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3. 중앙통치조직의 정비
  • 3) 내정기관의 정비

3) 내정기관의 정비

 다음으로 통일신라 중앙행정조직에 큰 비중을 갖고 있는 115개의 내정관부를 살펴보자. 통일신라는 전제왕권의 유지를 위해 連坐制를 비롯하여,0277)朱甫暾,<新羅時代의 連坐制>(≪大丘史學≫25, 1984) 참조. 왕권에 직접적인 무력도발에 대응하려는 군사적 기반인 侍衛府 등이 큰 몫을 하였다.0278)李文基, 앞의 글 참조. 그러나 신라 전제왕권의 또 하나의 제도적 특징은 다양한 내정관부의 존재라 하겠다. 내정관부는 內省계통의 71관부, 御龍省계통의 35관부, 그리고 東宮계통의 9관부로 나뉘는데 각기 특징적 조직을 갖고 있다.0279)三池賢一,<新羅內廷官制考>上·下(≪朝鮮學報≫61·62, 1972) 참조. 중앙 행정관부의 정비가 신문왕대에 일단락 된 후 그에 따라 궁정관부는 왕권의 전제화가 본격화된 성덕왕(702∼737) 전후에 정비되었다.

 특히 성덕왕은 재위 36년간에 朝貢·賀正·宿衛外交 등 다양한 교섭사를 파견하였으므로0280)申瀅植,<統一新羅의 對唐關係>(앞의 책, 1984), 326∼345쪽. 당의 내성제도를 수용하였을 가능성은 크다. 그러나 당의 殿中省은 尙食·尙藥·尙舍·尙乘·尙輦局 등의 6기관으로 되어 있으나,0281)≪舊唐書≫권 44, 志 24, 職官 3. 신라의 그것은 다양한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직능도 복잡하고 강하였다. 즉 신라의 내정관부는 내성·어룡성·동궁계통으로 구분되었을 뿐 아니라 그 직능도 궁정관부의 관리를 비롯하여 관리양성·규찰·예의·제사 및 생산관리 등 국정전반에 걸치고 있었다.0282)三池賢一, 앞의 글, 60쪽. 따라서 내정관부는 내성·어룡성 등의 일부 고위층은 진골(또는 6두품) 출신으로 임명되었고, 대부분의 관리는 4·5두품, 良人 또는 노비까지 포함되는 특수기관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0283)李仁哲,<新羅內政官府의 組織과 運營>(앞의 책), 80∼85쪽.

 신라의 내성은 당의 상승국이나 상연국 등의 직능을 일반행정관부로 이관하고, 洗宅을 어룡성과 동궁성에 둠으로써 하대에 있어서 宣敎省과 瑞書院·崇文臺로 연결되어 왕권재확립의 모색과 관계가 있었다.0284)李基東, 앞의 책, 262∼263쪽. 더구나 私臣이 병부령이나 재상을 겸직케 함으로써 왕실행정만이 아니라, 국가의 일반행정에까지 관여할 수 있게 하였다. 우선 왕실비서기관인 內省에는 감찰(內司正典)·교육(所內學生)·文翰(詳文師)·천문(天文博士)·醫學·율령(律令典)·의식(引道典)·왕릉(陵色典)·궁중 수요(朝霞房·靴典·鞜典·氷庫典), 그리고 외교(倭典) 등 각종 전문기관이 포함되어 있다. 말하자면 宮中內閣의 의미가 있으며, 전문분야에 있어서 중앙행정관부를 통제하면서 전제왕권의 원활한 운영을 꾀하였다고 생각된다. 즉 내사정전은 司正府, 引道典은 예부, 능색전은 典祀署와 工匠府, 소내학생은 국학, 율령전은 理方府를 감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들 관리가 官等이 낮았으므로, 직접 행정관부를 통제한 것이 아니었고, 내성의 私臣이 재상을 겸직하기 때문에 그를 통해 행정적 감독이 가능했으리라 여긴다. 특히 율령·천문·의학 등의 전문가 양성을 관장하고 있어 내성이 갖는 정치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내성기능의 강화는 시위부 위상의 강화와 함께 전제왕권의 지주로 작용하는 데 손색이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국왕의 行幸을 관장하는 어룡성은 내성 권한의 비대함에 따라 그 위치도 격상되었다. 여기에도 문한(崇文臺)·의약(藥典·針房·供奉醫師)·음악(監典)·의례(祭典·獄典)·음식(肉典) 등 전문기관을 두었으며, 願堂典을 두어 寺典(내성 소속)과 함께 7사성전을 관장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태자궁인 東宮官에도 어룡성과 같이 洗宅이 있어 侍從과 詔誥의 직을 함께 관장케 하여0285)李基東, 위의 책, 240쪽. 태자의 위상을 높였다. 특히 律令政治의 발달에 따라 司正官府나 律令機關을 행정·내정기관에 두었을 뿐 아니라, 外司正을 각 지방에도 파견하여 왕권집행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으며, 외교기관과 제사기관을 內省에도 둠으로써 행정기관을 견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행정·내정기관의 견제와 균형은 宰相과 私臣을 겸직케 한 데서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끝으로 僧職인 政官(政法典)은 승려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大舍·史 등 하급실무직과 國統(1인)·州統(9인)·郡統(18인) 등 정치 자문직 등이 있었다.0286)李弘稙,<新羅僧官制와 佛敎政策의 諸問題>(≪白性郁博士頌壽記念論叢≫, 1959) 참조. 국통(寺主·僧統)은 진흥왕 12년(551)에 고구려 귀화승인 惠亮이 처음으로 임명된 이후, 왕의 정치 자문직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眞興王巡狩碑에 등장된 沙門道人은 上大等·大等과 함께 왕의 수행원으로 정치에 관여한 것으로 생각된다.0287)磨雲嶺碑와 黃草嶺碑에는 法藏·慧忍 등이 居柒夫(대등) 앞에 등장하고 있어 이들의 정치적 위상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이러한 승관제의 정비는 주통·군통으로 이어져 불교와 정치의 관계로 확대되어 성전사원의 문제까지 연결되었을 것이다.

 皇龍寺가 百座講會와 看燈의 장소로서, 승통의 거처로서 中古王室과 깊은 관계를 맺은 이후 文武王과 四天王寺, 神文王과 感恩寺, 聖德王과 奉德寺, 그리고 惠恭王과 奉恩寺로 이어져 왕실과 사찰과의 관계가 성립되어 갔다. 특히 무열계왕실은 이러한 成典寺院을 통해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진골왕족에 대한 견제를 꾀할 수 있었고,0288)蔡尙植, 앞의 글, 99쪽. 下代에는 백고좌법회를 통해 왕실과 국가의 안녕·보호를 위한 정신적 기반을 마련코자 했으므로 정치적 혼란기에도 역시 願刹의 역할은 컸던 것이다.0289)申瀅植, 앞의 책(1981), 177쪽. 그러나 신라말에 이르러 국왕의 빈번한 寺刹幸은 왕권의 회복보다는 정치·경제적 출혈로 이어졌으며, 승통이나 高僧大德이 원만한 정치조정자나 자문의 기능을 다할 수 없게 되어갔다. 따라서 다양한 僧職이나 행정직간의 관계가 혼선을 이루어 도리어 전제왕권 유지에 역기능을 다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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