설치와 철기문화의 보급은 아마도 이러한 국면의 전환을 가져오게 한 가장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문화적 토양을 달리하는 이민족의 외압은 한편으로 다종다양하게 분포된 토착문화 집단들의 자기 정체성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 小國 단계의 민족국가 형성을 주도해 나간 철기문화 집단의 流移民 現象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六村, 고구려의 五族, 가락국의 九干 등 토착집단의 규합을 통한 소국 형성의 과정이 이를 단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황조가>나<도솔가>와 같은 창작적 노래의 출현은, 기원 전후 1세기 무렵의 자생적 민족국가 출현이라는 우리의 민족사적 현실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민족국가 형성의 주동자인 상층부 지배집단을 중심으로, 그네들의 당면한 현실적 고뇌와 과제를 토로하고 해결하는 데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기원 전후의 이들 창작 시가는 그 서정적 성격 역시 특수한 국면을 드러낸다.<황조가>는 단순한 사랑의 노래가 아니므로, 유리왕의 사사로운 감회를 토로하는 개인적 서정시로서의 전형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정치권력의 암투와 이의 틈바구니에서 안정된 국가기반을 다져야 하는 초기 국왕으로서의 심각한 정치적 고뇌가 깔려 있다. 따라서 노래 속에 토로되고 있는 유리왕의 외로움은 개인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정치적이라 할 수 있고, 사적인 것 못지 않게 사회적 성격이 짙다. 곧 개인적 자기 표백의 형태로 토로되는 고립의 정서는 사회적 문제로서의 정치적 소외감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적 서정시로서의 내면화 정도 또한 그렇게 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솔가>는 백성들의 집단적 감성에 기대어 창작된 정치적 의도의 頌祝歌 형태를 띠고 있는 만큼, 개인적 서정의 국면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오히려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이고 사적이라기보다는 공적인 성격이 짙기 때문에, 서정시로서는 특수한 위상에 놓여 있는 노래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정시로서의 초기 창작시가는 개인보다는 사회가, 개인의 내면적 우주보다 사회의 경험적 현실이 더 중시되는 사회성을 짙게 드러낸다. 다시 말해 내면적 현실보다는 사회적 현실과의 긴장이, 개인적 상상력보다는 사회적 상상력으로서의 현실성이 오히려 자아의 시적 충동을 자극하는 정서적 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무렵<황조가>·<도솔가>에서 보이는 이러한 정치현실과의 긴장은, 그것이 단지 창작시가의 국면으로서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앞 단계에 출현하여 이 무렵에는 이미 상당한 정도의 폭넓은 향유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구술전승의 노래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우선 주술적 계열의 노래 전통 속에 정착된 이 시기 주몽의 白鹿呪術과 가락국의<구지가>가 그러한 사정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예가 될 것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직후 이웃 沸流國의 松讓王을 굴복시키기 위해 흰 사슴을 위협하여 홍수를 일으키는 주몽의 백록주술318)李奎報,<東明王編>(≪東國李相國集≫권 3).은, 구지가계 고유의 기우주술적 기능을 豊農이 아닌 정치적 목적의 영토 확장에 이용하고있다. 가락국의 건국 과정에서 거북을 위협하여 수로왕을 탄강케 하는<구지가>319)≪三國遺事≫권 2, 紀異篇 駕洛國記.에는 그러한 정치성이 더욱 적극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기우주술을 迎神呪術로 바꾸는 주술적 기능의 변용을 통해, 풍요제의를 정치적 목적의 영신제의로 전치시키는 ‘주술의 정치화’ 현상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320)成基玉, 앞의 글(1991), 180∼190쪽.

 이런 현상은 공무도하가류와 같은 민요적 서정시 계열의 노래 전통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신라 유리왕 때 6촌 여인들의 길쌈놀이를 배경으로 제작된<회소곡>321)≪三國史記≫권 1, 신라본기 1, 유리왕 9년.
작품이 정하지 않아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지만, ‘會蘇會蘇’라는 歎辭가 노래 생성의 중심 동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 노래가 先後唱으로 불리는 전형적인 후렴구 형식의 민요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을 통해 그러한 사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곧 6촌의 이 길쌈놀이는 유리왕이 벌인 일련의 국가체제 정비사업과 함께 살필 때 여성 중심의 단순 소박한 민간 유희물로 보기는 어렵다. 길쌈놀이가 6촌의 정비와 긴밀히 맞물려 시행되고 있고, 王女를 위시한 6촌 여인들의 공동체 의식 조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한 달 이상이나 계속되는 장기간의 생산활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등의 사실에 주목한다면, 이는 오히려 상층집단의 결속을 다지고 국가의 기간산업을 장려하기 위해 전래의 민간유희를 정략적으로 차용한 정치성 짙은 놀이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온당할 것이다. 따라서 ‘會蘇會蘇’라는 탄사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회소곡>의 민요적 기반 역시 길쌈놀이의 그러한 사정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역시 전래의 집단적 민요가 정치현실과의 긴장 속에서 왕실음악으로 歌樂化되는 구체적 현장의 기록이라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322)≪三國史記≫권 32, 樂志에 기록된 유리왕대의<會樂>은 곧<회소곡>이 왕실음악으로 가악화된 후에 붙여진 회속곡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민족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분출된 이 시기 상층부 집단의 정치의식은, 이처럼 창작시가만 아니라<구지가>·<회소곡>등 앞 시대의 전통을 이어 받은 구술전승의 노래들에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강렬했던 것이다.

 기원 전후 1세기 무렵을 한국시가가 실질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는 전환기적 국면으로서 주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무렵에 이르러 한국의 시는 한편으로 생성기 시가의 전통을 이어 받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형태의 창작시를 산출하면서, 비로소 한국시로서의 역사성과 민족문학으로서의 개별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곧 앞 시대에 이미 마련된 주술적 노래의 전통과 민요적 서정시의 전통이<구지가>와<회소곡>으로 이어지고, 개인적 서정시의 전통과 공리적 서정시의 전통이<황조가>와<도솔가>에 의해 새로이 조성되는 등, 이 시기에 마련된 시적 전통이 민족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마침내 한국시의 전통으로 자리 잡는 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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