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4. 지방·군사제도의 재편성
  • 3) 진과 성곽시설

3) 진과 성곽시설

 신라정부는 국토를 방위하고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軍鎭을 설치하고 성곽시설을 축조하였다. 신라 통일기에 설치된 군진으로는 北鎭·浿江鎭·淸海鎭·唐城鎭·穴口鎭 등이 있었다. 이들 군진은 해상교통의 요충이자 군사적 요지에 설치되었다.

 태종무열왕 5년(658)에 말갈을 방어하기 위하여 悉直(삼척)에 설치되었던 북진은 문무왕 15년(675)에 安北河(덕원 북면천)에 연하여 關城과 鐵關城을 축조하고, 문무왕 21년에는 沙湌 武仙이 정병 3천으로 比列忽(안변)을 鎭戍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문무왕 21년경에는 함경남도 안변지역으로 옮겨진 듯하다. 효소왕대에는 비열홀에 둘레 1,180보의 성을 쌓았고, 성덕왕 20년(721)에는 永興의 龍興江과 定平의 金津江 사이의 分水山脈을 이용하여 北境長城을 축조하였다.0336)李文基, 앞의 책, 345쪽.
池內宏,<新羅の戊子巡境碑と新羅の東北境>(≪滿鮮史硏究≫上世-2, 1960), 49∼55쪽.
그리고 경덕왕 16년(757)경에는 炭項關門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북진이 안변으로 옮겨진 이후, 오늘날의 함경남도 안변군·문천군·고원군·영흥군 일대를 관할하는 군진으로 확대 편성되었음을 의미한다. 헌강왕 12년(886)에 ‘狄國人(발해인)이 鎭에 들어와 片木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그것을 취하여 바친다’고 북진이 아뢰어 왔다는 사실을 통하여0337)≪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헌강왕 12년. 북진이 9세기 후반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진이 발해의 남침에 대비하여 동북방에 설치된 군진이었다면 패강진은 서북방에 두어진 군진이었다. 신라정부는 효소왕 3년(694)에 松岳·牛岑 2城을 쌓았고, 성덕왕 12년(710)에 開城을 축조했고 성덕왕 17년에는 한산주도독 관내에 諸城을 축성하였다.0338)이들 성곽시설의 축조를 예성강 이북에 있는 구고구려인에 대한 격리·견제책으로 이해하고, 패강진의 설치를 구고구려 영토에서의 지배권 장악과 고구려 유민의 정착을 위한 정치적 배려로 이해한 견해가 있어 흥미롭다(申瀅植,<統一新羅時代 高句麗遺民의 動向>,≪統一新羅史硏究≫, 三知院, 1990, 101∼103쪽). 성덕왕 32년에 신라는 당의 요청에 따라 渤海의 남변을 공격하였고, 당나라는 출병의 대가로 성덕왕 34년(735)에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었다. 이에 패강진이 성덕왕 34년 이후에 설치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설치시기를 구체적으로 전하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金巖이 패강진두상을 지낸 혜공왕 5년(769)경까지는 설치되었을 것이다.0339)≪三國史記≫권 43, 列傳 3, 金庾信 下.
木村誠,<新羅郡縣制の確立過程と村主制>(≪朝鮮史硏究會論文集≫13, 1979), 252∼255쪽.

 패강진의 관할범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0340)末松保和,<新羅の郡縣制, 特にその完成期の二三の問題>(≪學習院大學文學部硏究年報≫ 21, 1975), 76∼77쪽.
方東仁,<浿江鎭의 管轄範圍에 關하여>(≪靑坡盧道陽博士古稀紀念論文集≫, 1979), 299쪽.
木村誠,<統一新羅の郡縣制と浿江地方經營>(≪朝鮮歷史論集≫上, 1979), 258∼259쪽.
李成市,<新羅兵制における浿江鎭典>(≪早稻田大學大學院 文學硏究科紀要≫7, 1980), 199∼207쪽.
李基東,<新羅 下代의 浿江鎭>(≪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208∼231쪽.
李仁哲, 앞의 책(1993), 221∼228쪽.
하지만 당나라가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영토로 인정한 이후에 신라가 예성강이북으로 진출하였다는 사실에서 이 당시의 패강은 오늘날의 대동강이었음이 명백하다. 그 명칭으로 보아 패강에 설치되었을 패강진도 당연히 대동강에 가깝게 설치되었을 것이다.

