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8. 음악
  • 2) 삼국시대의 음악문화
  • (1) 고구려

(1) 고구려

 대륙과 인접했던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일찍 한민족의 음악문화를 발전시킨 나라였다. 고구려가 백제나 신라보다도 일찍 음악문화를 꽃피운 이유는 대륙과의 밀접한 문화교류에 힘입었기 때문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 중국대륙에서 음악으로 국위를 선양한 나라가 고구려였지만, 신라에 의해서 멸망됨으로써, 고구려의 음악문화에 관한 기록은 중국문헌에 나타날 뿐이고, 또 화려했던 음악문화의 일부분이 수많은 고분벽화에서 확인될 뿐이다. 고구려의 음악문화에 관해서는≪隋書≫·≪舊唐書≫·≪新唐書≫의 음악지와 동이전에 전하고, 악기의 그림을 전하는 고고학자료로 안악 3호분·집안 17호분·무용총·삼실총·장천 1호분 등이 있다.

 고구려의 악기는 역사적 유래에 따라서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국내에서 창제된 것으로 보이는 거문고이고, 둘째는 西域에서 기원된 피리·횡적·오현비파이다. 셋째는 문헌과 고고학자료에 나타난 고구려의 악기들이다. 이제 문헌기록 및 고고학자료에 의거하여 고구려악기의 내력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할텐데, 다음은 거문고의 유래에 관한 기록이다.

⑥ 新羅古記에는 “처음 晉나라 사람이 七絃琴을 高句麗에 보냈는데, 高句麗에서 그것이 樂器인 줄은 알았지만, 그 聲音과 치(타)는 법을 몰랐다. 國人 중에서 능히 그 音律을 알아서 탈 수 있는 사람을 (널리) 구하여 후히 상을 주게 하였다. 이때 第二相인 王山岳이 그 본모양을 보존하면서 자못 그 제도를 고쳐 만들고, 겸하여 백여 곡을 지어 연주하였다. 그 때에 玄鶴이 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玄鶴琴이라고 하였는데, 후에 와서는 단지 玄琴이라고 하였다(≪三國史記≫권 32, 志 1, 樂).

 중국의 七絃琴을 보냈다는 晉나라를 東晉(316∼419)으로 해석할 경우, 거문고와 王山岳의 연대는 대략 4세기경으로 추정될 수 있다. 왕산악이 개량했다는 고구려의 현악기는 ⑤에 언급된 변진의 瑟 모양의 고대 현악기와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 고고학자료에 나타난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이는 고대 현악기가 안악 3호분(357)·무용총·장천 1호분(5세기경) 등에서 발견되는데,618)宋芳松,≪韓國音樂通史≫(一潮閣, 1984), 사진 2-가(安岳 3號墳)·사진 4(長川 1號墳)·사진 5(舞踊塚) 참조. 모두가 長方形의 몸통을 가졌다는 점 및 악기를 무릎 위에 올려 놓고서 연주한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적이다.

 舞踊塚의 그림에 의하면,619)宋芳松, 위의 책, 사진 5-나(舞踊塚) 참조. 거문고의 원형은 첫째 줄이 4현이라는 점, 둘째 4현이 모두 괘 위에 놓인 점, 셋째 열여섯 개가 아닌 열네 개의 棵가 몸통에 박힌 점에서 지금의 거문고와 서로 구분된다. 이런 형태의 거문고 원형이 언제부터 지금의 거문고와 같이 6현과 16괘의 현악기로 발전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략 통일신라시대에 文絃과 武絃이 추가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620)李惠求·張師勛·成慶麟,≪國樂史≫(韓國國樂學會, 1965), 3쪽. 중국문헌에서는 琴으로 그리고 일본문헌에서는 로 알려진 고구려의 거문고는 백제에 소개되어 일본에까지 군후라는 명칭으로 전했고, 삼국통일 이후에는 신라사회에 수용되어 가야금·향비파와 함께 三絃의 하나로서 중요한 향악기였다.

