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Ⅵ. 의식주 생활
  • 3. 주생활

3. 주생활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는 B.C 37년에 주몽이 이끈 부여의 일파가 압록강 중류 동가강 환인지방에 자리잡고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는 이미 B.C 4세기경에 고구려의 선구적인 세력이 결집되어 있었다. 예맥이라고 불리던 것이 그것이다801)李基白,≪韓國史新論≫新修版(一潮閣, 1992), 44쪽.. 고구려는 그 후 중국과의 항쟁과 교류 속에서 고대국가로의 위치를 확보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고구려의 주생활은 현존하는 주택이 없기 때문에 그 자세한 사항을 알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중국의 문헌과≪三國史記≫·≪三國遺事≫등의 고문헌, 그리고 고구려의 많은 고분 중 벽화분에서 자료를 얻을 수가 있다.

 중국의 고문헌 중에서 주택의 기록이 자세한 것은≪三國志≫와≪新唐書≫이다.≪삼국지≫에는 고구려에서 주거를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정했으며 농경생활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좋은 땅이 부족하여 그들의 배를 채우기에 부족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궁궐(宮室)짓기를 좋아하였으며, 주거의 좌우에는 큰 건물을 세워 鬼神·靈星·社稷에 제사하였다고 한다. 집에는 큰 창고가 없고 집집마다 스스로 작은 창고를 지었는데 이를 捊京이라고 하며 또한 그 풍속에 혼사가 결정되면 신부측에서 집(大屋) 뒤에 작은 집을 지어 사위가 들게 하였는데 이를 壻屋이라고 하였다802)≪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 高句麗.고 한다. 이는 데릴사위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장가를 들면 처가집에서 살다가 아이를 낳은 후에 처자를 데리고 자기 집에 와서 살았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당시의 고구려사회가 모계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며 당시의 가족형태가 대가족이었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이 자료에서 볼 수 있는 궁실·대옥·서옥·부경 등의 건물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건물들의 명칭이나 기능이 다른 것으로 미루어 당시 주생활에서의 기능이 상당히 분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자료가 묘사하는 건물들은 당시 지배계급의 주거모습을 묘사한 것이고 농업을 주로 담당하던 下戶 이하의 양인과 천민은 전시기의 주거생활인 수혈주거이거나 원시적인 지상의 주거생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당서≫에서도 위와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왕궁·관부·佛廬 등의 건물은 기와로 지붕을 이엇고 민가 즉 일반백성들의 집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짓는다803)≪新唐書≫권 200, 列傳 145, 東夷, 高麗.고 했는데 이는 지붕을 茨草로 이은 초가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民盛冬作長坑熅火以取煖…”이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분명히 온돌시설과 같은 난방시설을 말하는 것으로「長坑」이란 것이 긴 火道를 가리키는 것은 확실하나 이것으로 미루어 이 난방시설이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온돌을 표현한 것인지 또는 당시 중국과의 문물교류를 통하여 습득되어진 중국 북부지방에서 성행되고 있는「坑」또는「坑床」을 표현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804)金正基,<韓國住居史>(≪韓國文化史大系≫4, 風俗·藝術史 上,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7), 152쪽.. 그리고 民이라고 표현된 사람들이 한겨울에 장갱을 만든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지배계층이거나 그와 비슷한 사회·경제력을 가진 계층의 난방방식은 이것과는 달랐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배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온돌과 같은 구조없이도 실내에서 기거할 수 있는 화로나 부뚜막을 이용한 난방법을 사용했으리라 추측된다.

 이러한 난방형식을 추측할 수 있는 고구려의 벽화가 쌍영총에 있다. 이 그림에서는 묘주 부부인 듯한 인물이 앉아 있는 그림이 있다. 이 주인공 부부가 앉아 있는 곳은 고려시대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유행하던「榻」같은 것인데 이 모습을 보면 벽화에 묘사된 사람들은 좌식의 생활을 영위했다고 보여진다. 한편 무용총의 벽화를 보면 묘주 부부는 높이가 높은 의자에 걸터 앉아 있고 그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식기류들도 모두 다리높은 식탁(床) 위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면 당시의 귀족계급에서는 입식과 좌식생활을 병행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렇듯 당시의 주생활은 쌍영총, 천왕지신총, 대안리 1호분, 안악 1호분, 통구 12호분, 안악 3호분, 약수리 벽화분, 무용총, 각저총, 마선구 1호분등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다805)金正基, 위의 책, 152쪽.. 이 중 안악 3호분은 방앗간·우물·부엌·육고간·차고·외양간·마구간 등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의 건물은 각각의 용도와 기능에 따라 분화되어 있었으며 이것은 농경생활의 다양화와 생산기술의 발달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경제생활의 다변화는 주거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기본적인 가족생활을 영위하던 단순한 구조물에서 사회생활의 근거지로서 변화된 생활을 수용하는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전시대의 竪穴住居와 시원적인 지상주거에서는 한 棟의 건물에서 모든 주거생활이 영위되었으나 이 시점에서는 각각의 건물 기능에 따라 공간을 분할하고 더 나아가 기능에 맞는 건물을 각각의 독립채(棟)로 구분하여 지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건물과 같이 부속채의 개념이 벌써 도입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모든 사람들이 이런 집에서 생활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일부 사회적·경제적으로 지배계층에 있는 부류에서만 가능했으리라고 추측된다.

