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Ⅵ. 의식주 생활
  • 1. 의생활
  • 5) 가야의 의생활

5) 가야의 의생활

 金海貝塚은 이웃 梁山의 패총과 아울러 가야지역의 문화가 매우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이는 첫째 漢代 중국문화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았고, 둘째 弁辰 지방에 鐵이 많이 산출되었음에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

 이를 보면 가야의 服飾文化 또한 삼국에 못지 않은 찬란한 것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三國志≫魏書와≪後漢書≫에 변진에 관한 기록으로 그 윤곽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茶山 丁若鏞이 지적한대로, 金官伽耶의 金官은 곧 金冠의 뜻일 것이라 한 견해를 따른다면 가야에서도 금관이 王冠으로서 존재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른 복식도 호화롭고 다채로왔을 것으로 여겨진다.

 ≪三國遺事≫駕洛國記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은 인도공주인 허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는데 이때 왕비가 綾袴를 벗어 산령에게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가지고 온 錦繡·綾羅·疋段·金銀·珠玉·瓊披·服玩器 등이 이루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751)≪三國遺史≫권 2, 紀異 2, 駕洛國記. 이 기록에 따른다면 금관가야의 복식이 멀리 인도의 복식문화에서도 어떠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한 것은 알 길이 없다.752)柳喜卿, 앞의 책, 1989, 48∼49쪽.

 삼국시대의 복식은 오늘날까지 구조상의 큰 차이없이 이어져왔다. 바지·저고리·포의 구조는 2천년 동안 변함이 없었으며 冠帽를 소중히 여기는 것도 오랜 전통이었다. 상고복식의 전통으로서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지목되는 금관은 당시 王者가 샤먼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巫冠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측되며, 그 조형은 스키타이 지방에서 전승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관모는 白樺帽로서 몽고나 고구려의 折風이나 신라의 백화모, 일본의 上古 관모가 비슷한 유형을 가지고 있다. 띠도 革製나 布製로서 당시의 저고리가 엉덩이 선까지 내려오는 긴 것이었으므로 허리를 조르기 위하여 필수적이었다. 금관과 어울리는 銙帶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겠지만 또한 주술적인 내용도 내포되어 있다. 이 밖에 목에는 목걸이, 팔에는 팔찌,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고 발에는 버선을 신고 가죽신을 신었다. 이러한 복식을 제대로 다 갖춘 왕자의 경우는 매우 찬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삼국시대의 복식은 후에 중국의 영향을 받음으로서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구성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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