 고구려사회에 불교가 유입된 이후 고구려는 더욱 중국 北朝와 빈번하게 문화를 교류하였고, 따라서 西域樂器의 수입은 필수적이었다. 4세기 이후 북조를 통해서 유입된 대표적인 서역악기가 피리·횡적·五絃琵琶인데, 이 세 종류는 모두 5세기 무렵의 장천 1호분에서 확인되었다.621)宋芳松,<長川1號墳의 音樂史學的 點檢>(≪韓國學報≫35, 1984, 2∼36쪽 ;≪韓國古代音樂史硏究≫, 一志社, 1985, 2∼38쪽). 중국문헌에 오현·오현비파·直頸琵琶로 기록된 다섯줄 짜리의 비파가≪樂學軌範≫에서는 鄕琵琶로 알려졌다.622)≪樂學軌範≫권 7, 鄕琵琶. 고구려의 오현비파는 삼국통일 이후 신라사회에 수용되어 거문고와 함께 삼현의 하나로 향악연주에 사용되었다.

 고구려의 피리가 중국문헌에서 篳篥 또는 觱篥로 기록되었고, 橫笛은 橫吹 또는 笛으로 불리었는데, 이 둘 모두가 서역에서 유래된 관악기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두 관악기가 장천 1호분의 벽화에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623)宋芳松, 앞의 책(1985), 사진 1·사진 3(長川 1號墳) 참조. 5세기에는 고려사회에 수용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고구려의 피리와 횡적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관현합주에서 주요 선율을 담당했을 것이므로, 그런 관악기에 의한 5세기 고구려의 음악문화가 그 이전보다 음향적으로 크게 발전되었다. 고구려의 횡적은 백제에 전래되었고, 그것이 백제 음악인들에 의해서 일본에 전래됨으로써 高麗笛(고마부에)으로 불렸으며, 멸망 이후에는 신라사회에 수용됨으로써 三竹의 모태가 되었다.

 거문고·피리·횡적·오현 이외 고구려 악기로 북(鼓 또는 腰鼓)·簫·阮咸·뿔피리(角) 등이 있는데, 모두가 중국문헌이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되는 악기들이다. 장고처럼 허리가 잘룩한 腰鼓는624)宋芳松, 위의 책, 사진 17(輯安 17號墳)·사진 18(집안 4호분) 참조. 고구려의 대표적인 타악기로서 중국문헌에서는 鼓로 기록되었다. 소는 작은 관을 가지런히 묶어서 세로 세워서 부는 관악기의 일종인데, 흔히 排簫라고 불렸다. 이 관악기가 중국문헌에서는 소로 기록되었고 삼국시대 백제에 소개되었다. 서역의 밴죠(banjo)처럼 둥근 몸통에 긴 목을 지닌 완함은 안악 3호분 및 삼실총 등 여러 고분벽화에 나타나므로625)宋芳松, 앞의 책(1984), 사진 2-가(安岳 3號墳)·사진 6(三室塚).
―――, 앞의 책(1985), 사진 7-다(輯安 17號墳)·사진 9(江西大墓)·사진 16(八淸里 古墳) 참조.
4세기경부터 고려사회에서 널리 연주된 현악기였고, 후에 백제에 소개되었으며, 후대에 내려와서는 月琴으로 알려졌다.626)≪樂學軌範≫권 7, 月琴. 角은 무용총·집안 17호분 등의 여러 고분벽화에 나타나므로,627)宋芳松, 앞의 책(1984), 사진 5-다(舞踊塚)·사진 7-가(輯安 17號墳).
―――, 앞의 책(1985), 사진 8(平壤驛前 古墳)·사진 14(大安里 1號墳)·사진 16 (八淸里 古墳)·사진 19(江西大墓).
고구려사회에서 널리 사용된 관악기의 하나였다.

 고구려의 노래로 來遠城·延陽·溟州가≪高麗史≫악지에 전하는데,628)≪高麗史≫권 71, 志 25, 樂 2, 三國俗樂, 高句麗. 모두가 그 지방사람의 희로애락을 담은 민요의 일종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고구려의 노래들이 백제의 無等山이나 井邑 또는 신라의 東京이나 利見臺처럼 어느 특정한 지방의 민요와 관련된 성악곡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빠르게 거문고와 같은 독창적인 현악기를 바탕으로 대륙의 음악문화를 자주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백제나 신라보다 일찌기 음악문화의 꽃을 피웠다. 중국 북조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구려의 음악문화가 국내적으로는 백제에 큰 영향을 미쳤고, 국외적으로는 고구려 음악인들이 일본과 중국에 파견됨으로써 해외 음악활동을 통해서 국위를 선양하였다. 특히 고구려 음악인들이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의 궁중에서 또 고려악사와 고려악생들이 일본궁중에 머물면서 오랜동안 국위를 선양했는데, 뒤에서 상세하게 거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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