 백제의 주생활은 현재 남아 있는 유구가 수혈주거밖에 없고 그 이외의 지상주거를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으므로 문헌자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나 그 문헌자료 조차도 많지 않아 정확한 주생활을 고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아버지가 주몽이라는 사실806)≪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로 보아서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이 남하하여 삼한의 마한지방에 도읍을 하여 성장한 것으로 미루어 대개의 주거풍속은 고구려와 비슷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를 입증하듯≪구당서≫에 풍토와 산물이 고구려와 아주 비슷하다라는 기록807)≪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百濟.이 있으며,≪신당서≫에도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808)≪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百濟.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삼국사기≫에 온조왕이 궁실을 지었던 일에 대해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았으며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809)≪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15년.라고 하여 지배계층의 주생활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리고≪삼국유사≫에는 堗石이라 하여 스스로 덥혀지는 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810)≪三國遺事≫권 2, 紀異 2, 南扶餘 前百濟. 이는 온돌(구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의 長坑은 그간의 연구를 통해 ㄱ자형 구들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철기시대의 수원 서둔동 주거지에서 ㄱ자형 구들이 발굴되었고, 中島를 비롯한 여러 유적에서 구들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백제에서도 구들이 시설되었음은 충분히 입증된다811)주남철,≪백제시대의 주택≫(공산성 성안마을 정비(백제촌 조성) 고증조사보고서, 충청남도, 1991).. 또한 조선시대에 중국인 董越이라는 사람이 쓴≪朝鮮賦≫에는 “백제지방에서는 땅에서 뚝 떨어진 높이에 마루를 설치한 집을 짓고 사다리에 의지하여 오르내린다”812)강영환,≪한국 주거문화의 역사≫(기문당, 1993) 47쪽에서 재인용.라는 기록은 고상식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예이다. 이는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시골의 원두막과 같은 형식의 주거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또한 이것은 만주 집안현에 있는 마선구 1호분에서 볼 수 있는 귀틀집의 고상주거형식을 입증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상의 문헌자료들을 고찰해 보면 백제에 불교가 도입된 이후인 枕流王 원년(384) 이후에는 적어도 고구려와 같은 형식의 주생활을 영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는 백제의 문화를 보여주는 부여나 공주 근처에서 출토된 유물과 백제인이 지었거나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고 하는 신라의 皇龍寺탑지와 일본의 법륭사 등과 같은 건축물과 당시의 절터·궁궐터 등에서 출토되는 와당·전돌을 보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특히 출토 유물들을 보면 당시의 백제인들의 주생활이 고구려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같이 사회적·경제적으로 지배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기와로 지붕을 잇고 살았으며 그 이외의 사람들은 짚이나 띠 또는 새 등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와 가야의 주생활도 현재 남아 있는 유구는 거의 없고 다만 집모양토기(家形土器)가 출토되어 당시의 주생활 모습을 단편적으로 알려주고 있으며 이 이외의 사항은 문헌자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집모양토기가 대체로 副葬用, 또는 의식 특히 葬儀禮式에 쓰였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 집모양토기가 당시의 주택이나 주거생활을 반영하지 않고 만든 사람의 독창적인 상상력에 의해서 제작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신라시대의 집모양토기813)慶北大博物館 소장.는 높이 11.5㎝로 고상식의 주거형식을 보이고 있는데 형태를 살펴보면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맞배지붕을 올린 집이다. 이 집모양토기가 형태 그대로 고상식의 주거형태라면 위에서도 언급한 만주지방 집안현에 있는 마선구 1호분의 벽화를 입증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隋書≫신라전에 풍속·형정·의복이 대체로 고구려·백제와 같다814)≪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新羅.는 기록과도 부합된다. 지붕의 겉 표면은 다른 집모양토기와는 달리 기와골이 표현되어 있지 않아 초가지붕을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이는 신라 전성기의 헌강왕대에 서울(경주)의 민가 중에 초가가 한 채도 없었다는 사실을 볼 때 이 유형의 집은 일반 백성들의 집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가야시대의 집모양토기815)湖巖美術館 소장.는 높이 35㎝, 길이 36.8㎝의 크기로 집모양토기 중에서는 대형에 속한다. 이 집모양토기는 장방형의 평면을 가진 형태로 지붕은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었고 처마 끝에는 굴곡을 두어 막새기와를 표현하였다. 집은 전체적으로 3칸인 듯 좌측과 우측에 각각 1개와 2개씩의 창문을 선으로 표현하였고 중앙에는 2짝의 여닫이 문을 표현하였다. 이 형태로 보아 좌우는 방으로 추측되고 중앙은 바닥이 흙으로 마감된 부엌으로 추측된다. 이 3칸의 집은 주거공간의 분할로 남녀노소가 한 방에서 잠을 자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공간의 확대가 아니라 이렇게 집을 꾸밀 수 있었던 기술과 경제력의 발전을 말해 주며, 나아가 이러한 발전이 주생활 문화에 영향을 미쳐 1가구 1실에서 1가구 多室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건축기술은 6세기에 들어 현저하게 발전하였는데 신라는 뚜렷하게 분업화된 기술자들을 효과적으로 조직화하여 국가적인 토목건축공사를 추진할 수 있는 생산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南山新城碑와 같은 일부 금석문 속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816)김동욱,≪한국건축공장사연구≫(기문당, 1993), 15쪽.

<李鐘哲·鄭明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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