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6. 건축
  • 1) 사원건축
  • (2) 백제

(2) 백제

 목조건물:백제사원도 발달된 새로운 건물군으로 형성되었다. 그것은 백제가 고구려계의 한 부족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역시 건국 당초부터 새로운 건물을 갖고 있었다고 믿어지며 그 건물의 모습은 초기에는 고구려와 꼭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점차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얼마간 남조 건축의 영향을 받아서 고구려와는 다른 백제의 특성이 나타난 건물로 변화 발전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그 건물이 어떤 것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고, 다만 우리 나라 기술자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日本의 法隆寺의 건물이나 우리 나라에서 건너간 것으로 믿어지는 불감인 玉蟲廚子의 건물양식을 참작하여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 목조건물을 추측한다면 그 가구기법이나 구조는 고구려 건물과 기본적인 차이는 없고, 다만 세부 양식에 있어서는 남조계 양식이 도입 또는 혼용되어 어느 정도의 변화와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그러한 변화의 하나가 법륭사 금당이나 탑에서 볼 수 있는 雲形 첨자일 수 있고, 지붕 형식에서의 팔각지붕의 출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412)金正基, 앞의 글(1981), 18∼31쪽. 이와 같은 추측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은 법륭사 금당의 여러 가지 건축적 요소를 중국과 고구려의 건물의 요소들과 비교 검토한 일본학자가 “法隆寺 금당의 건축양식이 고구려 직계인 것인지 혹은 고구려계를 바탕으로 한 백제 양식인지는 당장 판단하기 어렵다”413)關口欣也·金正基 譯,<朝鮮三國時代建築と法隆寺金堂の樣式的系統>(≪日本建築の特質≫, 中央公論美術出版, 1976), 79쪽.라고 한 것으로도 짐작된다.

 건물의 기단에 대해서는 그간에 실시된 건물터 발굴에 의해 얼마간 알려져 있다. 기단 축조방법이 掘壙版築으로 된 것은 金剛寺址의 기단 하부에서도 확인되었고, 軍守里寺址의 탑기단 역시 心礎가 지하에 매설된 것으로 보아 굴광판축으로 된 기단인 것으로 판단된다. 기단 형식에 있어서 이중기단으로 만들어진 것은 정림사지의 금당과 미륵사지의 세 탑과 세 금당이었다. 정림사 금당의 경우에는 하층기단 상면에 차양의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 있어 고구려의 청암리사지의 세 금당과 탑의 기단 형식과 같은 고식형이었다. 백제의 석조기단에서 그 外裝형식이 자세히 밝혀진 것은 미륵사지의 건물 기단뿐이다. 미륵사지의 탑과 금당 기단은 하층기단이 지대석과 면석의 구분이 없는 장대석을 돌리고 그 위에 판석상의 갑석을 올렸고, 상층기단은 지대석·면석·갑석을 갖춘 기단이었고, 탑에서는 4면에, 금당에서는 전후면 중앙에 석조계단을 설치하고 있다. 강당기단은 지대석·면석·갑석을 갖춘 단층기단이며 전면 세 곳에 석조계단이 있었다. 중문과 회랑의 기단은 탑이나 금당의 하층기단과 같은 형식의 매우 간략화 된 단층기단이었다. 군수리사지의 탑기단은 塼築의 단층기단이었으며 금당과 강당 기단은 단층의 瓦積기단이었으나 각기 기와를 쌓는 방법이 달랐다. 이와 같은 전축기단이나 와적기단은 아직 고구려와 신라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기단의 외장형식으로서 어쩌면 백제에서 시도된 기단형식일지도 모른다.

 석탑:백제 석탑은 현재 두 기가 남아 있다. 그 하나는 반파된 모습으로 남은 彌勒寺址石塔이고 또 하나는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定林寺址五層石塔이다.

 미륵사지석탑은 武王代(600∼641)에 건립된 것이며, 사지에 대한 발굴에 의해 중원을 사이로 하여 東院과 西院이 나란히 병립된 미륵사의 서원 석탑이며, 중원은 목탑, 동원은 서원과 꼭 같은 규모 형식으로 된 9층석탑이었음이 밝혀졌다.414)≪益山彌勒寺址 東塔址 및 西塔調査報告書≫(圓光大 馬韓·百濟文化硏究所, 1974) 참조. 석탑은 이중기단 위에 세워졌고, 초층탑신은 사방 삼 칸으로서 기둥은 위가 가늘고 밑이 굵은 각주를 사용했다. 기둥머리 사이에는 창방 모양의 석재를 끼우고, 이들 위에 평방 모양의 장대석을 돌리고, 그 위에 包壁 모양의 낮은 벽을 쳤다. 포벽 위에는 다시 평방 모양의 석재를 돌리고 그 위에 2단의 역계단식 옥개받침을 올려 마치 3단의 역계단식으로 보인다. 옥개받침 위에는 비교적 얇고 넓적한 네 귀가 가볍게 반전된 옥개석을 올렸다. 옥개석 위에는 두툼한 각재로 된 탑신괴임을 돌리고 2층 탑신을 받쳤다. 2층 이상의 탑신은 높이가 매우 낮고, 초층탑신에 있던 포벽이 없어진 것 이외에는 모두 같은 형식으로서 단지 위로 갈수록 각 부분의 크기를 줄이고 있다. 탑신은 현재 6층 일부까지 남았으나 원래 9층이었고, 6층까지는 사방 3칸, 7·8층은 두칸, 9층은 한칸으로 복원되고, 9층 옥개석 위에는 중앙에 檫柱가 꼽히는 관통된 구멍이 있는 露盤을 올렸다. 노반 위의 相輪部는 그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복원은 불가능했다. 이 석탑 내부는 중심에 큰 방형의 대석을 쌓아올려 마치 목탑의 心柱와 같은 모습으로 9층탑신까지 올렸고, 그 상부에는 역시 찰주가 꼽히는 구멍이 있었다.

