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Ⅴ. 과학기술
  • 4. 신라의 과학과 기술
  • 1) 하늘의 과학
  • (1) 첨성대를 세우다

(1) 첨성대를 세우다

 신라는 선덕여왕때에 瞻星臺를 세웠다.≪삼국유사≫는 선덕여왕대(632∼647)라고 했고,≪세종실록≫지리지는 선덕여왕 2년(633)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동국여지승람≫과≪증보문헌비고≫에 따라 선덕여왕 16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715)≪三國遺事≫권 1, 紀異 1 및≪東國與地勝覽≫권 21에는 선덕여왕 때라고만 했다. 선덕여왕때에 설립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첨성대는 지금 경주 반월성의 동북쪽에 우아한 모습 그대로 서있다. 높이가 9.1m, 밑지름이 4.93m, 윗지름이 2.85m, 기단석으로부터 높이 약 4.16m 되는 곳에 거의 정남쪽으로 1변의 길이가 약 1m의 정4각형의 창문이 나 있는 아름다운 석축 천문대이다. 지금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고, 신라 천문관측의 중심이었다. 신라의 천문학은 첨성대로 상징된다. 7세기 신라의 천체 관측활동은 그 만큼 활발했다.

 첨성대가 어떤 기능의 천문대였는지는 초기의 기록에는 설명이 없다. 천문대로서의 첨성대에 대한 설명은 조선시대 초의 문헌에서 비로소 찾아볼 수 있다.≪세종실록≫지리지의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기사가 그것이다. 그 기사는 첨성대의 위치와 설립 연대, 재질과 크기를 말하고, “그 안이 통해 있어서 사람이 아래위로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716)≪世宗實錄≫권 150,<지리지>, 경주부.
≪新增東國與地勝覽≫권 21, 경주.
이 설명문은 그 후의 조선시대 문헌들이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세종때 편찬된 지리지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리지는 세종때 국가적 과제로 오랜 조사 끝에 편찬된 문헌이므로,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첨성대를 제대로 기술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첨성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717)≪韓國學基礎資料選集≫古代篇(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科學技術篇 485쪽에 박성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첨성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이 있다. 첫째는 현대적인 天文臺와 비슷한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이에 의하면≪세종실록≫또는≪동국여지승람≫의 기록처럼 가운데 구멍을 통해 천문관이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며 꼭대기 井字石 위에 渾天儀 등을 설치하고 天文을 관측했으리라는 짐작이다. 그러나 첨성대의 내부가 너무 다듬어 지지 않고 좁아서 南向의 창문을 통해 위에까지 오르내렸다고 상상하기 어렵게 해준다. 따라서 이 주장은 타당성이 적다는 비판을 받는다. 따라서 오늘날의 天文臺와는 달리 첨성대는 신라의 표준 해시계와 방향표지 시설을 겸한 것이었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또 그 모양이 佛敎의 이상인 須彌山을 본 뜬 것이라면서 첨성대는 곧 佛敎 信仰의 상징물이었고, 그래서 金富軾의≪삼국사기≫에는 제외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첨성대의 건립 위치가 신라의 靈星祭가 실시되던 곳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보면 그것은 당시의 農業神인 靈星 숭배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현재로서 첨성대가 천문대라는≪세종실록≫의<지리지>기사를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기록이나 설득력이 강한 견해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 위에서 천문을 관측한 것이다. 그 관측활동이 매일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천상의 이변이 있을 때, 혼천의와 같은 천문 관측기기를 가지고 또는 육안으로 천체를 관측했을 것이다. 정상의 정4각형의 틀로 둘러싸인 공간은 2∼3사람의 관측자가 활동하기에 알맞은 크기이다. 그러나 첨성대의 구조는 관측자가 수시로 오르내리기에는 아무래도 불편하다. 천변이 있을 때,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관측이 행해지는 것이 고대 천문대이므로, 첨성대의 기능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첨성대는 신라 천문관측 활동의 중심으로서의 상징적인 시설이기도 했다. 어느 방향에서나 똑같은 안정되고 우아한 모양으로 해서, 계절과 태양의 위치에 관계없이 해그림자를 측정할 수 있어 시각과 절기를 확정하는 데 매우 유용했을 것이다. 정상의 정4각형의 틀은 8방위를 거의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거의 정남으로 열린 창문은 사람이 사다리를 걸쳐놓고 오르내리는 데 쓰였지만, 춘분과 추분에 태양이 남중할 때 이 창문을 통하여 태양 광선이 바로 대 안의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칠 수 있는 위치에 열려 있다. 그러니까 동지와 하지에는 창문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므로, 분점과 지점을 아주 쉽게 알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첨성대는 이렇게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다목적의 매우 훌륭한 고대 천문대였다.718)全相運,<三國 및 統一新羅의 天文儀器>(≪古文化≫3, 1964), 18∼22쪽.

 첨성대의 건립은 신라 천문학 발전을 상징한다. 그것은 신라 천문학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신라 천문학을 관장하는 국가 천문기관의 중심적 시설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다. 문무왕 14년(674)에 대내마 德福이 唐에서 曆學을 배우고 돌아와, 새 역법으로 바꿔 쓰게 되었다는≪삼국사기≫의 기사719)≪三國史記≫권 7, 신라본기 7, 문무왕 下.는 역산학의 전문가와 역서를 다루는 국가기관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지만 그 기구는 아직 백제의 제도와 같이 규모를 갖추고 자리가 잡힌 전문적인 기관으로까지 성장하고 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천문박사·누각박사와 같은 전문직의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통일신라에 이르러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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