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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라의 토기

 신라의 토기는 원삼국시대의 연질토기로 분류되는 토기제작 과정을 거쳐 기원 300년경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여 ‘신라 토기’라는 하나의 장르를 이루게 되었다. 신라 토기는 청회색과 회색의 토기로 1,000도 이상의 고열에 구워낸 것으로 표면에는 파상문을 돌리거나 기하학무늬를 음각하기도 하였다. 기형이 매우 다양하며 특히 고배와 목긴 항아리(長頸壺), 그리고 손잡이가 달린 잔 등이 많이 보인다.

 그밖에 象形土器와 土俑, 그리고 작은 토우를 장식한 용기들이 있다. 이들 상형토기나 토용, 장식용 토우들은 각종의 인물·동물·器物·家屋 등을 본 떠 만들어 내고 있는데 상형토기는 속이 빈 형식으로 액체를 담을 수 있게 되어 있어 淨水나 술을 담아 의식에 쓴 것으로 해석된다. 오리형토기가 많은 것은 물과의 관계, 즉 祈雨祭 등에 쓰이지 않았을까 짐작케 하며 말이나 배·수레 등 운반 수단으로 쓰이는 것들이 많은 것은 저 세상으로 죽은 이를 실어다 준다는 의미도 포함된 것으로 해석되어 부장용의 토기임이 확실하다. 그밖에 토용은 사람의 형상을 본 떠 만들어 진 것이 대부분인데 性器를 과장하는 등 주술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상형토기나 토용 등은 儀式이나 제례용으로 쓰였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특히 작은 토우를 장식한 용기들은 고배의 뚜껑이나 항아리의 어깨, 器臺의 주변 등에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나타낸 인물상과 갖가지의 동물, 뱀과 개구리, 물고기 그리고 생활용품 등이 만들어져 토기에 부착된다. 이들은 사냥이나 歌舞 등의 일정한 얘기가 담긴 동작을 나타내며 뱀은 반드시 개구리를 물고 있는 등 풍요와 僻邪의 뜻을 담아 특수하고 소중한 것, 즉 예를 들면 의식용 술이나 물, 또는 씨앗을 보관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의 기와(瓦塼)는 그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는 불분명하나 3세기경 金城·月城의 궁궐에 제작 사용했으리라 짐작되며, 불교 공인 이후에는 興輪寺址·皇龍寺址·영묘사 등 절터와 명활산성·반월성 주변에서 다량으로 출토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경주 부근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고 가마터도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신라에서도 백제에서와 같이 암·수기와, 막새기와, 사래기와, 귀면기와, 마루기와 등이 고루 제작되고 소형의 막새기와도 보인다. 이들은 회흑색이 주류를 이루며 무늬도 單瓣·複瓣·重瓣 등의 여러가지 양식을 응용한 蓮花文이 두드러진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그밖에 圓圈文·人面文·鬼面文 등도 보인다. 대체로 수막새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막새기와에서 백제와의 관련을 짐작케 하는 意匠이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 瓦塼의 전환기라 할만큼 종류와 무늬가 다양해진다. 예를 들면 重瓣樣式의 蓮花文·寶相華文·忍冬文·초화당초문·봉황문·기린문·사자문·迦陵頻迦文·瑞鳥文·双鳥双動物文 등이 만들어지고, 암막새는 통일신라 이후의 것이 발견되고 있는데 寶相唐草文·인동당초문·포도당초문·飛天文·雲文 그리고 銘文 있는 기와와 전돌이 나타난다. 안압지 출토의「鳳儀4年銘」文樣塼은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 신라의 窯址는 월성군 안강읍 육통리, 현곡면 다경들녘, 통일신라시대의 요지는 월성군 현곡면 금장3리에서 알려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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