 신라가 패강에 수자리를 설치하여 발해를 견제하겠다고 당에 보낸 표문이나, 패강의 수자리는 당시 幽州節度府使로 있던 安祿山과 서로 바라보고 멀리 도모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라고 한 唐 玄宗의 말0341)≪文苑英華≫권 471, 勅新羅王金興光書. 역시 패강진이 패강(대동강)에 가까우면서 당의 幽州를 서로 바라볼 수 있는 해안가에 설치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럴 경우에≪삼국사기≫권 37, 지리지 4에 기록된 仇乙峴(송화군 풍천면)·闕口(신천군 문화면)·栗口(은율군)·長淵(장연군)0342)≪新唐書≫권 43下, 志 33下, 地理 7下, 所引 賈耽의 方域道里數記에 보이는 長口鎭은 패강진의 12개 支鎭 가운데 하나로서, 장연군 장산곶에 설치된 지진의 명칭이라 할 것이다.·麻耕伊(송화군)·楊嶽(안악군)·板麻串(송화군 동부)·熊閑伊(송화군 남부)·甕遷(옹진군)·付珍伊(옹진군 강령)·鵠島(백령도)·升山(신천군) 등 12개 군현 미설치 지역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이들 지역이 신라의 영토였음에도 통일신라의 군현을 기록한≪삼국사기≫권 35, 지리지 2 漢州條에는 전하지 않고, 지리지 4 한산주조에만 전해지는데, 이는 이 지역에 군현이 아닌 군진이 설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권 40, 職官志 下 浿江鎭典조에는 ‘頭上大監 一人 宣德王三年始置 大谷城頭上 位自級湌至四重阿湌爲之’라 하여 패강진의 두상대감과 대곡성두상이 나란히 기재되어 있어, 패강진두상대감이 곧 대곡성두상이었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지만,≪삼국사기≫권 5, 新羅本紀 宣德王 3년(782)조에 왕이 한산주를 순행하여 民戶를 패강진으로 옮겼다는 기사가 있고, 그 이듬해인 선덕왕 4년조에 대곡진군주의 임명기사가 적혀 있어 패강진과 대곡진(성)은 서로 다른 군진이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대곡성 등 14군현이 설치된 시기는 경덕왕 7년(748)으로, 당시 신라에서는 태수나 소수가 법당두상을 겸하였기 때문에 대곡성 등 14군현에 임명된 태수와 소수 역시 법당두상을 겸하였다. 대곡성에는 군태수가 파견되었으므로 대곡성두상의 관등은 본래 舍知에서 重阿湌까지로 태수와 같았다. 14군현 설치 기사에서 대곡성만이 특별히 기재되어 있고,≪三國史記≫패강진전조에도 대곡성만이 보이는 까닭은 대곡성이 이 지역의 다른 성에 비해 규모도 크고, 신라의 패강지역 진출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경덕왕 21년에 五谷·休巖·漢城·獐塞·池城·德谷의 6성을 쌓고 태수를 두었다고 하는데,0343)≪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경덕왕 21년. 이들 성곽의 태수는 대곡성두상의 관할하에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신라정부는 선덕왕 3년(782)에 패강진의 직제를 개편하여 두상대감직을 설치하면서, 대곡성의 군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대곡성두상도 패강진두상대감과 같은 관등을 갖도록 조처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패강진은 그보다 더 서북쪽에 위치한 鳳山을 本鎭으로 하고 앞에서 언급한 황해도 서북해안의 12지역을 군관구로 하여 해안경비와 발해공격을 위한 전진기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패강진의 본진에는 ‘頭上大監 1인-大監 1인-頭上弟監 1인-弟監 1인-步監 1인’의 군관이 배치되었고, 대감 6인과 소감 6인이 12개 支鎭에 한명씩 나누어 배치되었다.0344)패강진두상대감은 9세기경에 浿江鎭都護로 그 명칭이 개정되었다(<新羅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韓國金石遺文≫, 163쪽). 이때 대감 6인이 배치된 6개 支鎭은 대감의 관등이 태수와 같은 점으로 보아 郡級에 해당하는 지진이며, 소감이 배치된 6개 지진은 縣級에 이르지 못하는 지진이었다. 패강진에 주둔한 병력은 남쪽의 민호를 옮겨서 편성한 屯田兵과 3년을 기한으로 赴防한 防戍軍으로 조직되었다. 신라정부는 헌덕왕 18년(826)에 한산 이북의 여러 州郡人 1만을 징발하여 浿江長城 300리를 쌓았다.

