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3. 역학·의약·기술

3. 역학·의약·기술

 백제는 일찍부터 宋의 元嘉曆을 사용하고 있었으니≪周書≫백제전에 “…用宋元嘉曆 以建寅用爲歲首”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公州 武寧王陵 출토 買地券의 月朔과 日干支가 원가력과 부합되고 있는 점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주서≫백제전에 백제의 外官 10部중에 日官部가 있고≪일본서기≫에 백제의 曆博士가 보이므로 백제에서는 일찍이 曆관계의 업무를 관장하는 官署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있어서는 日曆 관계에 대하여≪大日本史≫陰陽志 註에서 “≪日本書紀≫의 上世帝紀에는 日食의 기록이 없는데 推古帝 36년에 처음으로 일식을 쓰기 시작하였다. 法隆寺 金堂藥師…飛鳥寺 釋迦像光背 등은 모두 간지를 쓰고 있어 이것은 曆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되겠다. 지금 원가력에 의거하여 추고천황 12년 甲子에서 持統帝 5년 辛卯年까지 月朔干支를 照合하면 不合함이 하나도 없어 원가력을 사용했음을 알 수가 있다”라고 하여 推古 12년 이후 원가력을 사용했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 원가력을 사용하게 된 것도 백제 사람들의 활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일본서기≫欽明天皇 15년조에 백제에서 역박사를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원가력 시행에 대한 하나의 증거로 飛鳥寺의 건립과 일치된 석가상이 백제인에 의하여 제작된 것이라는 데서도 가능한 것이다. 특히 추고천황조의 원가력 시행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백제 관록스님의 활동이다. 관륵스님은 추고천황 10년에≪曆本天文地理遁甲方述≫의 책을 일본에 전하고 일본 書生에게 역법을 전수하였다는 사실이≪일본서기≫추고천황 10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관록스님이 일본에 전한 曆은 원가력으로 추정하고 있는데,835)李丙燾,≪韓國古代史硏究≫(박영사, 1976), 585쪽. 그렇다고 하면 추고천황 12년의 역의 시행에는 관륵스님의 원가력 전수와 그 교육이 크게 기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백제의 역관계 문화도 일본에 전달되어 그 영향이 컸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백제는 의술과 약업에 관한 지식과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주서≫백제전에 ‘…亦解醫藥卜筮占相之術’이라 있어 이러한 추정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또한 內官部中에 藥部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술과 약업 관계의 제도도 정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백제의 의술과 약업의 지식과 기술도 일본에 전수되어 일본에서 약업이 성립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일본서기≫흠명천황 4년조에 백제에 醫博士와 藥物을 요청한 사실이 보이며 15년조에는 백제에서 일본에 의박사와 採藥師를 파견한 기록이 보인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의박사와 채약사를 파견한 것은 백제의 의술과 약업의 기술이 그대로 전수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의약술의 전수와 아울러 의약서적도 일본에 전해졌던 것이니 기원 후 984에 圓波康賴가 편찬한≪醫心方≫30권에는 여러 나라의 처방서와 함께≪百濟新集方≫이라는 의술서가 인용되어 있고 약간의 내용도 기록되어 있으니 이러한 내용은 백제의 의약술이 일본에 전수된 역사적 사실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836)三木榮,≪朝鮮醫學史及疾病史≫(발행처, 발행년도 不明), 9∼10쪽. 또한 이≪의심방≫에는≪新羅藥師方≫이라는 의술의 책이름도 보이고 있어 신라의 의술과 의술서적도 일본에 전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삼국에서 역학과 의약 등이 일본에 전수된 내용을 살펴보았거니와 이밖에≪일본서기≫에는 삼국의 技藝가 일본에 전수된 사실을 상당한 내용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樂人의 파견에서 짐작되는 음악의 전수, 衣工과 縫女의 파견에서 알 수 있는 수공업기술의 전파, 저수지 축조에 따른 제방 축조기술 등의 전수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일본의 역학, 의술, 약업, 기예 등의 성립도 삼국의 문화적 영향과 지도하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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