 미륵사지석탑은 종래 우리 나라 석탑의 시원적인 탑으로서 그 조성은 목탑을 바탕으로 탑 부재를 석재로 바꾸어 만들어진 탑이라고 알려져 있다. 발굴에 의해 밝혀진 탑의 원래 모습으로 보아도 그 견해가 타당하며, 현존 서원탑이 먼저 만들어지고 동원탑은 그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것은 서원탑은 모든 탑 구성부재를 각각 별개의 석재로 만들어진데 반해 동원탑은 상부 탑신 석재에 기둥과 벽체를 한 돌에서 깎아내는 수법상의 발전이 보이기 때문이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미륵사지석탑을 바탕으로 그 규모를 작게 만든 백제의 조형감각을 잘 나타낸 석탑이다. 탑은 이단의 基石 위에 지대석·면석·갑석과 撑柱를 갖춘 단층기단 위에 세워졌다. 초층답신은 네 隅柱 사이에 벽석을 끼운 사방 한 칸이다. 탑신 위의 옥개받침은 평방 모습의 각재 위에 상반부가 수직, 하반부가 경사로 처리된 석재로 이루어졌고, 옥개석은 비교적 얇고 넓으며, 내릿마루를 깎아내고, 처마는 네 귀에서 가볍게 반전했다. 이층 이상의 탑신은 매우 낮고 옥개받침과 옥개석은 초층의 것과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지며 체감율이 적어 고준한 느낌을 준다. 5층 옥개석 위에는 노반과 覆鉢을 하나의 돌로 만들어 올렸으나 그 위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정림사 창건시에 건립된 것으로서 미륵사지석탑에 앞서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나,415)≪定林寺≫(忠南大 博物館·忠淸南道廳, 1981), 68쪽. 탑의 구성이나 기단 밑의 넓은 굴광판축 등으로 보아 원래 이 곳에 목탑이 있었던 것이 뒤에 석탑으로 바꾸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416)金正基,<彌勒寺塔과 定林寺塔>(≪考古美術≫164, 1984), 2∼8쪽.(<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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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정림사 발굴실측도
<그림 5>정림사 발굴실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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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람배치:백제의 가람배치는 백제가 扶餘에 도읍을 옮긴 후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몇 몇 사원터에서 밝혀졌고, 그 이전의 실태는 아직 알 수 없다. 사원터 발굴에서 그 가람 배치형식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정림사지와 軍守里寺址·東南里寺址·金剛寺址 및 미륵사지이다. 이에 의해 밝혀진 이 시기의 기본적인 가람배치는 一塔式 즉, 중문·탑·금당·강당을 가람 중심축 선상에 배치하고 중문 좌·우에서 나온 회랑이 동서로 뻗어 북절하여 강당 좌우 부근에서 마무리되는 형식이다. 그것은 정림사·軍守里廢寺·金剛寺가 그러했고, 그밖에 臨江寺址·西腹寺址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초의 정림사와 군수리폐사에서는 강당 좌·우에 별도의 독립된 작은 건물 앞쪽에 회랑이 접근한 형식이었고, 7세기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금강사에서 북회랑이 나타나서 강당기단 측면 앞쪽에 닿는 형식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었다(<그림 6>·<그림 7>·<그림 8>·<그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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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군수리사지 발굴실측도
<그림 6>군수리사지 발굴실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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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동남리사지 가람배치도
<그림 7>동남리사지 가람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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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금강사 가람복원도
<그림 8>금강사 가람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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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미륵사지 가람배치도
<그림 9>미륵사지 가람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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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리폐사는 탑을 건립하지 않았던 특이한 사원이었으나 아직 북화랑이 나타나지 않은 시기에 건립된 것이며 미륵사의 가람은 분명히 북회랑이 나타난 형식에서의 변형 가랑이라고 볼 수 있다. 미륵사는 강당을 제외한 일탑식가람을 동서로 세개 배치하고 그 뒷쪽에 강당을 두어 하나의 사원으로 만든 것으로 역시 일탑식가람의 변형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강당이 없는 일탑식가랑을 셋 병치한 것은≪삼국유사≫에 보이는 미륵사창건연기설화의 “…彌勒三尊出現池中…”(≪三國遺事≫권 2, 武王)이라는 말이 삼구의 미륵이 출현한 것을 말한 것이며, 이들 세 미륵을 위하여 세 가람을 병치하여 한 사원을 만든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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