 淸海鎭은 흥덕왕 3년(828)에 張保皐가 중국에서 돌아와 국왕에게 건의하여 설치되었다. 당시에 장보고는 중국의 해적들이 신라인들을 잡아다가 노비로 삼는 것을 보고 돌아와, 흥덕왕에게 莞島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방어해야 한다고 건의하니, 국왕이 이를 허락하고 1만 명의 병력을 주었다고 한다.0345)≪三國史記≫권 44, 列傳 4, 張保臯. 그러나 실제로는 장보고가 국왕의 양해를 얻어 완도의 邊民 1만을 규합한 일종의 民軍조직으로 청해진을 설치하였다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청해진의 설치목적도 해적선의 소탕이나 해안지대의 안정확보에 한정되는 아니라 동북아시아 무역의 패권장악에 있었다.0346)李基東,<張保皐와 그의 海上王國>(≪張保皐의 新硏究≫, 莞島文化院, 1985 ;≪新羅社會史硏究≫, 一潮閣, 1997, 208∼211쪽).

 ≪三國史記≫지리지에는 청해진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당성진과 혈구진의 경우를 통해 보면 청해진 역시 郡 정도의 영역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이에 오늘날의 완도군 전역에 걸쳐 청해진이 설치되었고, 완도군이 여러 개의 섬으로 되어 있는 만큼 청해진도 패강진과 마찬가지로 완도에 두어진 본영과 주변의 여러 섬에 설치된 지진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완도에는 初築 연대를 알 수 없는 郡內里城·駕轎里石城·堂洛里城 등의 성곽이 있고, 신라 통일기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將島土城이 있다.0347)崔根泳·閔德植,<靑海鎭의 歷史的 考察과 그 城의 分析>(≪張保皐의 新硏究≫, 1985, 莞島文化院), 223∼308쪽.
趙由典·金聖範,<莞島 淸海鎭 遺蹟에 관한 一考>(≪淸海鎭 張保皐大使 海洋經營史 硏究≫, 中央大, 1992), 209∼236쪽.

 청해진의 최고 지휘자는 淸海鎭大使였으며, 그 아래에 兵馬使가 있었다.0348)李文基, 앞의 책, 415∼417쪽. 청해진의 병력은 국왕이 주었다고 하는 병력과 현지의 주민들을 둔전병으로 편성한 병력 그리고 장보고의 사병으로 조직되었다. 하지만 청해진의 병졸집단은 점차 장보고의 사병으로 변모되어갔고, 마침내는 장보고가 중앙의 왕위쟁탈전에 가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후 장보고는 文聖王 8년(846)에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次妃로 삼으려다 중앙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자 반란을 일으켰지만 왕이 보낸 자객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문성왕 13년에 신라정부가 청해진을 파하고 그 곳 백성들을 碧骨郡으로 옮김으로써 청해진은 완전 해체되었다.

 唐城鎭은 흥덕왕 4년(829)에 설치되었다. 신라정부는 唐恩郡을 당성진으로 만들고 沙湌 極正을 보내 지키게 하였던 것이다. 당성진은 당은군과 그 영현 3개를 포괄하는 지역에 두어졌다.0349)李文基, 위의 책, 414쪽. 당성진의 우두머리는 혈구진과 마찬가지로 鎭頭였다고 생각된다. 당성진이 있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에는 唐城이라 불리는 토석혼축으로 된 길이 1.2km의 포곡식 산성이 있으며 그 주위에 소규모 토성이 있다.

 穴口鎭(강화)은 문성왕 6년(844)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아찬 계홍이 진두로 임명되었다. 진두는 패강진두상대감 혹은 패강진두상과 같은 계열의 군관명칭이다.≪三國史記≫지리지에 海口郡은 본래 고구려 穴口郡으로 바다 가운데 있으며, 그 영현이 3개였다고 전하는데, 신라정부는 이들 영현을 포함한 혈구군을 문성왕 6년에 혈구진으로 편제하였다. 현재 강화도에 남아 있는 18개의 성곽은 모두 고려시대 이후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진성여왕 10년(896)에 궁예가 穴口城을 쳐부수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0350)≪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 혈구진에도 성곽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의 모든 군진은 영현을 포함하는 군 정도의 영역에 설치되었으며, 성곽시설이 축조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다만 북진과 패강진은 몇 개 군을 합친 넓은 지역에 설치되었다.0351)이들 군진 이외에 施彌知鎭(≪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헌덕왕 14년)·沙火鎭(≪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阿弗鎭(阿火)(≪高麗史≫권 92, 列傳 5, 庾黔弼)·昵於鎭(≪高麗史≫권 82, 志 36, 兵 2, 鎭戍) 등이 사료 상에 보인다. 그러나 시미지진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고, 사화진은 상주 사벌면 일대에 설치된 군진이지만 후백제와 신라 중에 누가 설치하였는지가 애매하다. 다만 아불진과 닐어진은 각기 경주군 서면 아화리와 영일군 신광면에 신라가 설치한 후삼국기의 군진으로 간주된다(李文基, 앞의 책, 410∼411쪽).

 군진에 축조된 성곽시설이 주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면, 왕경과 9주 5소경 그리고 군현에 축조된 성곽은 주로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해 만들어졌다.

 ≪三國史記≫지리지 서문에서는 혁거세 21년(B.C. 37)에 궁성을 쌓고 金城이라 하였다고 하고, 파사왕 22년(101)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고 이름을 月城 혹은 在城이라고 하였는데 둘레가 1,023步였다고 전한다. 또 新月城 북쪽에 滿月城이 있는데 주위가 1,838步이고, 신월성 동쪽에 明活城이 있는데 주위가 1,906步였다고 한다. 경주에는 왕경을 둘러싼 長城이 별도로 축조되지 않은 대신에 동에는 명활산성, 서에는 西兄山城, 남에는 南山新城 등 주위의 산성이 羅城의 역할을 하였다.0352)朴方龍,<都城·城址>(≪韓國史論≫15, 1985, 國史編纂委員會), 338∼387쪽.
李元根,<都城>(위의 책), 541∼565쪽.

 금성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와 긍정하는 견해가 있지만0353)이에 대해서는 朴方龍, 앞의 글 참조. 소지왕 22년(500) 이후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금성이 신라 통일기에는 사용되지 않은 성곽이었음은 분명한 듯하다.

 월성은 신월성 혹은 재성이라고도 불렀는데, 신월성은 성의 형태가 초생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재성은 왕이 거처하는 성이라는 뜻이다.0354)월성에서는 ‘在城’이라 양각된 銘文瓦가 출토되어 월성이 곧 재성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월성은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잡은 반월성을 말하는데, 성의 규모는 동서벽이 860m, 남북폭이 250m이고 성내 면적이 55,000여 평이며, 성벽 길이는 약 1,841m이다. 성벽은 동·서·북 3면과 서남면은 토석을 함께 다지고 그 맨위에 점토를 이겨 덮었다. 성에는 9개의 門址, 垓字와 목책시설이 있었고 성내에는 작은 연못 2개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滿月城은 통일기초에 왕궁이 협소하여 안압지 동편에서부터 천주사지와 첨성대를 포함하여 奈勿王陵 동쪽 부근까지 궁성지를 넓히고 土墻城壁으로 둘러 만월처럼 되었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0355)朴方龍, 앞의 글, 344∼349쪽. 즉 신월성 북쪽에 둥그스럼하게 확장된 부분이 만월성이었다.

 명활성은 경주 동쪽에 있는 명활산에 처음에는 토성으로 쌓았다가 석성으로 개축한 4.5km 길이의 包谷式 山城이다. 서형산성은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서형산(선도산) 중턱을 둘러싼 둘레 약 2.9km의 석성이다. 이 산성은 통일 이전에 축조한 것을 문무왕 13년(673)에 증축하였는데, 소금창고가 있었다. 남산신성은 경주시 남산에 있는 성벽 길이 약 3.7m의 포곡식 석성이다. 성에는 右倉(長倉, 동창)·左倉(서창)·중창의 3개 창고지, 建物址 5개소, 망루지 22개소, 성문지 6개소가 있다.0356)朴方龍,<慶州 南山新城의 硏究>(≪歷史考古學志≫10, 1994), 533∼597쪽. 남산신성은 진평왕 13년(591)에 처음 축조되었고, 문무왕 19년에 증축되었다. 이들 성곽시설 이외에 경주와 그 주변에는 왕성을 보호하기 위한 성곽으로 北兄山城·都堂山城·南山土城·高墟城·富山城·龜城·鵲城·良洞里城 등이 있었고, 일본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新垈里城과 關門城(毛伐郡城)을 축성하였다.0357)朴方龍,<新羅王都의 守備-慶州地域 山城을 中心으로->(≪新羅文化≫9, 1992), 25∼38쪽.

 9주의 직할지인 州治에도 성곽이 축조되었다. 신문왕 7년(687)에 사벌주에 둘레 1,109步의 성곽을 축조하였고, 삽량주에 둘레 1,260步의 성곽을 쌓았다. 현 상주 시가지와 그 주변에는 尙州邑城·屛風山城·紫山山城·금흔리산성이 있다. 현 양산읍에도 北部 洞山城과 新基里의 城隍山城 그리고 조선시대의 邑城이 있으며, 菁州의 주치였던 진주시에도 약 600m의 토축 내성과 약 4km의 石築 外城으로 된 晉州城(일명 촉석성)이 있고, 남강 건너편에 望晉山城, 진주 북방 4km지점에 將壇山城이 있다. 州治에 있는 이들 성곽 중에서 州城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보다 분명한 사실은 주성뿐 아니라 주변의 성곽들이 모두 州司의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한산주에는 문무왕 12년에 晝長城(남한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였다. 首若州의 주치인 춘천에는 三岳山城·牛頭坪古城·鳳儀山城이 있다. 삼악산성과 우두평고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곽이고, 봉의산성이 문무왕 13년(673)에 축조된 走壤城으로 알려졌다. 주양성은 춘천시와 소양강 사이에 자리한 길이 약 700m의 석축성이다. 하서주의 주치였던 강릉에는 溟州城과 濊國土城이 있다. ‘溟州城’銘 와당이 나온 것으로 보아 명주성이 하서주의 주성으로 생각된다.0358)朴泰祐, 앞의 글, 68쪽.

 웅천주의 州治였던 公州는 백제의 옛 수도였다. 이에 백제의 궁성인 웅진성이 웅천주의 주성으로 사용되었다. 헌덕왕 14년(822)에 웅천주도독이었던 金憲昌이 웅진성에서 관군을 맞아 굳게 지켰다는 기록이0359)≪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헌덕왕 14년. 이를 뒷받침한다. 웅진성은 석축과 토축으로 축조되었는데, 석축산성의 길이는 약 1,900m, 토축산성의 길이는 약 550m로 도합 2,450m의 포곡형 산성이다.0360)成周鐸,<都城>(≪韓國史論≫15, 1985, 國史編纂委員會), 172쪽.

 완산주의 주성은 현 전주시 교동에 있는 僧岩山城(동고산성)으로 생각된다. 8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성에서 신라토기편과 함께 성문 6개, 우물 2개, 건축물 10개가 조사되었다.0361)全榮來,<全州東固山城槪括調査報告>(≪全北遺蹟調査報告≫11, 1980), 19∼26쪽. 무진주의 주치인 현 광주시에는 光州邑城·無等山古城·武珍都督古城이 있는데 무등산고성은 백제 때 축조되었고, 무진도독고성은 문무왕 18년(678)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며, 광주읍성 또한 백제토기 등이 발견되어 백제 혹은 통일신라기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0362)井上秀雄,<朝鮮城郭一覽-江原道·全羅南北道·濟州道編>(≪朝鮮學報≫107, 1983), 187∼188쪽.

 소경에도 성곽시설이 축조되었다. 문무왕 13년에 쌓은 國原城(중원경)은 둘레가 2,592보였고, 신문왕 5년(685)에 쌓은 北原京城(원주)은 둘레가 1,031보였다. 또 신문왕 9년에는 西原京城을, 11년에는 南原京城을 쌓았다. 충주시(중원경)에는 忠州舊邑城·南山城(마고성)·桐岳城·大林山城·逢峴城址·彈琴臺土城이 있는데, 충주구읍성이 문무왕 13년에 축조한 국원성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0363)井上秀雄,<朝鮮城郭一覽-京畿道·忠淸南北道編>(≪朝鮮學報≫104, 1982), 138쪽. 원주(북원경)에는 甄萱城·鴒原山城이 있으나 어느 것이 신문왕 5년에 축조한 북원경성인지는 알 수 없다. 청주시(서원경)에는 신문왕 9년에 축조한 서원경성으로 생각되는 淸州舊邑城을 비롯하여 上黨山城·牛岩山城·父母山城이 있고, 외곽지역에도 10개의 성곽이 있다.0364)李仁哲, 앞의 책(1996), 89∼114쪽. 남원에는 蛟龍山城(劉仁軌城)·南原邑城·尺門里山城이 있다. 신문왕 11년에 쌓은 남원경성은 남원읍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소경이 있던 김해에는 盆山城이 있다. 분산성은 금관가야가 축성한 성곽으로 신라 통일기에는 金官京城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0365)朴泰祐, 앞의 글, 72쪽.

 신라 통일기의 군현에도 성곽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군현에서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곽을 그대로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삼국통일전쟁에서 태수·소수·현령이 적병에 대항하여 싸운 성곽이나, 궁예가 격파하였다는 猪足(인제)·猩川(화천)·夫若(금화)·金城(금화군 금성)·孔巖(서울 강서)·黔浦(김포군 검단)·穴口(강화) 등의 성곽은 모두 군현에 있던 성곽이었다.0366)≪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5년 9월 29일 및 권 50, 列傳 10, 弓裔. 통일기에 들어와서 성곽을 증축하거나 신축한 경우도 있었다. 문무왕 13년(673) 8월에 증축하였다는 沙熱山城(청풍), 같은 해 9월에 쌓았다는 召文城(의성 금산성)·耳山城(고령), 達含郡의 主岑城, 거열주의 萬興寺山城, 삽량주의 骨爭峴城 등이 그에 해당한다. 또 충남의 大岩里城(금산)·雲柱山城(연기)·新豊里城(공주)·山城里城(예산), 전북의 楚山山城(정읍)과 전남의 懷州古城(장흥)·普平山城(무안)·沿海山城(강진)·九修里城(강진) 등도 신라 통일기에 쌓은 성곽이다. 康津의 연해산성과 구수리성은 新羅軍馬의 방목장이었다.0367)井上秀雄, 앞의 글(1982), 142∼174쪽.
――――, 앞의 글(1983), 173∼206쪽.
신라정부는 통일국가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하에 행정상의 주요 거점과 군사적 요지에 많은 성곽시설을 축조하고 군진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李仁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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